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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八章 비월(飛越) (5)
누미와 검왕이 만났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두 사람은 많이 변했다. 검왕은 예전의 검왕이 아니고, 누미도 예전의 순수했던 누미가 아니다.
인사는 검왕이 먼저 했다.
“오랜만이구나.”
“당신이 누군데 반말이야?”
누미의 눈가에 애잔한 파랑이 일었다. 하지만 곧 야차보다도 차갑고 사나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 죽였다며?”
“서로 반대편에 서있으니까.”
“그럼 나도 죽여야겠네? 반대편에 서있으니까.”
“그럴 생각으로 왔다.”
“죽일 자신은 있고?”
“있다.”
“호호호! 검왕, 검왕, 검왕, 검왕. 우리 불쌍한 검왕.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똑같네?”
“……”
“끌고와라!”
누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사람이 포박당한 채 질질 끌려왔다.
검왕은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
누미가 ‘끌고와라!’하고 명령을 내릴 때, 누가 끌려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끌려오는 사람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했다.
두 손을 모아 읍을 한 채 풀지 않았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했다.
“됐다.”
누산이 말했다.
검왕은 그제야 포권지례를 풀고 끌려온 사람들을 쳐다봤다.
유화아가 그를 쳐다본다. 음악삼귀도 그를 본다. 그들 눈에는 반가움이 어려 있다.
누산도 웃는다. 하지만 말 속에는 가시가 담겨 있다.
“이놈! 여기서 뭣하고 있는 것인고?”
“혈루마옥을 멸하고자 합니다.”
“네가?”
“……”
“허허허! 허허허허!”
누산이 한참을 웃었다.
누산의 말속에는 ‘넌 어림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절대로 혈루마옥을 멸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촌장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해한다.
촌장과 일전을 벌인 경험이 있다. 그와 싸운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실제로 그러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촌장이 손을 쓰지 않은 것일 뿐.
그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다.
촌장의 무공을 봤으니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는 안다. 생각한 대로 싸울 수만 있다면 촌장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혈루마옥은 멸해진다.
허면 굳이 중원을 파괴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이 싸움을 종식시키면 그만이다.
중원을 파괴하려고 했던 데는 혈루마옥을 멸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어차피 그들 손에 들어갈 중원이라면 온전히 내주지 않겠다!
그런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혈루마옥을 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검왕이 다시 포권했다.
“먼저 가십시오. 저도 곧 뒤따르겠습니다.”
“허허허!”
스릉!
검왕은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검을 뽑았다.
누미가 이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웠지만 가차없이 벨 생각이다. 누미가 베지 않고, 자신이 베어야 한다면 벨 것이다. 누산과 유화아, 음악삼귀 모두를.
“쯧! 네가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누산이 웃었다.
순간, 검왕은 누산이 낯설게 느껴졌다.
누산은 누산인데, 그가 알지 못하는 누산 같았다.
“이놈아, 이 아이…… 요미검체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요미검체가 단순히 혈오를 낳을 수 있는 몸뚱이만 말하는 것이더냐! 요미검체라는 말 속에 ‘검(劍)’이라는 말이 괜히 들어간 줄 아느냐!”
“……”
“쯧! 어쨌든 시작한 일이니 끝을 잘 맺어라. 네가 생각한 대로 맺어지기를 바란다.”
누산이 웃었다.
그때, 녹천 무인들이 누미 앞에 나서며 말했다.
“우리 싸움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싸움 같은 건 없어.”
“있습니다. 녹천주가 우리 싸움을 했습니다. 저희도 우리 싸움을 하렵니다.”
“검왕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해?”
“파해법을 찾았습니다.”
“파해법을 찾았다? 호호호! 궁금해지네? 그래, 알았어. 그 우리 싸움인가 뭔가 하는 거, 해봐. 잘 구경할게.”
“감사합니다.”
녹천 무인이 뒤돌아섰다.
가슴이 묵직해진다.
누산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누산과 촌장은 장기판의 기물이 아니다. 그들은 장기를 두는 당사자다. 장기판의 기물은 검왕이며, 누미이며, 죽은 화천이 될 것이다.
‘나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나.’
검왕은 검을 들어 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누산은 적벽검문을 멸망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문주께는 긴 설명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문주는 누산의 말을 받아들였다. 기꺼이 녹천의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그때부터 누산은 이쪽 기물들을 움직이는 자가 되었다.
저쪽 기물은 촌장이 움직인다. 누미를 움직이고, 혈오를 움직인다. 녹천과 증평을 움직인다.
녹천이 여기에 있는 것, 누미와 함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촌장이 주도한 것이다.
잘못 온 것인가.
예정대로 무당파를 멸하고, 중원 정사대전을 벌였어야 하는 것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화천과 싸우면서 퍼뜩 정신이 들었는데…… 혈오 아니면 촌장에게 조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림사 무당파를 멸하고 정사대전을 벌이도록…… 차도살인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일단 녹천을 멸한다. 누미를 죽인다. 그 과정에서 누산과 유화아, 음악삼귀가 죽겠지만 감수한다. 그런 후 눈앞에 닥쳐오는 일들을 하나씩 처리할 게다.
딱 하나, 촌장을 죽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생각해둔 싸움을 할 것이다. 그리고 촌장을 죽일 것이다. 그러면 끝나지 않겠나. 더 이상 혈루마옥이 무림에 해를 끼칠 일은 없지 않겠나.
지금까지 적벽검문의 모든 힘은 혈루마옥을 저지하는데 집중되어 왔다.
그 일을 완수한다.
