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177화 (177/225)

# 177

第三十六章 탈몽(脫夢) (2)

‘크다!’

화천은 압박감을 느꼈다.

검왕이 무섭게 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괄목상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무공이 강해졌다.

그래도 자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다.

지금도 손끝에는 검왕을 죽일 때 느꼈던 감촉이 남아있다.

검왕의 가슴은 철판처럼 단단했다. 그것을 부쉈다. 철판을 부수면서 단단함을 깨는 데서 오는 통쾌함을 느꼈다. 그 감촉, 그 느낌이 지금도 남아있다.

헌데…… 이상한 기분이 치민다.

검왕이 다르지 않다. 분명히 무공이 강해졌는데, 예전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검왕은 심하게 압박해와야 한다.

기도가 강해서 위축감이 든다거나, 눈빛이 고요해졌다거나, 빈틈이 사라졌다거나…… 고수가 되었으면 고수만이 내뿜을 수 있는 특별한 징조를 드러내야 한다.

검왕은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일장에 거꾸러트릴 수 있을 것 같고, 여전히 빈틈이 많이 보이고, 여전히 한 수 아래로 여겨진다.

그런 점들이 오히려 화천을 압박한다.

분명히 달라졌는데, 달라진 것이 없으니 함부로 나갈 수 없다.

스릉!

화천은 검을 뽑았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들 생각은 없다. 검에 진기를 운집해서 검왕을 타진해 볼 생각이다.

검 끝에서 살광이 발산된다.

검을 통해서 살기가 전달된다. 당장이라도 몸을 벨 것처럼 와락 달려든다.

‘검을 뽑아!’

이 시점에서 검왕이 검을 뽑으면 살기가 먹혀들었다는 소리다. 검왕이 살기에 반응한다는 뜻이다. 이 살기,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게다.

그렇다면 검왕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검왕은 검을 뽑지 않았다. 두 손을 밑으로 축 늘어트리고, 화천을 지켜본다.

화천이 내뿜는 살기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화천은 경쟁심을 버렸다. 검왕을 이기겠다는 생각도 씻은 듯이 지워버렸다.

머릿속을 텅 비운다.

그는 검왕을 진정한 강자로 인정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 비학을 전개한다. 모든 내공을 아낌없이 끌어내어 일검에 집중시킨다.

파아아아앗!

화천의 전신에서 분홍빛 기류가 일어난다.

그가 일으킨 진기가 주변 공기를 타격한다. 공기가 진동을 일으킨다. 그 모습이 마치 분홍빛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아스라이 일렁거린다.

그래도 검왕은 검을 뽑지 않았다.

화천도 이번에는 검왕을 주시하지 않았다. 검왕이 검을 뽑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검왕은 검왕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고, 자신은 자신 방식으로 싸운다.

‘합파(合破)!’

화천은 녹천 최후의 절공을 생각했다.

세상은 음양(陰陽)이 조화로울 때 평화롭다. 몸뚱이 역시 음양이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 부부 또한 서로 간에 화합할 때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인간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평화는 음양의 순리(順理)로 말해진다.

순리는 반대는 역리(逆理)다. 충돌(衝突)이다.

음과 양이 격돌하면 싸움이 벌어진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싸움은 충돌이다.

음과 음이 부딪쳐도 싸움이 되고, 양과 양이 부딪쳐도 싸움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충돌은 힘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벼락도 힘이다. 폭포도 힘이다. 큰 폭포는 더 강하게 충돌하고, 더 많은 힘을 일으킨다.

세상에는 많은 충돌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충돌은 역시 극성과 극성의 충돌이다.

음과 양의 충돌, 남자와 여자의 싸움, 하늘과 땅의 다툼…….

양쪽이 부딪치면, 강하게 충돌시키면 그만큼 강한 힘이 발생한다. 강하게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욱 강한 힘이 일어난다. 어느 한쪽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까지 충돌하려면 그만큼 강한 힘이 필요할 것이고, 충돌에서 일어나는 힘도 그만큼 커진다.

