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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八章 비월(飛越) (1)
툭! 투툭! 툭!
나뭇잎을 두들긴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로 떨어진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차가운 빗방울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
흙냄새에 취하고 빗방울 소리에 취하고 물소리에 취한다. 이런 것이 좋다.
혈루마옥은 왜 이런 것을 버리고 뛰쳐나왔을까. 계곡 밖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데…… 영구히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도 되는데…… 그들은 왜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평안을 버리고 분란을 택했을까.
투툭! 투투툭!
빗방울이 점점 거세진다.
그래도 좋다. 그냥 이곳에서 술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
누미, 혈루마옥, 혈오…… 그대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설혹 있다고 한들 누가 그대들을 심판하겠는가. 그대들을 죽이러 가는 이 몸 역시 평안을 버리고 분란을 선택한 몸이거늘.
용서해다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걷는다. 비를 맞으면서 걷는다. 빗방울이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걷는다.
쉿! 쉿!
바람이 흔들린다. 빗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가 비와 대화를 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물러설 수는 없겠나.”
어디선가 바람이 말을 한다.
“돌아갈 수는 없겠소?”
“그렇군. 서로 자기 입장에서 싸우는 것이군.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물러설 수는 없겠나?”
“하하! 그만, 그만.”
바람이 웃었다.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다.
죽이러 가는 자와 지키는 자의 싸움이다. 누가 물러서겠나. 누가 길을 열어주겠나.
“혈루마옥이 그렇게 답답하던가?”
“답답하기로 따지면 옥사(獄舍)에 일각만 갇혀 있어도 답답한 법이오. 하물며 한평생이오.”
“저주를 벗었으면 그냥 살면 될 것을.”
“그러기에는 몸에 익힌 게 너무 강합디다.”
“그렇군.”
스릉!
검왕은 검을 뽑았다.
여기 또 다른 죽음들이 있다. 누미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이 열린다. 이들, 혈루마옥 녹천 고수들은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어떤 마음으로 무공을 수련했을까?
이들은 이름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죽어갈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언제 어디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고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자신이 해줄 일이 있다. 최선을 다해서 검을 쓰는 것이다. 촌장을 대하듯이 진심으로 싸워주는 거다.
휘루루룽!
혈영마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혈영마공은 혈영신마의 무공이다. 무림 최강 마공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런 마공으로도 혈루마옥 무공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과거의 혈영신마가 살아나온다고 하면……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십마는 자신들의 무공과 마공관의 마학이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자신들이 혈영신마를 만났다면 대등하거나 그보다 한 수 위일 것이라고 자부한다.
마공관의 마학이라고 해도 절대 무공은 아니다.
그렇다. 혈영마공은 혈루마옥 무공보다 한 수 아래다.
그런 구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공관의 마학을 십분 수련한 그가 화천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실전에서 쌍방 간의 무공이 비교되었다.
허면 그는 왜 아직도 혈영마공을 주무공으로 사용하는가. 그가 사용하는 혈영마공에 혈루마옥 무인들이 펑펑 나가떨어지는 것은 어찌 된 연유인가.
검왕은 혈영마공에 적벽검문의 무공을 가미시켰다.
신공과 마공의 조화!
이런 일은 무림 역사상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획기적인 무공 창안이다. 분명하게 말하면 혈영마공에서 마성을 제외시키고, 신공을 가미시킨 새로운 무공이다.
그가 마공관 동굴에서 폐관수련을 한 이유가 이것이다.
혈영마공의 신위를 유지시키면서 정신은 명료하게 유지시킨다. 혈영마공을 운용하는 것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욱더 마음을 맑게 해준다.
지금까지 무림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다.
혈영마공을 펼친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혈영마공이 아니다. 검왕만의 신공이다. 적벽검문의 무공도 아니다. 신공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무리만 차용했을 뿐이다. 온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검왕이 창조한 무공이다.
휘르르르릉!
혈영마공의 붉은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다.
빗방울이 퉁겨나간다. 검신에 닿은 빛방울이 아롱지며 흩어진다. 검광에 비가 갈라진다.
스릉! 스릉!
저들도 검을 뽑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집니까?”
저들 중에 누군가가 불쑥 물어왔다.
“뭐라고?”
검왕은 저들의 물음을 언뜻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집니까? 이게 저들이 물어본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런 물음은 친구끼리나 가능한 말이다. 적에게 물어볼 말이 아니다.
“당신은 분명히 우리보다 하수였는데, 어느 날 보니 위에 서 있군요. 그렇게 강해진 연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이 되물어왔다.
이것은 진심이다. 저들은 적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묻는 것이다.
검왕은 무슨 말을 해줄까 일시 고민했다.
그러나 저들에게 해줄 말이 없다. 혈영마공에 적벽검문의 무공을 조화시킨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평범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검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걸로 보여주마.”
그가 검을 들어 보였다.
“역시 그 방법이 제일 좋겠군요. 저희도 그 방법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읏! 스읏!
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했던 대로 혈루마옥 녹천 무인이다. 모두 다섯 명이고, 병기는 검이다.
저들 개개인은 십마를 능가한다.
십마를 능가하는 고수 다섯 명이 그를 에워싸고 합공을 취하려고 한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부터 질릴 일…… 하지만 그는 태연히 쳐다본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우리를 벤 후, 이틀만 여유를 주십시오.”
“말이 이상하군. 베일 것을 알면서 싸우겠다는 것인가.”
