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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178화 (178/225)

# 178

第三十六章 탈몽(脫夢) (3)

날이 밝아올 무렵, 화천 뒤로 많은 사내들이 늘어섰다.

그들은 모두가 고수다. 고수 아닌 자들이 없다.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고, 행동에 흔들림이 없다.

외인이 검왕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검왕이 머물고 있는 근방 일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인들이 운집해 있다.

마인, 마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정신이상자도 있고, 살인광도 있다.

많은 마인들이 법(法)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지 못하는 인간성 상실자다.

한마디로 말해서, 검왕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삼십 리 정도는 무법천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살인, 약탈, 방화가 매일 일어난다.

그것도 정도 무림과의 싸움이 목전에 임박한 관계로 마인들이 자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흉악범들이 주위에 득실거린다.

그런데도 화천 등 뒤로 늘어선 사내들은 일점 요동이 없다.

그들은 마인들 무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이들 정도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까지 보인다.

마인들도 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칼은 칼을 알아본다. 칼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좋은 칼과 나쁜 칼을 구분할 줄 안다.

이들은 손대기도 겁이 날 정도로 예리한 칼들이다.

혈루마옥 절정 무인들!

그들이 화천 등 뒤로 늘어서 있다.

강을 건넌 녹천 무인들이 날이 밝아서야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화천과 검왕을 봤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불을 쬐는 모습인데,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다.

두 사람이 꺼진 모닥불을 쬐고 있다.

녹천 무인들은 미리 약조라도 되어 있는 듯이 화천 뒤에 앉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침묵했다.

화천은…… 생각 중이다.

검왕을 꺾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생각도 일어난다. 촌장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생각은 세 번째 생각으로 이어진다.

누미와 잡은 천하는 백 일(百日)에 불과하다. 백일천하로 끝난다.

그가 세 번째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검왕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과 촌장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가 이룬 모든 것을 거둬갈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생각들이 전제가 되어야만 세 번째 생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세 번째 생각, 자신이 잡은 권력이 백일천하로 끝나지 않으려면 검왕을 이겨야 하고, 촌장이 돌아왔을 경우에는 촌장 역시 꺾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럴 수 있을까?

그로써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다.

혈오!

촌장은 혈오로 막을 수 있다.

실제로 혈오는 녹천주를 꺾도록 도와주었다. 녹천주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데, 그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졌겠나. 그게 모두 혈오가 도와준 덕분이다.

촌장도 혈오와 함께라면 꺾을 수 있다.

문제는 검왕이다. 이자를 꺾을 수 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꺾을 수 있나?

그는 밤을 꼬박 밝히면서 숙고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답을 찾지 못했다.

꺼진 모닥불 건너에 검왕이 있다.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올릴 정도로 각인한다.

검왕이 펼쳐 보였던 일수도 기억한다.

속도, 각도, 검의 변화, 호흡 등등 모든 것을 뼛속 깊이 새겨놓는다.

혈오와 함께 싸우든 녹천 무인들과 협공을 하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상관없다. 검왕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한, 무림행은 백일천하로 종식된다.

“휴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는 도중에 소문을 들었습니다.”

녹천 무인들 중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검왕에게 패하셨다는…….”

“맞다.”

화천이 너무도 쉽게 시인했다.

화천에게 질문을 던졌던 무인은 침묵했다. 그래서 화천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

“왜? 너희들이 해보게?”

“우리 중 절반이 목숨을 내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 돼.”

화천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답했다.

긴 밤 내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들 중에 하나가 합공이다. 녹천 무인들 전부와 함께 싸워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이어가도 검왕의 빠름 앞에서는 모두 무너진다.

빠름? 아니다. 검왕은 단지 빠르기만 했던 게 아니다. 뭐라고 콕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빠름 속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 무엇인가가 확 일어났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검왕과 싸우지 못한다.

“내가 일수에 무너졌다. 합파를 썼는데도.”

“하, 합파!”

“음!”

녹천 무인들이 침음했다.

최고의 무인들이 화천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합파는 필사(必死)를 부른다. 적의 죽음은 상관하지 않는다. 주인의 죽음, 무공을 펼친 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이끄는 말 그대로 죽음의 절학이다.

녹천 무인들은 합파를 잘 안다.

그들 역시 합파를 펼칠 줄 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지막 순간이라고 여겨지면 한 점 망설임 없이 합파를 전개할 것이다.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화천이 합파를 전개했다면…… 상당히 절박했다.

합파 이외에는 승산이 없다고 봤다. 꺼진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내에게.

그랬다면 죽었어야 한다.

헌데 화천은 살아 있다. 벼락으로 벼락을 내리쳤는데, 티끌만한 손상도 입지 않았다.

이것은 저 사내가 만든 것이다.

저 사내에게는 합파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공이 있다. 벼락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을 둘로 나눌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녹천 무인 전부가 달려들어도 승산이 없다.