여기서 보자. 어느 한쪽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양쪽이 모두 공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딪쳐보자. 양쪽 모두 공멸하는 충돌을 일으켜보자.

이것이 합파다.

합파를 전개하면 화천은 살아남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신 내공이 산산조각 난다. 아니, 그 조각조차도 부서진다. 가루도 남지 않는다. 가루조차도 부서져서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일신의 모든 힘이 단 한 번에 폭발한다.

츠으으으읏!

화천은 그 힘을 검에 모았다.

지금 그가 모으는 것은 음공(陰功)이다. 녹천 사람들이 한(恨)으로 생각하는 음한지기(陰寒之氣)다.

구구구구국!

화천은 신체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감지했다.

음한지기를 일깨우자 혈루마옥의 저주가 되살아난다. 혈오를 통해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는데, 그래서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어낼 수 있었는데…… 그 균형이 깨지고 있다. 신체가 무너지고 있다. 오장육부가 요동치고 있다.

화천은 음한지기를 모두 끌어내어 검에 밀집시켰다.

츠츳! 츠츠츳!

검에 한기가 맺힌다. 서리가 맺힌다.

혈루마옥의 저주가 검에 맺힌다.

혈루마옥 사내들은 양강지기가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다.

계곡 안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음양화합을 하지만 계곡만 벗어나면 양강지기가 봉쇄된다.

신체가 균형을 잃는다.

혈오가 이 점을 보충해 주었다. 양강지기를 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혈오는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다만 계곡 밖으로 나가도 양강지기가 제대로 활용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있는 것을 쓰게 만든 것이다.

이제 그것, 음한지기와 충돌할 양강지기(陽剛之氣)를 끌어낸다.

꾸우우욱! 꾸욱!

양강지기는 두 발로 집중된다.

음한지기는 검에, 양강지기는 발에 운집한다.

일순, 단전이 텅 비면서 삶에 대한 애착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진다.

‘됐다!’

화천은 씩 웃었다.

화천이 웃는다.

검왕은 화천에게서 강력한 패도(覇道)를 읽었다.

화천은 매우 극강한 무공을 펼칠 것이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천하제일의 방패도 화천의 공격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무너질 게다.

이것은 짐작이지만 맞을 것이다.

하지만…… 화천이 웃는다.

화천 스스로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뜻이다.

허면 그는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다. 한 호흡 정도? 그 정도가 부족하다. 화천이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 미흡하다.

허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크다.

물은 자신이 물인지 모른다.

불은 자신이 불인지 모른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간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닿는 물체들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정작 준비가 끝난 사람은 준비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야 한다.

촌장은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도착했다. 말을 하는 가운데도 준비는 완벽하게 끝나 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눈으로는 화천을 응시하고 있지만 준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눈앞에 화천이 있다. 반대쪽에 자신이 있다. 그 사이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타타타탓!

화천이 달려 나온다. 검을 천중(天中)으로 들어 올리고, 생사를 도외시한 채 달려온다.

그는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린다는 생각이 없으니 기다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달려오는 화천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쒜에에에엑! 콰콰콰콱!

검이 내리쳐진다.

헌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큼이나 큰 소리인데…… 어떤 소리인지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인가가 쾌속하게 밀려오는 소리다.

검왕은 그 소리를 봤다.

그렇다.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봤다.

양강지기가 위로 솟구친다. 밑으로, 밑으로 꾹꾹 눌러놨던 양강지기가 활화산 폭발하듯이 위로 치솟는다.

불의 성질은 위로 솟구치는 것이다.

화기(火氣)는 늘 위로 솟구친다. 반면에 수기(水氣)는 밑으로 흘러내린다.

