# 202
第四十一章 사혈(死血) (2)
소림사와 무당파는 무림 양대산맥이다.
두 문파는 산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산맥으로 취급된다. 그것도 가장 큰 산맥으로.
그만큼 역사가 깊다. 무공이 깊다. 사람이 많다.
두 문파는 본산(本山) 무공이나 문도 수로 가늠하지 않는다. 두 문파를 진정으로 깊이 있게 보려면 강호에 퍼져 있는 인맥(人脈)을 살펴보아야 한다.
넓고도 깊은 인맥…….
그들 모두가 무공을 수련한 것은 아니다. 아니,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오로지 순수하게 신앙심만으로 소림사와 무당파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평민이다.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무인들이 찾아내고자 해도 찾아낼 수 없는, 이 세상에 꼭꼭 틀어박힌 소림사와 무당파의 최종비밀병기다.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가?
‘그렇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소림사와 무당파가 멸문했다고 말하지 못한다. 결코.
“썩을 놈들이 무당산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대. 빌어먹을 놈들.”
“장문인께서는 무사하신가?”
“무사할 수가 있나. 설혹 무사한 길이 있다고 해도 그분이 어디 몸을 피할 분이신가.”
“얼마나 살았대?”
“모르지.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고 했으니까.”
“에구! 당분간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겠네.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아무도 없겠지?”
“가려거든 계절은 넘기고 가. 넉넉하게.”
“휴우! 가봐야지. 가서 기도라도 드려야지. 거참, 억울해서 어찌 눈 감으셨을꼬.”
“억울해하시지는 않았을 거야.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으니…… 모두 용서하지 않았을까?”
“그러셨겠지.”
무당파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매우 안타까워했다.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마인들을 저주했다. 저주라고 해 봐야 험한 욕을 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무당파가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은 무당산을 방문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무당산에는 아무도 없다. 산 생명은 모두 죽었고, 건물은 무너졌다. 나무와 풀은 불탔다. 계곡 물은 핏물이 되어서 흐른다.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방문하려고 한다.
가서 다시 나무를 심는다. 폐허를 조금이나마 손본다.
사람들은 무당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을 다시 만들고, 폐허를 치우고 나면 무당파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산은 무너졌지만 무당파는 무너지지 않았다.
검왕이 무너트린 소림사는 본산일 뿐이다. 마도인들이 무너트린 무당파 역시 본산일 뿐이다.
사람은 죽을 수 있다. 패할 수 있다. 하지만 무당파가 만들어 온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복원될 것이다.
마인들이 멸문했다고 말한 것은 당대 무당파다.
마인들이 죽인 사람은 당대 무당파 문도들, 도인들이다.
무당산은 곧 다른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들은 도관을 다시 세울 것이고, 태극혜검(太極慧劍)을 다시 수련할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소림사와 더불어 무림 양대산맥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리라.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말이야. 무당파 장문인과 독대할 때, 약속한 게 뭐야?”
백화요녀가 물었다.
“킬킬! 그건 나도 궁금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장문인이 싸움 금지령을 내리고 산속에 틀어박힌 거야? 그때 저놈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천살마노가 광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물었다.
그 당시에 정사가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결과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정도든 마도든 모두 공멸을 각오했다.
적을 죽이자고 모여들었지만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어느 누가 일방적인 승리를 자신할 것인가. 저쪽을 죽이기 위해서는 이쪽도 팔 하나, 다리 하나는 내놓아야 한다.
공멸이 예상되었다.
그때는 혈루마옥 무인들이 마도인들 속에 섞여 있지 않았다. 녹천 무인들에게 죽은 많은 고수들이 살아있을 것이고, 마도인들을 척살하였을 게다.
무당파 장문인은 그런 싸움을 만류했다.
어떤 약속을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이다.
검왕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무당파 장문인을 눌러앉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당파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 정도는 해놓았을 터인데.
마도인은 무당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검왕은 그 싸움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마도인의 하늘인 십마로 하여금 마인들을 가로막게 만들었다. 그리고 녹천 무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효과도 봤다.
허나 결국은 무너졌다.
무당파 장문인에게 어떤 약속을 했든지 간에 장문인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한 가지만 약속했지.”
검왕이 말했다.
십마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검왕은 어지간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직접 찾아보라는 식이다. 헌데 입을 열어서 설명해 주고 있으니.
“무당파가 재건할 때 막지 않겠다.”
“뭐, 뭣!”
“아니, 무슨 그런 약속이…….”
십마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무당파 장문인이 정말로 이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믿고 싸움을 중지시켰단 말인가.
“마공관 마학 중에 화화사령공(火火死靈功)이라는 것이 있는데.”
검왕이 말을 마치고 십마를 돌아봤다.
십마는 서로를 쳐다봤다. 이 사람도 보고, 저 사람도 봤다.
검왕이 자신들을 보는 이유는 화화사령공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쳐다볼 때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화화사령공? 그런 무공이 있었나? 누구 무공이지? 마공관 마학에 소장된 것이라면 이름없는 절기는 아닌데. 어떤 놈이 쓰던 마공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화조(火鳥)라는 새가 있지.”
“불새 말하는 거야?”
“맞아. 모두들 아는 그 불새. 천 년을 살다가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 오면 자신의 몸을 불태워버리지. 허면 다시 불타버린 육신에서 새 생명이 탄생해. 어린 불새가 죽은 불새에게서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 불새는 또 천 년을 살지.”
뜬금없이 불새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는 어미가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아니던가.
“화화사령공은 불새의 불이야.”
“……!”
십마는 비로소 주의를 집중했다.
검왕은 허튼 말을 하지 않는다. 화화사령공이라는 것이 불새의 불이라면…… 자신의 몸을 불태워서 새 생명을 얻는 공부라면…… 이것은 불사지공(不死之功)이다.
