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第四十章 정파(正破) (2)
“으…… 질린다.”
“저게 사람인가?”
특정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니다. 검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고, 같은 말을 했다.
검왕은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화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
검왕은 땅을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 땅 위에서 화살 비를 고스란히 피해냈다. 아니, 막아냈다.
그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스릉!
검을 뽑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검을 쓴다.
일초, 이초, 삼초…… 차분하게 검초를 펼친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무심히 검초를 전개한다.
검왕이 직접 무공을 선보이고 있다.
헌데 검법이 매우 기이하다. 초식에 주안점을 둔 것도 아니고, 힘을 바탕으로 한 검초도 아니다. 속도에 장점이 있거나 변화가 다양한 것도 아니다.
매우 평범한 검초다.
다만…… 검초에서 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이 다르다.
처음, 무인들은 아지랑이와 새벽 안개를 혼돈했다. 검초에 새벽 안개가 흩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눈여겨보지 않았다. 초식을 봐야지 아지랑이 같은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나.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지랑이가 짙어진다.
“뭐지?”
“혈영마공인가?”
무인들은 아지랑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짐작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검초에서 끊임없이 아지랑이가 솟구친다.
그제야 무인들은 검왕의 검초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들은 저 검초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저 검을 막아서면 일초에 나가떨어질 것이라는 걸.
검왕은 무위(武威)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먼 곳에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유기(有氣)…….
모두들 저 검에 속도가 붙을 때 얼마나 빠를 것인지 추측했다. 저 검과 부딪쳤을 때, 어떤 강도로 손목을 울릴지 짐작했다. 아지랑이가 일으키는 환영(幻影)도 상상했다.
일 다경, 이 다경, 반 시진, 한 시진……
검왕의 무공수련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검초의 흐름이 끝났나 싶으면 곧 다시 다른 검초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검초는 없다.
검왕은 아침부터 태양이 정중앙에 뜬 정오까지 검초를 전개했음에도 똑같은 초식을 펼치지 않았다.
마공관에 존재했던 모든 무학들이 선보여지는 것 같았다.
마공관의 무학이 아닌가? 마공관의 무학이라고 하기에는 마성(魔性)이 너무 약한데?
어쨌든 검왕은 참 많은 무학을 알고 있다.
검왕이 전개한 초식들이 마공관 마학이 아니라면 적벽검문 검공일 텐데, 검초의 숫자만 무려 이백 개를 넘어서고 있다. 그야말로 줄줄이 흘러나온다.
중인들을 더 기막히게 만든 것은 검에서 피어나는 유기다.
유기가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강성해지는 것 같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내공 수련을 한다.
내공 수련을 하는 목적은 한순간에 진기 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다.
내공은 힘이다.
진기수련을 하면 강성한 힘이 길러진다. 수련의 방법에 따라, 수련하는 정도에 따라서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응축된 진기를 폭발시켜서 더욱더 강한 힘을 돌출한다.
거의 모든 무인이 이런 식으로 내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내공 수련의 본질이 아니다.
내공 수련의 본질은 힘의 순환이다.
지치지 않는 체력, 끊김 없는 발력(發力).
내공 수련이 절정에 이르면 내공이 내공을 자극하고 순환시켜서 잃어버린 힘을 복원시킨다. 사용된 진기를 충원한다. 진기를 사용하고 사용해도 끊임없이 복원된다.
검왕이 그런 경지에 들어섰다.
반나절 동안 끊임없이 검초를 전개하고 있지만 검에서 흘러나오는 유기는 더욱 강성해진다.
검왕을 적으로 돌리면 최소한 반나절 이상은 저런 검초와 싸워야 한다. 더욱이 반나절이 한계가 아니다. 내공이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면 하루도 이어질 수 있다.
무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저런 검초가 있구나 하면서 검왕을 지켜봤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지?”
“두 배, 혹은 세 배.”
“제길! 무공 강해지는 보약이라도 먹는 건가.”
무인에게는 무공을 보는 안목이 있다. 무공이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눈높이는 각기 다르지만, 무공을 보는 눈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십마의 안목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런 눈으로 지켜봐도 검왕의 무공은 이해되지 않는다. 여타 다른 무인들이 지켜보는 것보다 훨씬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무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켜보지만, 십마는 연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무공이다.
초식도 내공도…… 그들의 무공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문이 연달아 펼쳐진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검왕이 펼치는 무공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무공이며, 상상해보지 않은 무공이며,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무공이다.
장님은 ‘하늘’을 상상하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늘에 대해서 세세하게 설명해 주어도 짐작만 할 뿐, 알지 못한다.
하늘을 알려면 직접 눈을 뜨고 봐야 한다.
검왕이 펼치는 무공도 그와 같다. 검왕의 무공을 이해하려면 검왕의 수준에서 직접 검을 써봐야 안다. 검왕과 비등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이해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저런 무공으로도 혈루마옥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검왕은 혈루마옥을 막지 못했다.
혈루마옥을 막았다면 정사 경계선에서 무위나 선보이고 있지는 않았을 게다. 벌써 이 사달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저런 무공으로도 혈루마옥을 막지 못하고 정사 경계선으로 검무(劍舞)나 추고 있으니.
스스슷! 스스스스!
그들 곁으로 삼남일녀가 다가섰다.
“네가 유화아야? 예쁘네?”
백화요녀가 유화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일귀가 죽고 이귀가 떠났다는 소리는 들었다. 너희 세 명으로 마신천강기를 제대로 끌어낼 수 있겠나?”
흑포사추가 싸늘하게 말했다.
“흐흐흐! 원한다면 한 수 보여줄 수도 있고.”
삼귀가 흑포사추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들은 십마의 상대가 아니었다. 십마는 하늘 위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땅밑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감히 십마와 겨룰 수 있다고 자신한다.
