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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七章 괴멸(壞滅) (5)
하룻밤 사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혈천성주가 일부 무인들만 대동한 채 백 리 밖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혈천성주가 머물던 움막은 여전히 경계가 삼엄하다. 혈천성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회회문사도 움막에서 떠나지 않고 들락거린다.
혈천성주가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 검왕이 앉았다.
일면, 혈천성주가 혈천성에 대한 전권을 검왕에게 위임한 것처럼 보여진다.
검왕은 움막에서…… 태연하게 운공을 취한다.
- 이십 일 동안 수련한다!
검왕이 말했다는 일갈이다.
검왕은 왜 싸움 직전에, 불붙은 심지가 화약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에 수련을 한다는 것일까?
누구나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무인의 깨우침이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잠에서 막 일어나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언제든 깨우침이 일어날 수 있다. 조건이 충분히 숙성되면 개화(開花)한다.
무인은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조건이 숙성하여 개화했을 때, 활짝 피어난 꽃을 즉시 따야 한다.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면 영원히 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무인은 늘 자신을 주시한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핀다.
검왕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 있다. 어떤 깨우침이 일어났고, 활짝 피어난 꽃을 영구히 간직하기 위해 수련한다. 피어난 꽃을 잘 보살핀다.
검왕은 수련을 한다고 했지만 마당에 나와 권각 수련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운공조식만 취한다.
확실히 꽃이 피어난 것이다.
꽃은…… 만개한 꽃은…… 하수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수들, 그것도 최절정 고수들에게만 일어난다.
조건이 푹 익어야만 꽃이 핀다.
검왕이 기거하는 움막으로 많은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무인이 깨우침을 얻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숙성이 될 수 있다. 잘하면 검왕의 기운이 옮겨올 수도 있다. 그러면 깨우침에 동참하는 기연도 일어난다.
물론 그들은 검왕이 기거하는 움막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검왕에게 방해가 된다면, 검왕에게 일어나는 일을 방해하면 그 즉시 목이 베일 것이다.
그래서 먼발치에서 쳐다본다.
검왕은 하루에 세 번 산책한다.
그때마다 마인들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검왕을 살핀다. 검왕이 내뿜는 기운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싸움을 이십여 일 미룬다?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검왕이 하늘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검왕은 하늘이 되기 이전에도 최상이었다. 소림방장과 소림이불을 일검에 날려버렸다.
이제 검왕이 깨우침을 얻고 나면 누가 검왕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 이십 일 동안 검왕 덕을 봐서 깨우침의 일부분이라도 전해 받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싸움은 중요하지 않다. 이십 일 동안 깨우침의 한 자락이라도 잡으면 일약 효웅(梟雄)으로 발돋움한다. 그게 훨씬 더 낫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
깨우침과는 인연이 없는 마인들도 이십여 일이라는 휴식 기간은 반긴다.
지금 상황에서 급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다. 무당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버린 정도 무인들이 급하다.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을 게다.
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십여 일 동안 술 마시고, 잠 자고, 기방 출입이나 하면서 푹 쉬면 된다.
검왕이 이십여 일 동안 수련에 매진하겠다고 선포한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회문사…… 과연!’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성주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백 리 밖으로 물러나라고 한 것은 이 싸움에서 손을 떼고 물러가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혈천성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
혈천성주는 큰 모험을 해야 한다. 검왕을 제치고 단독으로 싸움을 벌이든가, 아니면 마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놓든가…… 아무래도 후자는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혈천성주를 벨 생각이었다.
헌데 회회문사가 묘한 수를 생각해냈다.
지금 이 방법은 분명히 검왕에게 시간을 벌어준다. 그가 말한 이십 일 동안.
회회문사는 이십 일밖에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것이 바로 ‘이십 일 수련 선포’다. 이십 일 동안만 수련하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이십 일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만약 검왕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때는 검왕이 약속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마인들과의 약조라고 함부로 막 깨도 좋을까?
그것은 검왕에게도 큰 타격이다.
향후, 정도무림을 궤멸시키는 일은 오로지 그의 힘만으로 이루어야 한다. 마도의 협력을 받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혈천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향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마도와 잡은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회회문사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회회문사가 묘안을 짜내서 ‘이십 일 연공’을 만들어 냈으니 지켜 줄 생각이다.
그러면……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무림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안 된다.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게 조용히 다닌다.
변복(變服)도 했다.
검성 무인들은 변복을 자주 했다. 혈천성과 치열하게 싸울 때, 변복은 필수였다. 혈천성 영역 안으로 잠입해 들어갈 때, 탈출할 때…… 변복은 요긴했다.
그때도 그는 변복하지 않았다.
검왕의 상징인 검은 무복을 입고, 머리를 치렁하게 늘어트리고 당당하게 활보했다.
무복을 백색 무복으로 바꿔입었다.
영웅건(英雄巾)이라는 것도 해봤다. 영웅건을 쓰면 머리가 조이는 느낌이 들어서 싫은데…… 당분간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 필요가 있다.
이 정도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충돌을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준다.
스으읏! 스읏!
그는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밤이 이슥해졌다.
검왕은 나흘을 달려온 끝에 걸음을 멈췄다.