이토록 허무맹랑한 공부가 세상에 존재할까?
“화화사령공은 미완(未完)의 공부지. 왜냐? 후후! 화화사령공을 시전한 사람은 모두 죽었거든. 단 한 명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어. 그러니 미완이지.”
“그게 무슨 미완이야. 자살신공이지.”
“난 화화사령공에 혈영마공을 붙였어.”
“훅!”
십마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검왕이 화화사령공이라는 허무맹랑한 무공을 말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화화사령공을 실제로 끌어냈다는 말인가.
“화화사령공의 화화는 사(死), 죽음이야. 죽음을 넘어가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령(死靈). 사령을 취해서 혈영마공을 운기하면…….”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군.”
흑포사추가 중얼거렸다.
검왕이 말하는 공부는 무공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십마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공부였다.
검왕이 말을 중단하고 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난 죽으면 죽을수록 강해져. 일단 죽었다가 깨어나면 예전보다 두 배는 강해져. 단, 그 죽음은 어설픈 죽음이어서는 안 되지. 세상이 말하는 죽음, 완전한 생명의 망실이 이루어져야 해. 그렇게 죽었다가 깨어나면 예전보다 두 배는 강해져.”
“…….”
십마는 이번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검왕이 말하는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다.
심장이 정지하고, 뇌 기능이 멈춰지고, 육신이 완전히 활동을 정지한다. 피가 멈추고, 기가 흐르지 않는다. 숨도 흐르지 않는다. 들이쉬는 숨도 없고, 내쉬는 숨도 없다.
그런 죽음을 말한다.
그렇게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이 있나? 아! 있다! 검왕!
“그럼……?”
“어쩐지…… 그때 너무 강했어. 검성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리와 평수였는데. 그럼 마공관에서도 죽었던 건가?”
“죽었다가 깨어나면 배는 강해진다. 빌어먹을!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나? 검왕, 내 널 사부로 모실 테니까 그것 좀 전수해 줄 수 없냐? 꼭 배우고 싶은데.”
십마는 대충 사정을 짐작했다.
검왕은 마공관에서 한 번 죽었다가 깨어났다. 그 영향으로 평수를 유지하던 십마를 장난감처럼 다루게 되었다.
검왕은 화천에게도 죽었다.
어쩌면 그 싸움…… 검왕이 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검왕 스스로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틀림없다. 그 싸움은 피할 수도 있었는데 피하지 않았다.
마공관에서 한 번 죽었던 것으로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죽음을 택한 것이다.
죽은 그를 혈천성주가 되살려냈다. 허나 혈천성주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
검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혈천성주가 검왕을 살려내지 않아도 그는 스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죽을 때 이미 부활할 준비를 끝내고 죽은 것이다.
되살아난 검왕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녹천 무인들이 펑펑 나가떨어졌다. 검왕을 죽였던 화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공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성장할 수 없다.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수련을 해야 한다. 보약도 먹어야 하고, 기진이보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온갖 짓을 다 해도 무공은 겨우 쪼금 성장한다.
검왕은 단시일 내에 무척 강해졌다.
검왕의 말은 사실이다. 화화사령공이라는 것, 정말 있는 모양이다.
검왕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런 말을 무당파 장문인에게 했기 때문일 게다.
무당파 장문인은 검왕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알아듣고 싸움 금지령을 내렸다면 무당파 장문인도 보통이 아니다. 십마도 설명에 설명을 듣고야 이해하는 수준인데, 이런 말을 즉시 알아들었다면…….
검왕은 또 죽으러 갔다.
무당산 능선에서 십마를 철수시키고, 한동안 숨어지내라고 말한 후에, 잠시 어디를 다녀온다고 할 때…… 그 어디…… 죽을 장소를 갔다가 온다는 말이었다.
무당파 장문인이나 검왕이나 큰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정사대전을 보고 있지 않다. 그 너머에 있는 혈루마옥을 보고 있다.
검왕은 자신의 무공으로는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무당 장문인은 검왕을 봤다. 그의 무공도 봤다. 그리고 그런 무공으로도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없다면, 정말로 검왕이 한 번 더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당파가 재건할 때, 방해하지 않겠다.
아주 유효적절한 제안이다.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 속에는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제거해 주겠다는 말도 포함된다. 그러니 안심하고 재건해도 좋다.
“이번에 널 죽인 사람은 누구야?”
백화요녀가 물었다.
“누미.”
“누미…… 누미구나.”
“이번 무공으로는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있나?”
절반쯤 죽다가 살아난 강신천마가 괄괄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아니? 아니라니. 방금 아니라고 했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도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없단 말이야? 하! 이거…… 혈루마옥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강신천마는 입을 쩍 벌렸다.
검왕이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은 누미다. 촌장이다. 녹천주나 중평주를 말한다.
중평주의 제자를 본 적이 있다.
중평주에게 가짜 검왕이 죽음을 맞이할 때인데…… 그때 중평주의 제자라는 여자가 유지자문의 세 명을 간단하게 죽였다. 그들 중 누구라도 십마를 요리할 수 있는 고수들이었는데.
그때 기분이란…… 중원을 쩌렁 울리던 고수에서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검왕의 무공으로도 그 여자를 상대할 수 없는 것인가.
그때, 먼 곳에서 까만 점 네 개가 나타났다.
깨알만 한 점은 곧 호두만 하게 변하고, 다시 주먹만 하게 커졌다.
유화아와 음악삼귀가 달려오고 있다.
“가지.”
검왕이 몸을 일으켰다.
이들이 전부다. 살아남은 팔마 중에서 마군을 제외한 칠마와 유화아, 그리고 음악삼귀. 중원에서 혈루마옥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라면 모두 열두 명뿐이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 같다. 어둡게 변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