“후후! 검왕이 직접 가르쳤다면…… 됐다.”
흑포사추가 손을 내둘렀다.
삼귀도 더 이상 도발하지 않았다.
흑포사추가 방금 전개한 일 수…… 가벼운 손짓에 무거운 경풍이 실려있다. 십마가 검왕 한 사람을 당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십마라는 무명이 허명일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들은 진정한 고수들이다.
마신천강기가 이들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싸움이 시작되면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모두 검왕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 싸울 이유가 없다.
“어디야?”
흑포사추와 음악삼귀가 다투든 말든 백화요녀는 유화아를 한껏 반기며 물었다.
“삼구역(三區域)요.”
“삼구역?”
백화요녀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유화아를 쳐다봤다.
삼구역이라는 말에 다른 십마들도 그들을 돌아봤다.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왜요?”
유화아가 되물었다.
“아니. 삼구역은 저쪽 아래 능선이야. 저기부터 저기까지.”
백화요녀가 유화아에게 지역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바위 두 개를 가리켰기 때문에 구역 정리가 명확하다.
무당산 초입이기는 한데,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것 같다. 삼구역 안에 작은 소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아니고…… 작은 암자로 올라가는 길로 보인다.
“킬킬! 검왕이 이놈들을 단단히 믿는 모양이네.”
십조잔괴가 중얼거렸다.
“저 앞에 누가 있어요?”
유화아가 삼구역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혈천성.”
강신천마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혈, 혈천성!”
음악사귀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혈천성은 마도 최정예 세력이다. 그들이 몰아친다면 성난 파도가 덮치는 것보다 더욱 거셀 것이다.
“이쪽은, 이쪽에는 누가 있습니까?”
오귀가 계곡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혈천성이라면 당연히 무당파가 막아야지. 주적을 손님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
“허면!”
“무당파 사십칠수(四十七手)다.”
음악삼귀를 서로를 쳐다봤다.
무당파는 무계(武系)가 복잡하다.
무당파는 도계(道系)를 무계로 잇는다. 나이가 어려도 도계가 높으면 무계 역시 높다. 이는 다른 문파들도 대동소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남다를 게 없다.
무당파는 본청(本廳)이 없다. 무림에서는 본궁(本宮)을 상청궁(上淸宮)으로 알고 있는데, 집무소(執務所)가 상청궁에 있기 때문이고…… 특별하게 본청을 따로 두지 않는다.
장문인이 기거하는 곳이 바로 본청이다.
무공은 누구나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타궁(他宮)의 도인(道人)에게 배우는 것도 허락된다. 사부와 제자가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라 아랫대가 윗대에게 배우는 구조다.
물론 상청궁에는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도인들이 모여서 수련하기도 한다.
무공을 수련해도 좋고, 수련하지 않아도 좋다.
무당파에 ‘반드시’라는 말은 없다. 모든 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니 도계 혹은 무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무공이 높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장문인이 무공을 모를 때도 있다. 무공보다는 도법(道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당파 내에서는 무공의 정도 차이를 논하지 않는다.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도계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
무당파 사십칠수는 무당파에서 만들어 낸 호칭이 아니다. 무림에서 만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무당파에는 무당삼숙(武當三淑)이 있다.
장문인의 사형, 사제이자 장문인을 옆에서 돕는 가장 친한 벗들을 일컫는다.
그들에 대한 호칭 역시 무당파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무림에서 만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당파에는 서로 싸워 봐야, 진검으로 겨뤄 봐야 승패를 말할 수 있는 고수들이 사십칠 명 있다. 그들 중 약간은 약하고, 약간은 강해 보이지만 손바닥을 부딪쳐봐야 소리가 어느 정도 울리는지 알 수 있는 고수들이다.
그들 모두가 삼구역에 몰려있다고 한다.
정사 대전이 벌어질 경우, 혈천성과 무당파 사십칠수가 제일 먼저 격돌한다.
“치잇! 검왕은 뭘 믿고 우릴 저런 데 보내는 거지?”
“널 믿고 보내겠냐? 유소저를 믿고 보낸 거지. 킥킥!”
음악삼귀가 농담 삼아 말했다.
검왕은 정오가 지나서야 연무를 멈췄다.
검을 늘어트리고 하늘을 보며 서 있다. 정사 무인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면서.
그저 그렇게 서 있는다. 호흡을 가다듬는지, 땀을 식히는지.
그러다가 한순간, 하늘을 향해 거센 고함을 내지른다.
“꺄아아아아악!”
그의 고함이 무당산을 쩌렁 울린다. 계곡을 타고 올라간 고함이 산정에까지 닿는다. 진기를 실어서 토해낸 음성이 인근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리고 걷는다.
뽑아든 검을 검집에 찔러 넣지 않고 손에 든 채로 걷는다.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다. 누구든 시비를 걸어오면 검부터 쓰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정사 경계선을 따라서 걷는다. 아니, 경계선을 벗어나 무당산으로 방향을 꺾는다.
드디어 싸움인가!
마인들이 웅성거렸다. 정도인들 쪽에서도 다급한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검왕이 싸움을 시작했다!”
“검왕이 온다!”
정도 쪽과 마도 쪽에서 내지르는 고함 내용이 각기 다르다. 한쪽은 환호이고, 다른 쪽은 경악이다.
마도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곧 공격에 가담해야 한다. 검왕을 뒤쫓아가야 한다. 허나 그 전에 혈천성으로부터 모종의 언질을 받아야 한다.
마도 무림의 맹주는 혈천성이다.
검왕이 맹주가 아니라 혈천성주가 맹주다.
혈천성주! 어디에 있는가!
이쪽이고 저쪽이고…… 무당산이 갑작스럽게 부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