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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九章 독보(獨步) (3)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눈을 떴고, 눈을 뜬 후에야 자신이 깊은 잠 속에 빠졌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곳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다.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난다. 늙은이가 붓으로 몸에 그림을 그렸다. 차디찬 물감을 묻혀서.
“웃!”
누강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몸이 일으켜진다. 혈도가 제압되지 않았다. 두 팔과 두 다리, 온몸이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그는 제일 먼저 몸부터 살펴봤다.
옷이 입혀져 있다. 자신이 입고 왔던 옷이 마치 벗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입혀져 있다.
옷을 벗었었다. 목욕까지 했었다.
후다닥!
손으로 앞섶을 열고 몸을 살펴봤다.
노인이 몸에 그림을 그렸지 않은가.
간지러운 느낌, 차가운 느낌, 섬뜩한 느낌이 전신 곳곳에서 일어났지 않은가.
몸은 아무 이상이 없다. 예상했던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다. 늙은이가 붓으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붓질을 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음!”
누강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텅 빈 집에 혼자 버려진 듯.
그는 침상 옆 탁자에서 검을 집어들었다.
그의 검이다. 검을 치우지 않고 옆에 얌전히 놔둔 것을 보면 악의는 없는 듯하다. 하기는…… 악의가 있다고 한들 일초지적도 안 되는 그로서는 어찌할 방도도 없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어휴! 일어나셨습니까! 벌써 해가 중천입니다. 전 무슨 잠을 그리 오래 주무시나 했습죠. 안에서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세숫물 대령하겠습니다.”
밖에서 마당을 쓸던 하인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가 있는 곳은 만복객잔 별원(別院)이다. 마당에 연못도 있고, 거닐만한 공간도 있고…… 숙소도 아담하게 지어진 별채라서…… 꽤 비싸보인다.
누강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물었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사람요? 무슨 사람요?”
“이곳에 있던 노인과 여인들 말이네.”
“하하하! 아직 잠이 덜 깨셨나 봅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곧 세숫물 올리겠습니다.”
하인이 휭하니 사라졌다.
일부러 어떤 사실을 숨기려는 것 같지는 않다. 하인은 정말 모르나 보다. 하지만 이곳에 여인이 있었다. 그를 발가벗겨서 목욕을 시켰다. 그 손길을 잊을 수 없다.
노인도 있었다. 노인의 붓질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나.
‘이 무슨 귀신 조화속이냐…….’
세수를 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밤이 될 때까지 정원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심심하면 안에 들어와서 차를 마셨다.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는다.
별원 밖은 시끌벅적한데, 별원은 낙엽 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다.
누강은 한적하게 시간을 보냈다.
헌데…… 정말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를 내버려두고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는다. 만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언질도 주지 않는다.
하녀들이 저녁 밥상을 내왔다.
그때는 누강도 참지 못했다. 언제까지 막연하게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언제쯤 온다고 했습니까?”
하녀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누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투다.
‘이 사람들도 모르나?’
그럼 누구에게 물을까? 천상 객잔 주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누강은 차려진 저녁상에 손도 대지 않고 별원을 나섰다.
‘하인 말대로라면 이 길 따라서 쭉 걸으면 된다고 했지?’
만복객잔과 별원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큰길을 상당히 걸어가야 한다.
대체로 별원에 드는 손님은 가마로 모신다.
누강도 가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무인이…… 두 발 멀쩡한 건장한 사내가 가마에 몸을 뉜다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그는 그냥 큰길을 따라 걸었다.
‘응?’
누강이 멈칫 서서 주위를 돌아봤다.
큰길이 사라졌다.
그가 걸어온 길은 있다. 다만 그 길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대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은 만복객잔이 아니다.
만복객잔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버려졌다. 아니, 자신 스스로 걸어서 왔다.
하인은 잘못 가르쳐 주었다. 일부러 잘못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별원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길을 알려주었다. 일단 나갔으니 돌아오지 말라는 거다.
“뭐 이런!”
누강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늙은이와 여인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만복객잔 주인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모른다고 할 것이다. 저 대문을 부수고 별원에 뛰어들면 어떨까? 이미 저녁상은 치워졌을 것이고, 하인과 하녀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을 게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 만난다.
“훗! 정신 잃은 동안 내다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군. 쓰레기통에 처박아 놨으면 어쩔 뻔했나. 후후!”
누강은 실소를 흘렸다.
* * *
검왕이 움직이지 않는다.
검왕은 죽었다. 만에 하나 죽지 않았다고 해도 손 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검왕은 기파(氣波)에 당했다.
심맥(心脈)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경맥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서 피부까지 불퉁불퉁 돌출되어 있다. 마치 굵은 지렁이를 몸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
상처치료는 물론이고 진기를 불어넣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거머리 좀 잡아다 주세요.”
유화아는 혈맥이 부풀어 올랐을 때 사용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경맥과 혈맥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이치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음악삼귀가 유화아의 의중을 이해하고 즉시 뛰쳐갔다.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중원 무림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죽어요. 정사대전을 만든 사람이 누군데.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도 몰라요? 일어나서 그 일부터 해결해요.”
유화아가 처연히 중얼거렸다.
언제부터인가 가슴 속에서 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는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이것밖에 못하냐고 화를 낸다. 또 잘했다고 칭찬도 한다. 어떤 때는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속삭이기도 한다.
