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第四十章 정파(正破) (3)
‘으……!’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온다.
여인이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헌데 그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어미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어미와 아기 사이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지 않는다.
어미의 눈에 새파란 인광이 번뜩인다.
저주, 원한, 미움, 증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나쁜 말들이 눈빛 속에 녹아 있다.
어미는 젖을 물리면서 세상의 악인(惡因)까지 물려주고 있다.
혈천성주 진구량은 온갖 악행을 모두 보아왔다.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섬뜩하고, 차분하면서도 피비린내가 흐르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미가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누미!’
진구량은 여인의 정체를 가늠해냈다.
동시에 두 발이 얼어붙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자신의 다리이건만 마치 남의 다리가 된 것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공포가 소록소록 피어난다.
세상에!
혈천성주의 눈가에 옅은 파랑에 일었다.
혈천성주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상징이다. 혈천성주가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그런데 그런 혈천성주가 한 여인에게 공포를 느낀다.
‘잘못 왔다!’
설마 누미가 무당산 한복판에 있을 줄은 몰랐다.
혈천성 정보에 의하면 누미는 무당산에서 이백 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한다. 혈루마옥의 다른 사내들과 함께 꿩이나 잡아먹고, 멧돼지나 잡아먹으면서.
누미가 갑자기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무당산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던 기류는 누미가 흘린 게 틀림없다.
보고도 못 본 척했어야 한다. 호기심을 갖지 말았어야 했다. 무당산 안으로 잠입하는 게 아니었다.
스읏!
혈천성주가 뒤로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때,
“가려고?”
누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혈천성주를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아이를 노려보면서…… 목각인형처럼 입술만 달싹거렸다.
“허허허! 여인이 수유하는 모습은 보는 게 아닌지라…….”
혈천성주는 가급적 누미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누미에 대해서 잘 안다. 아니, 전혀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것이다.
누미는 적벽검문 누강의 제자다.
누강…… 천하에 별 볼 일 없는 자의 딸이다.
적벽검문은 제자를 아들이나 딸이라고 부르니까, 그들의 문규를 따라주면 누강의 딸이다.
또 요미검체다.
적벽검문이 제자를 받는 기준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문파를 배신하지 않을 자,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자, 정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자…… 혈천성주의 눈에는 쓸모없는 자들을 선발한다.
두 번째는 천하제일의 자질을 가진 무재(武才)다.
검왕이 그런 부류다. 누미도 그런 부류다.
적벽검문에 두 번째 기준으로 제자가 된 자는 많지 않다. 열 명 중에 한두 명 정도가 그런 자들인데…… 그러면서도 그런 자들이 적벽검문을 최정상으로 올려놓는다.
이것이 그가 누미에 대해서 아는 것 전부다.
누미가 혈루마옥으로 들어갔고, 혈오를 낳았고, 혈루마옥 사내들과 섞였다는 것 정도는 부수적으로 안다.
부수적…… 세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수적이라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누미는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여마(女魔)가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두어 수 높은 최정상 고수다. 이것은 느낌만으로도 안다.
혈천성주는 지금이라도 즉시 돌아가려고 했다. 헌데,
“성주, 손속 한번 나눠보지 않을래?”
“……!”
혈천성주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목숨 걸고. 아니, 전부 다 걸고. 날 이기면 혈루마옥을 갖는 거야. 구미 당기지 않아?”
“허허허!”
혈천성주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아니, 웃음이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파파파팟!
주위가 철벽으로 둘러싸였다.
언제 어느새 뒤로 돌아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뒤로 그림자들이 장벽처럼 세워졌다.
‘음!’
혈천성주는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렸다.
뒤에 늘어선 자들 중에서 자신보다 약한 자는 한 명도 없다. 십마 중 그 누구도 이들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
“허허허! 노신을 핍박하는가?”
“그러면 어때서?”
“뭐라?”
“당신 좀 핍박하면 어떠냐 이거야.”
누미가 젖 먹이던 아이를 떼어냈다. 그러자 즉시 한 사내가 다가가 혈오를 받아들었다.
누미가 옷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난 당신을 노복(奴僕)으로 만들 생각인데, 괜찮아?”
꿀꺽!
혈천성주는 마른 침을 삼켰다.
누미, 헛소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다. 그리고 그럴만한 무공이 있다. 허나 세상은 무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다.
“내 비록 무공으로는 소저를 감당하지 못하나.”
“주인.”
“…….”
“소저라고 부르지 말고 주인님이라고 불러.”
“허허허!”
“그렇게 웃지도 말고. 건방져 보이잖아.”
“뭐라!”
“쯧!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네.”
누미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등 뒤에 늘어선 장벽 중에서 조각 하나가 뚝 떨어져 나왔다.
그가 말했다.
“혈천성주, 최선을 다해야 할 게다.”
‘제길!’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 보는 얼굴, 이름도 모르는 자…… 이런 자가 검을 들었는데, 그 검이 심장에 꽂힌다.
검을 막을 방도가 없다.
‘이건 거의 심검(心劍) 수준인데.’
혈천성주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무학 중에서 가장 정심한 것을 골라봤다.
