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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189화 (18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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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八章 비월(飛越) (4)

유화아와 음악삼귀는 무공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반항을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누산이 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결박을 순순히 받았다.

“갑자기 우리를 왜 끌고 가는 걸까요?”

“검왕이 순서를 바꾼 모양이야.”

“순서를요?”

“무림부터 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뀐 거지.”

“그럼 혈루마옥부터 치는 건가요?”

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끌려가는 것은……?”

“그것도 짐작하지 못하겠냐? 인간방패지 뭐겠어! 허허허!”

“인간방패요? 그럼 이렇게 끌려가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끌려가면 검왕에게 짐이 돼요.”

“후후후! 그러면 왜 안 되는데?”

“네?”

“그놈 힘이 워낙 좋아서 웬만한 짐쯤은 거뜬히 지어 나를 거네. 걱정 말게.”

유화아는 누산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산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는 것쯤은 읽는다.

누산은 누미에게 전 재산을 공개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까짓 재산 또 벌면 되지 하면서 껄껄 웃기까지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억만금보다 눈앞에 있는 차 한 잔이 더 소중하다는 말도 했다.

재산에 대해서는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누미에게 끌려가면서는 미간을 찌푸린다. 얼굴에 어둠이 깃든다.

뭔가 단단히 틀어진 것이다.

그들을 결박하는 자가 말했다.

“결박이 끝나면 허리에 족쇄를 채울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 뜻이 아닌데, 신발을 모두 벗기겠다. 너희 모두 맨발로 끌고 오라는 분부시다.”

누산이 끌려왔다.

굵은 밧줄로 전신을 결박하고, 두 다리에는 족쇄가 채워진 채 험한 산길을 맨발로 걸어왔다.

유화아와 음악삼귀도 같은 입장이다.

그들 모두 발에 피멍이 들었다.

유화아와 음악삼귀는 병기도 소지하지 못했다.

유화아의 병기는 검이다. 허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삼귀의 병기는 십자연환창이며, 사귀와 오귀는 활을 사용한다. 그들도 병기를 잃었다.

전신을 결박당해서 끌려오는 자들이 병기까지 챙길 수 있겠나.

누미는 끌려온 자들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바깥 뙤약볕 밑에 세워두었다.

“거 먼 길을 왔는데 물이라도 주는 게 인사 아닌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누미가 즉시 말했다.

“당신, 사기 치는 솜씨가 대단해.”

“허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됐고. 이제 당신이 필요 없어졌어.”

“그런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가차 없이 죽여. 허락 같은 거 받을 필요 없으니까 즉각 죽여도 좋아. 다섯 모두.”

“알겠습니다!”

“허허허!”

복명하는 소리와 누산의 웃음소리가 같이 울렸다.

누산이 뒤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네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구나. 죽음을 피하기 어렵겠어. 허허허!”

누미에게 한 말이었다.

녹천 무인들은 옷 속에 지갑(紙匣)을 받쳐 입었다.

검왕의 검은 몹시 날카롭다. 지갑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검날이 아니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받쳐 입는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 입는다.

살기 위해서 지갑을 입는 게 아니라 버티기 위해서 입는다.

그들은 파해법을 찾아냈다.

일대일의 승부에서는 행할 수 없는 파해법이지만 다수로 밀어붙일 때는 충분히 가능한 파해법이다.

검왕은 수십 명을 죽일 게다.

어쩌면 오늘 녹천이 뿌리째 뽑혀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검왕도 죽는다.

그들은 누산 일행이 끌려온 것을 봤다.

누미가 그들을 인간방패로 활용할 생각인 것도 안다. 하지만 대의(大義)라는 이름 앞에서 적벽검문 멸문까지 눈감아 버린 검왕이 저들 죽음 정도로 발길을 멈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검왕은 저들의 죽음을 짓밟아버릴 것이다.

결국 검왕을 죽일 수 있는 승부수는 그들에게 달렸다. 철저하게 무공으로 이기는 수밖에 없다.

“좌우(左右)! 이두백사진(二頭白蛇陣)으로 간다. 이의 있으면 지금 말해.”

이의가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검왕으로 하여금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움직이게 만들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택한 진형이다.

“됐나?”

“됐다. 잘들 가라.”

그들은 마지막 인사까지 나눴다.

무인 두 명이 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을 지켰다.

검왕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검왕이 찾아오면 안쪽으로 길 안내를 하기 위해서다.

비겁하게 암수를 쓰지는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긴다. 비록 다수의 힘을 빌려야만 싸우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싸워서 이긴다. 몰래 습격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올 때가 됐지?”

“정오쯤 올 거야.”

그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검왕이 오면 오는 것이다. 안으로 안내한 후에는 이두백사진의 일원이 되어서 죽음을 맞이한다. 검왕이 스스로 허점을 드러낼 때까지 공격한다.

세상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들은 맑은 눈으로 산을 쳐다봤다. 그때,

스읏!

수풀을 헤치고 눈에 익은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웃! 천주!”

두 사람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자에게 급히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너희는 돌아가라. 검왕은 내가 맞이한다.”

“그러시겠습니까?”

“이두백사진을 준비하던데?”

“최종 선택이었습니다.”

녹천주 화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최선의 선택…… 맞다. 검왕을 상대하는 데는 가장 좋은 진형이지. 잘 해봐라.”

“천주께서도 함께하시죠.”

