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180화 (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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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六章 탈몽(脫夢) (5)

검왕은 비락제(庇珞隄)에서 걸음을 멈췄다.

비락제는 가뭄을 대비한 인공 제방이다. 인근에 있는 논 백만여 평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검왕은 비락제에 올라서면서 제방 끝머리에 검을 푹 꽂았다. 그리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방 한가운데로…… 마차 한 대는 지나갈 수 있는 넓은 제방 한가운데로.

검왕이 검을 꽂은 행동은 일종의 경고처럼 비쳐졌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라.

검이 꽂힌 이곳부터는 금지구역이다. 발길을 멈춰라.

검왕이 진짜 경고를 하기 위해서 검을 꽂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땅에 꽂힌 검은 경고 이상의 효과를 불러왔다.

아무도 비락제에 올라서지 않는다.

검이 꽂힌 이쪽 제방에서부터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은 저쪽 제방까지.

검왕이 제방 한가운데에 앉아서 저수지를 쳐다본다. 뚝 떨어지는 해를 본다.

스읏!

아무도 발길을 들여놓지 않은 제방에 한 인물이 올라섰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검왕을 향해 걸어갔다. 티끌만큼도 경계를 하지 않고.

사내가 검왕 옆에 앉았다.

“꼭 이런 식으로 불러야 돼?”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왜? 막상 강호를 파멸시키려니까 마음에 걸려?”

파멸이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미가 파멸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아서 검왕이 손을 쓴다. 검왕이 파멸시키면 재기라도 할 수 있지만, 누미가 손을 대면 뿌리째 뽑혀나간다. 재기는 꿈도 꾸지 못한다.

검왕은 재기의 싹을 남겨놓기 위해서 미리 손을 쓰는 것이다.

검왕은 이 싸움을 망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무림을 파멸시켜서 잿더미로 만들어야 한다. 누미가 손을 쓰면 오직 어둠만 존재하기에.

이 부분에서 제일령과 검왕은 뜻을 같이했다.

혈루마옥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혈루마옥을 알아야 한다.

적벽검문을 하루아침에 씨를 말려버린 혈루마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적벽검문을 멸문시킨 힘은 혈루마옥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절반의 힘으로 무림 제일 신비문파를 씨도 안 남기고 쓰러트렸다.

이런 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검왕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십마마저도 이 일에 기꺼이 힘을 보태고 있지 않는가.

검왕이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도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니까…… 정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어야 하니까.

검왕이 처음부터 마인은 아닐진대, 마인 흉내를 내자니 괴로울 것이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마라. 더 크게, 더 강하게 일어서겠지. 무림이란 곳이 원래 잡초잖아. 밟으면 뭉개지고 찢겨질망정 뿌리는 남아있으니까.”

“촌장은?”

“촌장? 촌장 뭐?”

“촌장은 어디 있나?”

“그거야 네가 더 잘 알지. 서장으로 갔다며? 왜? 뒤를 붙여둘까?”

검왕이 비로소 제일령주를 쳐다봤다.

“왜 그래? 촌장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검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뭐가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데?”

“너와 촌장의 관계.”

“뭐? 나와 촌장? 하하하!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촌장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야.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관계라니? 왜? 누가 뭐라고 해?”

“친구라면…… 말해주기 바란다. 촌장과 어떤 관계인지.”

“갑자기 왜 이러는…….”

제일령주는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를 쳐다보는 검왕의 눈빛이 매우 침울하다. 매우 깊게 가라앉아있다.

“딱 한 번만…… 묻지. 촌장과는 어떤 관계냐?”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하면 믿겠나? 지금 네 표정을 보면 믿을 것 같지 않은데.”

“…….”

“아무 관계도 아니다.”

“그렇군.”

검왕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묘하군. 느닷없이 불러서 촌장과의 관계나 캐묻고…… 난 이게 농이 아니라 진담이라는데 화가 난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만 가라.”

“뭐?”

“그만 가라. 그리고…… 다음에는 내 눈에 띄지 마라. 친구라면 이 정도는 지켜줘야 예의다.”

“검왕!”

검왕이 제일령주를 쳐다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 싸움은 나도 말릴 수 없게 됐다. 결국 정도도 마도도 모두 무너지겠지. 그다음, 난 검성을 칠 생각이다. 그때, 네가 검성에 없기를 바란다.”

“후후! 현재 검성 성주는 나야.”

“그럼 넌 베어진다.”

“나를? 네가 나를?”

검왕은 제일령주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제방을 걸어갔다. 검을 꽂아놓은 곳으로.

검왕 앞에 청수한 중년인이 무릎 꿇려졌다.

그는 매우 질이 좋은 비단을 입고 있었고, 수염도 잘 다듬어서 매끈했다. 피부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손톱도 공들여 다듬었는지 눈에 띄게 매끈했다.

당금 무림에서 신비인 중에 한 명으로 거론되는 하오문주다.

“내 대접이 섭섭했습니까?”

검왕이 진중하게 물었다.

“섭섭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대접을 더 잘해주는 곳이 생겨서 말이네.”

“촌장입니까?”

“마공관의 마학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혈루마옥의 무공과는 비교가 안 되니까.”

“촌장이 혈루마옥 무공을 전수했습니까?”

“몇 가지 무공은 전수 받았네.”

“그래도 잡혀왔군요.”