무인은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진다. 어쩌면 내가 이길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래야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물론 저희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베이는 것도 기정사실, 죽는 것은 저희일 것이고…… 그래서 미리 부탁드립니다. 우릴 벤 후, 이틀만 걸음을 멈춰주십시오.”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십사 부탁하는 겁니다.”
검왕은 저들의 말뜻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강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 그것도 단 이틀만? 이틀만 주면 강해질 수 있나?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스읏! 슷!
다섯 명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쒜엣! ?
두 명이 검을 쳐온다. 일체의 변화를 죽이고, 힘도 죽인다. 오직 쾌로만 승부한다. 쾌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검에 집중시키는 힘도 제거한다.
검은 그 자체로 살상병기다.
검에 살이 닿으면 갈라진다. 베어진다. 살상은 검에 맡기고 오로지 가장 빨리 닿게만 하겠다는 거다.
착!
검왕은 검격(劍格)에서 소리가 울릴 정도로 검을 고쳐잡았다. 아니, 벌써 검을 쳐간다.
쾌검 대 쾌검이다.
검을 맞받지 않는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오로지 누가 빠른가에만 승부를 건다.
쒜엑! 퍽! 퍼억!
검풍은 하나, 파육음은 두 번 울렸다.
“크윽!”
“컥!”
저들이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검왕도 눈빛을 반짝 빛냈다.
일격이 맞은 후, 저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저들 중 한 명은 배가 갈렸다. 또 한 명은 가슴이 베어졌다. 아주 깊이 베였다.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치명상이 사인(死因)으로 변할 게다.
헌데 저들…… 그만한 상처를 입고도 풀썩 꼬꾸라지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최대한 느리게 몸을 눕힌다. 천천히, 천천히 땅에 눕는다.
저들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일격에 즉사할 만한 상처를 입었지만 억지로 숨을 붙이고 있다. 몸을 최대한 느리게 눕히려고 발악을 한 것이다. 그리고 움직일 생각을 포기했다.
이대로 죽어가려 한다.
“음!”
검왕은 침음했다.
이제야 저들의 의도를 알겠다. 이틀이면 강해질 수 있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저들은 동료들에게 검왕의 수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상처를 전해준다. 검이 어떻게 살을 파고들었는지, 어느 깊이로 베어 나갔는지, 검의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힘은 어떤지…….
저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녹천 무인들 정도 되면 시신에 새겨진 상처만 보고도 상대방의 무공을 읽을 수 있다.
저들 모두가 검왕의 무공을 상세히 탐구하게 될 것이다.
검왕이 말했다.
“이런 죽음, 가치가 있는가?”
두 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절명했다.
뒤에 남아있던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 죽음이 개죽음만 아니면 좋은 겁니다. 여기서 죽는 것, 절대 개죽음이 아니라고 자신합니다.”
“그런 말은 듣기 싫고.”
“그럼 듣기 좋은 소리를 해드리겠습니다. 검왕, 당신 같은 고수를 만났으니 행운입니다.”
“후후! 그 말은 듣기 좋군.”
검왕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이미 죽은 두 명에게 그랬듯이 이들에게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가장 빠른 죽음을 안겨줄 것이다. 가장 강한 무공으로 승부를 결할 참이다.
스릉! 스읏! 쉣!
저들도 검을 뽑았다. 그리고 즉시 신형을 허공에 띄웠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오직 검으로 승부한다. 강자존(强者存)의 세계다. 약한 자는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약자는 오늘 태어나 오늘 죽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한 명은 땅에 달라붙듯이 납작 엎드려서 미끄러지듯 달려온다. 한 명은 옆으로 돌아서 허리를 베어온다. 또 한 명은 허공에 신형을 띄웠다.
땅에서 흘러오는 자는 환(幻), 검을 속인다.
허리를 베어오는 자는 변(變), 일검이 수십 가닥으로 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검초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 불허다. 검 끝을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허공에 신형을 띄운 자는 무조건 강(强)이다. 패력(覇力)으로 막아서는 것은 모두 갈라버린다.
화르륵!
검왕이 들고 있는 검에서 빨간 불꽃이 피어났다.
혈영마공의 정화가 검으로 옮겨붙었다. 검에서 환과 변과 강이 동시에 일어난다.
환을 보는 자의 눈에는 환이 보인다. 강을 쳐내는 자는 강만 보인다. 변화를 꿈꾸는 자는 변화가 보인다.
검왕의 검에는 모든 요체가 섞여 있다.
이것이 유기(有氣)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이 검 끝에 실린 결과다.
“허억! 헉!”
무릎을 꿇은 무인이 자신의 배를 쳐다본다.
다른 두 명은 이미 땅에 몸을 뉘었다. 먼저 두 무인이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천천히 누웠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훼손되지 않도록.
남은 한 무인은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상처를 살핀다.
“기가…… 막히군.”
그가 자신의 상처를 보면서 중얼거린다.
검왕은 그들을 일검에 베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지 못하게, 검을 맞자마자 활 맞은 꿩처럼 뚝 떨어지게 베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게끔 검을 썼다.
“고맙소.”
마지막 무인이 검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누가 자네들을 데려가야 할 텐데?”
“올 겁니다.”
“그럼 내가 피해줘야겠군.”
“부탁…… 드립니다.”
무인이 마지막 말을 한 후, 절명했다.
검왕의 검공을 고스란히 몸에 새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