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176화 (176/225)

# 176

第三十六章 탈몽(脫夢) (1)

“화천이 흑천에 도착했습니다.”

“화천이 흑천을 건넜습니다.”

“화천이 녹천 무인들을 떼어놓고 단신으로 걸어오는 중입니다.”

화천에 대한 보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무꾼이 나무에 대고 이야기를 한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물론 듣는 귀는 많다.

나무꾼이 흘리는 혼잣말은 검왕에게도 들린다.

나무꾼은 화천에 대해서만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정도 무림과 혈천성에 대해서도 혼잣말을 한다.

그가 흘리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면 무림 정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호 무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쭉 꿰어진다.

현재, 산음에는 일촉즉발 긴장감이 흐른다.

지금 바로 산에 시신이 쌓이고, 강에 핏물이 흘러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을 정도다.

“차를 끓여주시겠습니까?”

검왕이 시중드는 중년 아낙에게 말했다.

중년 아낙이 시중을 들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말을 건넨 것이다.

“원하시는 차라도?”

“따뜻한 차면 됩니다. 아침 이슬을 밟고 오는 사람이 몸을 녹여야겠지요.”

검왕은 화천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중년 아낙도 검왕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화천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다. 감히 가로막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토끼가 수천 마리에 이른다 한들 어떠랴. 늑대 한 마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화천이 십 리 길을 걸어왔다.

그는 검왕이 자신을 어떻게 맞이할지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그림대로 앉아있다.

불을 피워놓고, 불 위에 차가 담긴 주담자를 올려놓고.

화천은 불가로 다가가 맞은 편에 앉았다.

검왕이 화천을 향해 씩 웃었다. 화천도 검왕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왕이 중년 아낙을 쳐다봤다.

중년 아낙은 모닥불 위에 얹혀진 주담자를 내려 찻잔 두 개에 차를 따랐다.

그녀가 검왕에게 차를 먼저 건네려고 하자, 검왕이 화천을 가리켰다.

중년 아낙이 화천에게 잔을 건넸다.

화천은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훌쩍 맛을 봤다.

그때쯤 검왕도 찻잔을 받아들었다.

훌쩍!

검왕이 차를 마신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만 마셨다.

상대를 보면 느낌이 온다.

눈빛, 행동거지, 몸에서 풍기는 기도…….

진짜 실력은 손속을 부딪쳐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대와 마주치는 순간, 대략적인 윤곽은 파악된다.

일명 선입견이라고도 한다.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고, 자신감이 강하게 발로할 수도 있다.

어쨌든 상대는 읽을 수 있다.

‘강해졌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화천은 검왕에게서 예전 검왕 모습을 찾지 못했다. 일수에 나가떨어지던 검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도 ‘검왕 따위는’하고 생각한다. 검왕이 일취월장한 것은 사실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혈루마옥 무공을 감당할 수 있다고 뵈지는 않는다.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촌장님을 만나지 않았나?”

그가 다 마신 찻잔을 중년 아낙에게 건네며 물었다.

“만났네.”

화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왕이 촌장과 만난 일, 촌장과 싸운 일, 절벽에서 떨어졌으며 마지막 순간에 죽음에서 벗어난 일…… 이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촌장과 검왕은 상극이다. 상극인 사람들이 만났으면 둘 중에 한 명은 쓰러져 있어야 한다. 허면 촌장이 쓰러졌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촌장은 혈오에게 가로막혔다. 분명히 혈오가 촌장을 읽었고, 제재를 가했다.

촌장은 혈오가 제재를 가하기 전까지 살아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검왕도 죽었어야 한다. 검왕이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게 의아하다.

그는 검왕에게 어떻게 살아있냐고 묻고 싶었다.

허나 물을 수 없다. 혈루마옥 사람이 촌장의 생사를 외인에게 묻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화천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오늘은 검을 써야 할 것 같군.”

‘이…… 런!’

검왕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는 화천을 유인했다. 소림사를 멸문시키기 전부터 지금 이 자리에서 화천과 조우할 것을 예상했다.

화천은 반드시 달려온다.

촌장과 증평주는 서역을 잠재우기 위해 떠났다.

중원에 분란이 일어나면 서역 또한 준동한다. 한쪽이 기울면 다른 세력이 기울어진 자리를 기웃거린다.