사실, 싸움을 목전에 두고 무공을 고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상대를 보면 퍽! 하고 생각하는 게 있어야 한다. 아니, 본능적으로 어떤 초식이 몸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니까 무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검을 쳐오면…… 막을 자신이 없다. 어떤 검인지도 모르면서 자신감부터 없어진다. 분명한 것은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혈루마옥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어.’
스릉!
진구량은 칼을 뽑았다.
질 때는 지더라도…… 노복이라니. 미친년!
누미는 무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모른다. 무공만 강하면 누구든 짓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누미는 아직 어린애다. 그리고 중원을 지배할 그릇도 되지 못한다. 헌데,
스읏!
갑자기 혈천성주의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웃!”
혈천성주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미안. 잠깐 눈속임 좀 했는데, 괜찮지?”
누미가 말한 눈속임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금방 알았다.
누미가 혈천성주의 목덜미에 손을 대는 순간, 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던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검을 거뒀다.
혈천성주의 주의를 끌어낸 것이다.
“암수더냐!”
혈천성주가 노기를 터트렸다. 순간,
우둑!
누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혈천성주의 목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목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꺾일 듯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상한 기운이 몸 안으로 밀려들기 전까지는.
츠츠츠츠츳!
누미의 진기가 흘러들어온다.
‘이건!’
혈천성주는 마법(魔法), 사법(邪法)에 정통하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법을 알고 있다.
누미가 쓰고 있는 수법도 대충 헤아린다.
“네가 정녕 이렇게 치졸한…….”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계집이었더냐!’라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누미의 진기가 흘러들고 말았다. 누미의 기류가 머리를 강타했다.
이런 사술은 마혈이나 혼혈을 짚는 것보다 더 잔인하다. 더 강력하다. 몇 배가 강력하다. 한 사람의 이지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영원한 노복으로 만들 수 있다.
누미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혈천성주는 당황했지만…… 대응할 방법이 없다.
이런 수는 제압당하기 전에 풀어야 한다. 일단 제압당하면 대항할 방법이 없다. 자신이 해봐서 알고 있다.
“허허허!”
혈천성주는 마지막으로 웃었다.
그 자신, 이것이 멀쩡한 정신으로 웃는 마지막 웃음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자신은 누미가 말한 대로 노복이 될 것이며, 앞으로 두 번 다시 지금의 정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완전히 망가진다.
텅!
갑자기 현기증이 치밀었다.
누미의 진기가 머릿속을 강타하고 있다. 멀쩡한 머리를 마구 두들겨 댄다.
“돌아가라.”
“넷!”
진구량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한 채 대답했다.
“지금 당장, 전력으로 무당산을 쳐라. 무당산 안에 있는 생명들이 살아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야.”
“존명(尊命)!”
누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진구량은 즉시 일어서서 신형을 쏘아냈다.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누미는 돌아가는 진구량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십마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무당산에 없는 건 아니지?”
“그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만……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십마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자도 없으니 확답드릴 수는 없습니다.”
“호호호! 검왕, 끝까지 신경 쓰이게 만드네.”
누미가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검왕은 십마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했다. 그것이 아마도 이번 정사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당산에 들어오는 즉시 십마부터 잡으려고 했건만, 그들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으니.
그때, 뜻밖의 보고가 들어왔다.
녹천 무인들 중에 한 명이 숲에서 달려와 깊이 읍하며 보고했다.
“검왕이 나타났습니다.”
“벌써?”
누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검왕을 죽였다. 분명히 죽였다.
헌데 길을 오는 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아마도 검왕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검왕은 화천에게도 죽었다. 하지만 살아났다.
이번에는 자신에게 죽었다. 그런데 또 살아났다.
검왕은 살아날 묘수를 남겨둔 채 죽는다. 허니…… 다음에 죽일 때는 머리를 잘라내야 한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 정도로는 안심하지 못한다. 아예 사지를 절단하는 게 좋다. 아니면 불살라 버리든가. 어쨌든 존재 자체를 말끔히 지워버려야 한다.
검왕이 살아났다면? 무당산으로 올 것이다. 와서 매듭짓지 못한 정사대전을 매듭지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생각했다. 그래서 검왕이 오기 전에 이쪽 일을 화끈하게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
곧 혈천성주가 무당산을 공격할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정과 마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도륙해 버릴 것이다. 모두 죽일 것이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은.
허면 중원 무림 절반은 지워진다.
처음부터 이들 전부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하면 도주하는 자들이 많아진다. 벼룩들처럼 툭툭 튀어서 달아날 것인데, 그들을 쫓아가면서 죽이는 것이 무척 귀찮다.
혈천성주가 싹쓸이를 하고 난 다음, 떨거지들을 정리하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런데 검왕이 왔다?
“검왕이 변수가 되나?”
“되지 않습니다. 이미 화살은 활을 떠났습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래도 찝찝해. 이번에는 확실히 죽여야겠어.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혈천성과 무당산 군웅들의 싸움은 대충 십여 일 이상 지속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무척 많이 남았다. 녹천 무인들이 움직일 때까지는.
그 전에 검왕부터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누미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