자신들이 혈천성 마인들을 비웃는 눈으로 보듯이, 검왕은 자신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볼 것이다.

화천이 자리에서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급하게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세상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하고 불구경이라던데, 아주 큰 판이 있잖아. 싸움 구경이나 하고 가지.”

화천과 녹천 무인들이 사라졌다.

물론 겉으로만 사라졌다. 속으로는 아직도 검왕과 혈천성 무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싸움 구경…… 검왕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정도무림을 박살내는지 지켜보겠다는 거다.

그들은 이번 싸움을 검왕의 승리로 본다.

합파를 눌러버린 무공…… 녹천 무인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이다. 중원 무림이 그런 무공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누가 맞서겠는가.

검왕을 만나기 전까지 혈루마옥은 천하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취하지 않아서 그렇지 취할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라도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검왕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변했다.

검왕이 천하를 손에 쥐려고 한다.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큰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 자신들에 대한 저항인 줄 알았는데……

혈루마옥 무인들을 눌러앉힐 수 있는 사람이다. 중원 무림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검왕이 정도무림을, 그리고 마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본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중원 무림이 말살당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전까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다!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가장 중하다.

검왕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촌장!

당신 어디에 있는 거냐! 무엇을 하는 것이냐!

촌장 역시 혈오를 통해서 저주를 풀었다. 혈오의 도움이 없었다면 혈루마옥을 뛰쳐나오지 못했다.

혈오의 통제를 받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기련산에서 그랬다. 촌장은 혈오를 거역하지 못했다. 증평주와 마찬가지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분명한 것은 마도와 정도가 일전을 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소림사가 자신과 십마에게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소림사를 멸문시킬 명분이 없다.

타 문파를 공격하는 행위는 오직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 세상은 나를 경배하라!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음뿐이다!

이렇게 광망한 외침을 토해내는 자들, 세상을 발아래 굴종시키는 것이 목적인 자들,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만이 그런 행위를 한다.

자신은 무엇 때문에 소림사를 멸문시켰나?

어디서부터인가 크게 잘못되었다.

그 생각을 밤새도록 했다. 허나 찾지 못했다.

무엇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찾지 못했다.

“후후!”

검왕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텅 빈 허공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제일령주를 만나야겠다.”

당연히 ‘알았습니다’하는 대답이 들려와야 한다. 헌데 대답은 다르다.

“영주님은 성에 계셔서…….”

“그런가.”

“죄송합니다.”

“그럼…… 내가 찾아가야겠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성으로 안내를 해드리고 싶지만 영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하는 터라…… 죄송합니다. 전갈은 띄우겠습니다.”

“가라.”

“네?”

“너희 모두…… 내 곁에서 물러나라.”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너희는 잘못한 것이 없다. 다만 내가 이제부터 미친놈이 좀 되어 볼까 한다. 미친놈 곁에 있어서 좋을 게 없지. 까딱하면 불벼락이나 맞게 되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친놈은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이라도 마음에 들면 가까이 하고, 방자(幇者)라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이게 불벼락이야.”

“저희를 치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알아들었다.”

파팟!

검왕이 살기를 피워냈다.

귀선부 제일령주가 직접 키운 고수들…… 이들은 정도 마도 모른다. 오직 한 인물, 제일령주라는 인물에게 충성을 바치는 골수 충복들이다.

검왕은 제일령주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는 ‘잘못된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그가 이들을 보낸 것도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겠다는, 파리가 꼬이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살기까지 무럭무럭 피워냈다. 정말로 검을 쓸 수 있다는 듯이.

솔직히 말하면…… 현재 상태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겠다. 자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아군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 적으로 돌릴 생각이다.

제일령주도, 십마도, 하오문도, 혈천성도…… 지금 그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다시 살필 생각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필요치 않다시면 굳이 심부름을 해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나무꾼이 상당히 섭섭했는지 싸늘하게 답했다.

잠시 후,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모두 떠나간다. 곁에서 시중들던 중년 아낙도 떠났다. 멀찍이 떨어져서 호위를 하던 장정들도 어느 틈엔가 자리를 비웠다.

모두 갔다.

녹천 무인들은 주위에서 얼씬거리고 있지만, 저들은 정말로 사라져 갔다.

잘못 판단한 것일까?

검왕은 여전히 꺼진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그러면서 역시 텅 빈 허공에 대고 말했다.

“문주를 만나야겠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문주가 오던지 내가 가던지…… 기별이 오면 연락주고 그리고…… 너희도 곁에서 물러나라. 내 뜻은 들어서 알고 있을 테니까 부언하지 않는다.”

그는 하오문까지 떨쳐냈다.

모두를 떨쳐낼 생각이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서 처음부터 다시 살펴볼 생각이다. 큰 싸움,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잘못된 부분을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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