“아직 수련이 부족하니까. 몇 달만 더 있었다면 저자는 날 잡지 못했을 거야.”

하오문주가 은형비잠을 쳐다보며 웃었다.

“촌장의 제안은 언제 받았습니까?”

“입 다물겠네.”

“여기서 하오문이 노린 건 뭡니까?”

“몰라서 묻는가?”

“…….”

“후후!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네. 어떤 유혹보다도 생존이 우선이네. 아주 간단한 문제야. 누가 살아남을까? 자네인가, 촌장인가. 그 대답을 촌장이라고 말한 것뿐이네.”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과 검성 제일령주는 참 많은 일을 도와주었다.

마인들이 운집할 수 있도록 회신(回信)을 돌리고, 방향을 일러주고, 음으로 양으로 편의를 살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운집할 때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

먹어야 하고, 자야 한다. 취해야 하고, 취한 몸과 마음을 제대로 해소해야 하는 유흥거리도 필요하다.

마인들이 운집하는 곳에 수많은 창기가 모여들었다.

술집도 생겼고, 가판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하오문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거다.

제일령주는 마인들 간의 날 선 공방을 조율했다.

마인들이라고 모두 같은 편은 아니다. 마인들 중에서 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정도와 마도처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부딪치면 필히 싸움이 벌어진다.

허나 정사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마인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매우 좋지 않다.

제일령주는 이들을 조율했다.

필요하다면 어느 한쪽을 제거함으로써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겉으로 보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헌데 그런 행동들 모두가 검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검왕을 지지해서 돕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정사대전을 벌이고 말겠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검왕은 너무 늦게 이들의 뜻을 눈치챘다.

지금에 와서는 싸움을 미루고 싶어도 미뤄지지 않는다. 검왕이 가세하든 말든 싸움은 벌어진다.

하오문주를 제거하면 어떨까?

상관없다. 원래 하오문은 잡초 조직이다. 그들은 문주가 있건 없건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돈을 봤다. 마인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은자들을 봤다. 또 피를 봤다. 조만간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많은 사람이 죽는다.

죽은 자들은 물건을 남긴다. 돈도 남기고, 행낭도 남기고, 병기도 남긴다. 그것들 모두가 돈이 된다. 하오문도는 결코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후후!”

검왕은 웃었다.

‘혹시’ 하면서도 아니기를 바랐는데…… 역시 촌장의 입김이 깊숙하게 묻어있다.

이 싸움은 촌장이 일으킨 싸움이다.

십마가 검왕 주위에 진을 쳤다.

비락제에서 검왕이 제일령주와 만날 때, 십마는 음성도 들리지 않는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왕은 일부러 비락제 같이 외따로 떨어진 곳, 아무도 듣는 귀가 없는 곳을 택해서 제일령주를 만났다.

물고기가 아니라면,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면 두 사람이 어떤 말을 나눴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꼭 대화를 들어서 아는 게 아니다.

십마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매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의 직감은 비형은잠이 하오문주를 잡아왔을 때, 극에 달했다.

‘뭐냐!’

‘이건 뭐지?’

입을 열어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이 소록소록 피어난다.

검왕은 하오문주와의 대화를 숨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십마 모두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바로 곁에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두 귀를 활짝 열어놓자 자연스럽게 말들이 흘러들었다.

촌장? 혈루마옥의 그 촌장?

하오문주가 ‘생존’ 운운할 때…… 비로소 심상치 않은 느낌을 확인했다.

촌장은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한다.

검왕은 이용해서 무림을 몰락시키고, 자연스럽게 제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

촌장은 패도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군왕이 되고 싶어한다.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자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세세손손 대를 이어주려고 한다.

향후의 무림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누미가 누산이라는 거상을 휘어잡을 때, 촌장은 하오문과 검성을 틀어잡았다.

결국 누산 역시 촌장에게 흡수될 것이다. 촌장의 뜻대로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정도 놈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평생 숙원이기는 한데, 남의 손에 놀아나기는 싫고.”

“꼭두각시가 되어서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럼 이 싸움에서 빠져? 어떻게?”

“으음!”

십마는 그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혈천성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싸움을 말릴 사람은 혈천성주밖에 없다. 혈천성만 이 싸움에서 빠진다면…… 정사대전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빠질까?

비형은잠이 말했다.

“혈천성주에게 기별을 넣을까?”

검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움은 해야 합니다.”

“그렇게는 못하지. 촌장이 개입했는데.”

“그러니까 해야 합니다. 정도무림을 궤멸시켜서 촌장 뜻대로 해주는 겁니다.”

“복안은 있는 겐가?”

“벼락이 떨어지고 있군요.”

“……?”

“벼락이 떨어질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떨어지는 벼락을 막을 수는 없지요.”

“정사대전이 벼락이라…….”

“단! 벼락을 한 곳으로 몰아넣는 방법은 있을 듯합니다.”

검왕이 눈빛을 반짝였다.

십마가 사라졌다.

검왕은 존재하지만 그 곁에 십마는 없다. 항상 검왕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인데,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싹 사라져버렸다. 한 명 남김없이.

검왕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하오문과 이상한 무인 무리는 검왕이 일부러 내쳤다. 그들은 여전히 뒤를 쫓고 있지만 검왕 앞에 나서지는 못한다. 나서면 벤다고 엄포를 놨으니까.

십마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없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검왕이 비락제를 건너 무당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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