검왕과 함께 있는 삶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검왕에게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직도 검왕 마음속에는 그 여인뿐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렇기에 절대로 자신에게는 다정한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다고?
항상 검왕이 좋아할 일만 해왔다. 검왕을 쳐다보면서 살아왔다. 혼자만 간직한 생각이지만.
지금 검왕은 곁에 있다.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한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인데 얼굴조차 쓰다듬지 못한다. 그런 행위가 혹여 기맥을 손상시킬까 봐.
“정말 죽은 건 아니죠? 죽으면 안 돼요. 절대로.”
유화아는 처연하게 읊조렸다.
음악삼귀가 거머리를 잔뜩 잡아왔다.
헌데 이 거머리…… 검왕 몸 위에 올려놓자마자 미친 듯이 꿈틀거린다.
“이것들, 왜 이래?”
“불에 덴 듯하잖아?”
거머리들이 뱀처럼 꽈리를 튼다. 몸을 비비 꼬다 못해서 둥글게 휘만다.
무척 고통스러워한다.
잠시 후, 거머리들이 축축 늘어지지 시작했다.
죽었다. 축 늘어진 거머리들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허! 이게 무슨 일이야?”
“기파에 당하는 것 같은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놈들에게는 치명적인가 봐.”
“더 올려요.”
“뭐? 이게 효과가 있나?”
“거머리가 죽는다는 것은 기파가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죽은 사람은 절대로 기를 발산하지 못해요.”
“그건 그렇지! 아!”
음악삼귀가 퍼뜩 이해했다.
검왕은 살아있다. 그러니 몸에서 기를 발산하는 것이다. 검왕의 기운이 아니라 누미의 기운이겠지만…… 그것조차도 죽은 자는 발산하지 못한다.
거머리를 올려놓아서 기를 빼내야 한다.
효과가 있다. 거머리가 사기를 흡수하지는 못하지만 밖으로 빼내는 유도제 역할은 한다.
음악삼귀는 거머리를 잔뜩 올려놓았다.
부글부글부글!
거머리들이 마구 요동쳤다.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졌을 때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꿈틀거린다.
“이거 보고 있어. 난 이놈들 더 잡아와야겠어. 이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어.”
“나도 잡아오지.”
“같이 가세요. 제가 보고 있을게요.”
유화아가 거머리들을 집어서 검왕 몸 위에 올려놨다.
거머리가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거머리도 생명체라는 생각 또한 들지 않는다. 지금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거머리는 검왕을 살리는 도구일 뿐이다.
검왕 곁에 죽은 거머리들이 수북이 쌓였다.
적어도 수백, 수천 마리는 죽어 나간 것 같다. 음악삼귀가 그야말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나중에는 거머리를 구할 수 없어서 지렁이를 구해왔다.
어차피 기파를 끌어내는 역할이라면 거머리나 지렁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도 옳았다.
지렁이도 검왕 몸에 올려지자마자 마구 꿈틀거렸다.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불에 덴 듯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어김없이 축 늘어졌다.
유화아는 검왕 단전에 손을 올려놓았다.
츠으읏!
진기를 슬그머니 밀어 넣어 봤다. 순간,
탕!
그녀만 느낄 수 있는 힘이 퉁겨져 온다. 밀려오는 진기에 어김없이 반응한다.
‘확실히 살았어!’
유화아는 환하게 웃었다.
“아! 살았네. 다행이다.”
“그럼 그렇지. 난 처음부터 산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괜히 걱정했네.”
음악삼귀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유화아가 웃었다. 그 표정만 봐도 검왕 상태를 알 수 있다. 유화아가 얼마나 크게 웃느냐에 따라서 검왕 상태가 여실히 밝혀진다.
음악삼귀는 패륜아였다.
그들은 여색을 좋아하고, 강도, 도둑질을 주업으로 삼아왔다. 필요하다면 사람도 죽였다. 음악오귀…… 음악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지금은 떼어내고 싶은 말이지 않은가.
그런 그들인 만큼 여인 마음을 잘 이해한다.
그들은 유화아가 검왕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힘들 것이다. 검왕 같은 사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검왕에게는 공인된 연인이 있다. 비록 검왕에게 검을 꽂았을망정…… 그래도 검왕이 잊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그 끈이 얼마나 질기겠나.
검왕을 사랑하는 것은 상처만 남길 것이다.
음악삼귀는 이런 경우까지 모두 짐작한다.
이루어지지 않을 연모다. 혼자만 간직했다가 혼자서 정리해야 할 연모다.
그럼에도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검왕을 만나서 아옹다옹할 시간도 없었다. 무공을 수련하기에 급급했고,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바빴다. 매 순간이 죽음의 연속이다.
그런 상황에서 연모 좀 하면 어떤가.
그런 연모가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유화아가 활짝 웃는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유화아가 말했다.
“기파는 사라진 것 같아요. 이제는 충격에서 벗어나는 일만 남았는데……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죠?”
“하하하! 검왕이 누구야! 검왕이 이까짓 충격 따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 마.”
음악사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검왕은 심맥이 얼어붙었다. 외부에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쳐 올 때, 일부 기능이 심맥을 보호하기 위해 자위 수단을 펼쳤다. 심맥 보호를 위해서 심맥을 동결시켰다.
이것은 검왕 스스로 풀어야 한다.
검왕이 심맥을 풀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정신 잃은 사람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유화아는 검왕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일어나요. 그만 누워 있고 일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