깊은 산, 깊은 계곡이다. 물소리, 산새 소리가 맑게 울린다. 진한 흙냄새가 맡아진다.
그는 일단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제 한 달음만 더 달려가면, 넉넉잡아 일다경(一茶頃)만 치달리면 그녀를 만나게 된다.
이제 그녀를 만날 때가 되었다.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그는 이런 일에 낯설다. 이런 일을 잘하지 못한다. 따뜻한 말, 위로…… 그런 종류의 말들……
그녀에게 적벽검문은 죄인이다.
적벽검문이 그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놨다.
마공관에서 본 그녀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세상 물정 모르고 절정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열정에 휩싸여서…… 적벽검문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고…….
누미,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자였다.
적벽검문은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인 의사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혈루마옥에게 던져주었다. 맹수에게 먹이를 주듯이.
이 죄를 무엇으로 씻어야 하나.
누미의 성품이 변할 것이라는 것……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까지도 예견했다.
누미는 혈루마옥의 저주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는 화천을 통해서 임신만 한 것이 아니다. 혈루마옥 저주의 일부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한 혈루마옥에 들어가서는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저주들이 그녀의 몸에서 온전히 녹아들었다.
혈오를 가진다는 것이 평범할 수는 없다.
적벽검문은 그녀가 요미검체이기에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 부분만 생각했다. 여자로서 그녀의 일생이 어떻게 바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생양이다.
정도를 위해서, 무림 평화를 위해서, 적벽검문을 위해서……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던져졌다.
적벽검문은 그녀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
헌데 자신은 왜 여기에 왔는가? 적벽검문을 대신해서 사죄하기 위해 왔는가?
아니다. 모순되게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녀의 가슴에 검을 박으련다. 그런 일을 하려고 먼 걸음을 했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누미…….’
검왕은 그녀를 떠올리며 용서를 빌었다.
누미 주변에는 혈루마옥 녹천 고수들이 운집해 있다.
그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 * *
“어떻게 하면 무공이 강해질 수 있을까?”
우문(愚問)이다.
무공이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척 많다. 또 그 모든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 강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가장 쉬운 대답은 수련이다.
불철주야, 수련하고 또 수련한다. 허면 반드시 강해진다.
가장 원칙적인 대답이다.
녹천 사내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 개개인이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을 만큼 강한 고수들인데…… 누미의 간단한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누구 말해볼 사람, 없어?”
그녀가 재촉했다.
그래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녀가 묻고 있는 것은 검왕이다.
검왕이 어떤 방법으로 수련했기에, 무엇을 먹었기에, 어떤 기연을 만났기에 그토록 강해졌나?
마공관 마학을 수련해서 강해졌다는 말은 틀린 답이다.
녹천 무인들은 마공관 마학을 우습게 여긴다. 그들이 수련한 무학 중에 마공관 마학보다 약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설사 마공관 마학의 주인들이 되살아나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검왕이 수련한 혈영마공만 해도 그렇다.
혈영마공은 마공관 마학 중에 하나다. 검왕이 수련한 많은 무공 중에 하나…… 그러나 검왕이 혈영마공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새 그가 수련한 최고 마학으로 자리매김했다.
혈영마공…… 약하다.
혈루마옥 무학은 혈영마공을 훨씬 능가한다.
아무리 생각을 깊게 해봐도 검왕이 그토록 강해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검왕이 화천을 이겼다.
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도 할 말이 없나 보네. 흠! 그럼 이건 심각한데. 우린 검왕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잖아. 아니다. 검왕이 오기 전에 도망가야겠구나. 아이구, 무서워라.”
“…….”
“당신도 할 말 없어?”
누미가 화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화천도 침묵했다.
현재 누미는 여왕벌이 되었다. 분명히 녹천주는 화천이지만 실질적으로 녹천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녀다.
여인이 녹천을 지배한다.
증평이 녹천을 지배한다고 생각해보면, 이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명확히 알게 된다.
녹천과 증평은 평생 싸워왔다.
한편으로는 협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싸웠다.
처음, 그들 싸움은 고의로 시작되었다. 서로가 발전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그들은 부부간이다. 자매간이다. 부모와 자식이다. 서로가 이기지 못해서 안달하지만,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극단적인 경우만은 항상 피해왔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와서 무너졌다.
증평과 녹천은 서로의 가슴에 검을 겨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더군다나 누미는 외인이다. 혈루마옥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여인이다.
그녀가 혈오를 낳고 혈루마옥의 저주를 끊어준 점은 인정하지만 녹천을 지배하는 것에는 반대다. 화천이 지배하는 것과 그녀가 지배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허나 녹천 무인들은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누미의 말이 백번 맞다. 그리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지원이 매우 절실하다.
녹천 무인 중에 한 명이 힘들게 말했다.
“천주, 말해도 됩니까?”
화천에게 한 말이다.
화천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만 벙긋거렸을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있나 보지?”
누미가 무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인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즉시 말했다.
“혈오를 내주시겠습니까? 혈오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혈오만 내주면 강해질 수 있어?”
“있습니다.”
무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화천은 여전히 침묵했다. 누미 앞에서, 녹천 무인들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