천중에 쳐 들려진 검이, 음한지기를 가득 머금은 검이…… 밑으로 흘러내리는 성질을 가진 음한지기가 내리치는 힘에 한층 힘을 덧붙인다. 가속을 불어넣는다.

화기는 위로 솟구친다. 밑바닥에 남은 것은 없다. 작은 뿌리까지 모두 허공에 띄워진다.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음한지기를 맞받아치려고 한다.

검왕은 화천의 의중을 읽었다. 아니, 읽은 것이 아니다. 저절로 알아졌다. 알아진다는 느낌도 없다. 본래부터 알았던 것처럼 한눈에 보인다.

스릉! 스읏!

그는 그제야 검을 뽑았다.

검이 물 흐르듯 유유하게 흐른다.

무척 느리게, 무척 빠르게. 시작은 느렸지만 어느새 화천의 검권(劍圈)을 파고들었다.

검이 검을 맞이한다.

검왕은 왼손도 사용했다. 손가락을 칼날처럼 쭉 폈다. 다섯 손가락이 물도 스며들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그리고 역시 유유하게 흘러나갔다.

화천의 눈가에 암울함이 깃든다.

화천은 결과를 예측한 것 같다. 이번 공격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검왕의 대응은 합파가 우려하던 최악의 각본이다.

퍽!

검왕의 관수(貫手)가 쇄골 아래 중부혈(中府穴)을 후벼 팠다.

발바닥에서 위로 솟구치던 양강지기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중부혈을 지나쳐서 양쪽 손목 온유혈(溫溜穴)로 들어서야 하는데, 길이 막혀 버렸다. 더군다나,

턱! 턱! 턱! 턱! 터억!

검왕은 화천을 검을 다섯 번에 나누어서 받아냈다.

정면충돌을 피한다. 전력 대결을 사양한다. 일차로 살짝 부딪치고, 부딪쳤다 싶은 순간 재빨리 밑으로 흘려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딪쳐 온다.

다섯 번에 나뉘어서 일어난 격돌.

음한지기는 폭발력을 잃었다. 양강지기는 갈 곳을 몰라 다시 거둬진다.

합파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읏!

일격을 막아낸 검이 화천의 목에 겨눠졌다.

이런 일이……!

화천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눈만 끔뻑거렸다.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두 배는 빠르군.”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싸움은 끝났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래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검왕을 시중들던 사람들조차 멀리 떨어져서 구경을 한다.

접전의 결과는 그들도 똑똑히 봤다.

검왕이 화천의 목에 검을 겨눴다.

승부는 끝났다. 헌데 왜 검왕은 화천을 베지 않은 것일까? 혈루마옥과는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할 수 없는데. 혹시…… 혈루마옥을 이번 싸움에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혈루마옥이 혈천성 편에 서서 싸운다면 승부의 추는 완전히 기울어진다.

정도무림은 설 땅이 없을 것이다.

오늘 이 순간부터 무림지도가 바뀌게 된다. 구파일방으로 대변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검성과 혈천성으로 양립하던 시대도 이미 옛이야기가 됐다.

이제는 검왕 혼자 우뚝 선다.

혈천성 마인들은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도 화천이 힘을 합해주기를 고대했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정도무림은 검왕이 지금이라도 화천을 죽여줬으면 하고 바랐다.

승부는 끝난 상태다. 화천의 생사여탈권은 검왕에게 주어졌다.

타탁! 타탁!

모닥불이 타들어 간다.

두 사람의 싸움이 찰나지간에 끝났기 때문에 불길이 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닥불은 두 사람이 일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기세 좋게 타들어 간다.

화천과 검왕은 묵묵히 불길만 봤다.

서로,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은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만의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어서 죽여. 왜 죽이지 않았지?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뭐야? 내게 바라는 게 있나?

물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타닥! 타닥! 투툭!

기세 좋게 타오르던 모닥불도 점점 잦아든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일어설 줄 몰랐다. 말도 하지 않고…… 꺼져가는 모닥불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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