쒜에엑! 쒜에에엑!
왼쪽과 오른쪽, 양쪽에서 섬광이 터진다.
섬광은 두 개가 아니다. 두 개 뒤에 또 두 개, 그 뒤에 또 두 개…… 두 개씩 줄줄이 이어온다.
연환검식(連環劍式)이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공격해 온다.
??
검왕은 섬광을 정확하게 보고 쳤다.
섬광을 치지는 않았다. 섬광을 보고 섬광 아래를 쳐갔다. 섬광은 빗겨내고 몸통을 쳤다.
퍽퍽!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검이 날카롭게 들어가지 못하고 다소 두텁게 베어진다.
옷 안에 갑옷을 받쳐 입었다.
검왕은 생각할 틈이 없다. 저들은 연속적으로 쳐온다. 섬광 한 개가 지나가면 또 다른 한 개가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친다. 허니 그도 즉각 대응해야 한다.
? 퍽! ? 퍽!
검이 지갑(紙匣)에 막혀서 쉽게 빠지지 않는다.
지갑에 철사(鐵絲)를 심었다. 그래서 검이 잘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베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검초를 느려지게 하는 효과는 있다.
스각!
섬광 하나가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들의 연환검은 정말 빠르다.
개개인의 무공이 일파 장문인 수준이기 때문에 감히 방심할 수 없는데, 그런 자들이 연환검으로 목숨을 도외시한 채 공격해오고 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검왕을 막을 수는 없다. 검왕은 연환검 정도에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는다.
지갑에 섞여있는 철사가 문제다. 검이 몸을 베기는 하는데 잘 빼지지 않는다.
그 사이 섬광이 그를 두들긴다.
퍽! 쓰읏! 퍼억!
검왕은 지갑과 철사를 단번에 베어내고 검을 뺐다.
그 사이 그의 몸은 붉은 피가 집어삼켰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의를 흥건히 적신다.
철사까지 동원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죄, 잠깐의 방심이 부른 결과다.
“우리가 맞았군.”
녹천 무인들이 웃었다.
“검왕의 검을 촌각만 늦출 수 있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지금 우린 촌각을 늦췄고, 득을 봤소.”
“그 득이라는 거, 두 번은 얻지 못한다.”
녹천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당신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의 실수를 바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걸. 다만, 우리는 우리 파해법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소. 후후후! 이제 됐소.”
아직 되지 않았다.
저들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또 다른 수가 있다. 그의 검을 촌각 정도 멈출 수 있는…… 그런 후에 터지는 섬광은 치명적일 것이다.
“와라!”
스읏!
검왕이 검을 고쳐 잡았다. 검첨을 하단(下段), 땅으로 향한 채, 상반신을 비스듬히 돌려세웠다.
첫 검은 땅에서 하늘로 올려쳐질 것이다.
올려치고, 올려진 검을 곧바로 내려치고…… 인(人)으로 문(門)을 가르니 섬(閃)이다.
순간, 녹천 무인들의 눈가에 미미한 파랑이 일었다.
검왕의 몸에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난다. 환각초를 복용한 듯 검왕이 두 겹, 세 겹으로 보인다.
검왕이 진동을 일으킨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기가 흘러나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주변 공기를 흔들고 있다.
검왕이 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들이 입고 있는 지갑을 단숨에 베어낼 게다. 지갑 속에 철사를 심었어도 마찬가지다. 단숨에 갈라진다. 검왕이 펼쳐낼 섬(閃) 앞에 생명은 없다.
“쳇!”
“이렇게까지 강했나.”
“간다!”
맨 앞에 서있던 무인이 단호하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것이 신호다. 녹천 무인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섬과 섬, 강과 강의 대결이다.
쒜엑! ? 쒜에에엑!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오직 섬광만 터진다.
“저게 유기(有氣)라는 거지?”
“허! 여전히 말이 짧군. 목숨이 끝나가는 마당인데 존장에 대한 예우는 해줘야지?”
“나도 저기에 베일까?”
“후후후!”
누산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왜 대답하지 않아?”
“대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 저러다 내 종들 다 죽겠네.”
누미가 미간을 확 찡그렸다.
녹천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공격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순식간에 십여 명이 쓰러졌다.
그야말로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허공에 피보라가 일어났다.
타앗!
누미가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신형을 쏘아냈다.
“아!”
“웃! 저, 저……”
유화아는 입을 벌리며 탄성을 토해냈다. 음악삼귀는 깜짝 놀라서 포박당한 것도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누미의 신형…… 공격…… 전혀 예상 밖이다.
너무 빠르다!
누미가 이토록 강한 고수였나? 도대체가 이런 빠름이라니!
쒜에에엑! 꽈앙!
누미가 쳐낸 검과 검왕의 검이 벼락같이 충돌했다.
누미는 어느 새 검을 뽑았다. 신형을 띄우는 순간, 검이 발출되었다. 마치 검이 살아서 스스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누미는 순식간에 녹천 무인들을 제쳐버렸다.
녹천 무인들은 연환검식을 펼치는 중이었다.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전신 진기를 팽팽하게 끌어올린 채 앞만 보고 치달리고 있었다. 헌데 누미가 그들을 양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검왕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큭!”
검왕이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한 발 물러섰다.
누미도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신형을 띄운 것이니…… 그러고도 평수를 유지한 것이니.
누미가 말했다.
“아까 저 사람이 말했잖아. 내가 요미검체인 것을 잊은 것 아니냐고. 친절하게 말로 설명까지 해줬는데도 잊고 있는 거야? 섭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