“나야 검왕에게 볼 일이 있으니까.”

두 사람은 화천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원 없이 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포권을 취한 후,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화천은 그들이 머물렀던 바위에 걸터앉았다.

검왕은 이길 수 없다. 밤새도록 찾아내고 들춰낸 바에 의하면…… 검왕의 무공은 자신보다 두어 수나 앞서 있다. 하지만 촌장보다는 확실히 아래다.

검왕은 촌장에게 죽는다.

또 한 가지…… 아주 놀라운 사실을 파악했다.

촌장의 무공은 증평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혈오를 살피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겉보기에 촌장 무공은 증평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니까.

기운, 기운이 같다는 말이다.

초식은 분명히 다르다. 무공 자체도 다르다. 하지만 촌장이 지닌 기운은 증평에서 끌어온 것이다.

사내가 양공을 수련할 수 있나?

일반 세상에서라면 물을 것도 없는 말이지만, 혈루마옥에서라면 말이 달라진다. 사내가 양공을 수련한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었다!

촌장의 기운을 읽어보면 그런 뜻이 된다.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밤을 꼬박 밝히면서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촌장이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었다면 혈오를 이용해서 저주를 푼 것은 또 무엇인가. 만약 저주를 풀지 못했다면 어떻게 증평의 양공을 수련할 수 있었나.

그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흘렀다. 검왕이 올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왔다. 적어도 수하들보다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래야 녹천주의 면이 서니까.

또 한 가지 의문…… 증평은 어디로 사라졌나?

지금 상황을 보면 혈루마옥에는 녹천만 있는 것 같다. 여인은 말끔히 사라지고 사내만 남았다.

뭔가 그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일도 그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검왕과 곧 맞닥트려야 할 몸이니.

해가 중천에 떴다.

한 사람이 걸어온다. 어김없이 걸어온다.

스릉!

화천은 검을 뽑았다.

검왕을 상대할 수는 없지만…… 혈오를 통해서 전신의 기운을 한층 맑게 정화시켰다.

지금 그는 매우 상쾌하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맑은 아침 공기를 마실 때처럼 개운하다.

스으으으읏!

진기를 이끌어 전신에 유포시켜본다.

진기의 흐름이 손에 잡히는 듯 선명하다. 막힘없이 콸콸콸 흘러가는 진기가 눈에 그려진다.

의념(意念)도 매우 정순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여인이 스쳐 지나갔다.

수월화!

그녀는 매우 맑은 여인이었다. 깨끗하고 청초한 여자였다. 서로 무공을 달리하지만, 그래서 앙숙일 때도 있지만…… 그녀의 맑고 고운 피부가 손에 잡힐 듯 생각난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독녀가 되었다.

화천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있으면 다리뼈를 분질러 놓았다. 때로는 팔일 때도 있었고.

독점욕, 아집이 심했다고 할까?

중원 무림을 나돌 때 은류가 매우 불안해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곁에 여인이 있는 것을 그녀가 아는 날에는 다리뼈가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는 누미를 본 후, 싹 변했다.

화천을 본 척도 하지 않는다.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누미와 이미 부부지연을 맺은 그가 그녀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아니, 헤어졌다기보다는 서로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생각난다.

갸름한 얼굴, 사랑스런 눈매, 매혹적인 입술…… 참 좋았다.

이상하게도 누미는 생각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까지 낳아준 여인인데, 그리고 한때는 정말로 좋아하기도 했던 여인인데…… 맑고 깨끗했던 여인인데…….

마공관에서 만난 그녀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죽을 작정인가?”

차분한 일갈이 그를 상념에서 꺼집어냈다.

“죽어야지.”

검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좋겠군.”

스릉!

검왕이 검을 뽑았다.

쒜엑! 쒜에엑!

검과 검이 서로 빗겨간다.

검 하나는 완전히 허공을 쓸었고, 또 다른 일검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쭉 뻗어나갔다.

“큭!”

화천은 짧은 신음을 쏟아냈다.

이번 검왕의 일격은 사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단 일 검에 요혈 다섯 군데를 일시에 베어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힌다.

“한 가지만…… 그때, 내가 이긴 것 맞았나?”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말 죽었었나?”

“혈천성주가 살려냈다. 마도의 귀술(鬼術)로.”

“그때 완전히 죽였어야 하는데…….”

“그래도 넌 죽었을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다. 너는.”

“한 가지만 더…… 어떻게 이리 강해질 수 있는…….”

화천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질문을 던지면서 눈을 감았다. 꼭 대답을 듣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검왕은 화천의 눈을 쓸어내렸다.

그는 혈루마옥을 지워버릴 심산이다. 결국은 촌장과 다시 싸워야 하고, 그를 이길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혈루마옥을 모두 쓸어낼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차없이 살수를 전개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녹천 무인들을 비롯해서 누미와 혈오까지 모두 죽는다.

이것은 명백하게 적벽검문의 생각과는 반대된다.

적벽검문은 촌장을 제거하는데 중점을 뒀다. 촌장을 제거해야만 혈루마옥이 제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모든 희생을 감수했던 것이다.

검왕도 적벽검문 생각에 동조한다.

허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대로 가는 것은 촌장 계획대로 끌려가는 것이기에…… 일단 비틀어본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어떤 결과에 이를지는 모르지만.

검왕 앞에 무인 두 명이 나섰다.

“훌륭한 검이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가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화천도 그런 사실쯤은 알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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