촌장과 증평주는 서역을 효과적으로 잠재울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역을 잠재우면서도 누가 어떻게 하는지 알리지 않는다. 허니 중원에서는 서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방도가 없다.

솔직히 서역에 대해서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허나…… 허나…… 촌장과 증평주가 서역으로 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절곡에서 뛰쳐나온 혈루마옥 무인들 중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혈루마옥 최고수가 떨어져 나갔다.

녹천주와 함께 혈루마옥을 실질 지배하던 증평주가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 이곳에서 녹천주마저 제거하면 혈루마옥은 우두머리를 잃게 된다. 지도할 사람이 없게 된다.

물론 혈오가 남는다.

혈오는 촌장이 지배하던 혈루마옥보다 더 강한 결속체를 만들었다.

녹천 무인들, 중평 무인들은 다른 생각을 품고 싶어도 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혈오는 한낱 갓난아기다.

촌장이나 증평주, 녹천주가 혈루마옥을 지배하는 것과 한낱 어린아이에 속박되어 있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

검왕은 일단 혈루마옥의 명분을 없앨 생각이었다.

산음 대회전에서 일거양득을 거둔다.

녹천주를 제거함으로써 혈루마옥의 지배자 체계를 무너트린다. 정사공멸을 통해서 무림을 멸망케 한다. 무림에서 무인들을 완벽하게 지워버린다.

혈오는 쥘 것이 없게 된다.

시신이 산이 되어 쌓이고, 핏물이 강이 되어서 흐를 터이지만 혈오가 지배하는 세상보다는 낫다.

헌데…… 그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화천과 만난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화천은 촌장에 비하면 매우 약하다.

촌장은 무기(無氣)와 유기(有氣)를 자유롭게 조정한다. 무공의 강약을 마음대로 조정한다. 뜻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이의즉살(以意則殺)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천은 강하지만 그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화천과도 싸워보고 촌장과도 싸워본 경험에 의한 판단이니 틀릴 리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현재 혈루마옥은 누가 이끌고 있는가. 누가 주인인가?

촌장이 아니다. 화천도 아니다.

혈오다. 혈오를 조정하는 누미다.

화천은 아직 무기와 유기 사이의 차이를 모른다. 유기를 무기로, 무기를 유기로 변화시킬 줄도 모른다.

촌장은 안다.

기(氣)에 대해서 처음과 끝을 완벽하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촌장인 게다.

그런 사람이 과연 혈오가 등장하는 것을 몰랐을까?

혈오를 통해야만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 수 있다면…… 그 저주가 어떤 식으로 풀리는지 의문을 가져봄 직한데,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그렇다! 혈루마옥의 주력은 따로 있다!

혈오가 이끄는 주력은, 화천은 중원 무림을 파멸로 몰아넣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검왕이 이런 생각을 한 이유가 있다.

누미가 화천을 따라오지 않았다.

물론 화천이 누미를 팽개치고 혼자 달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누미가 아니다. 모처럼 녹천을 손에 쥐었는데.

검왕은 지금쯤 누미와 촌장이 만나고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했다.

‘촌장은 중원 파괴를 말리지 않았다!’

물론 혈오가 이끄는 녹천 무리는 중원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검왕이 보기에는 중원 무림보다도 녹천 무인들이 훨씬 강하다. 그들이 파멸로 이끌고자 한다면 파멸되고 만다.

검왕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이 왜 무림을 파멸시키고자 했는가!

혈오에게 텅 빈 무림을 주고자 했다. 그들이 할 일이 없게끔, 무림을 파멸시키지 않게끔…… 자신이 직접 무림을 파멸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텅 빈 무림을 준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검왕은 다시 한 번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잠시 어떤 망각에 빠졌다가 나온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촌장과 싸우고 난 다음…… 허면 내가…….’

화천을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만 생각했다. 무림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구하는 길은 이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멸망시키고, 저들로 하여금 복구케 한다는.

혈오가 무림을 복구시킬 것 같은가?

지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한 것, 머리가 활짝 열린 것은 화천이 혈오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혈오의 냄새를 맡고, 혈오의 기운을 읽었다.

촌장이 그렇듯이 그도 무기에서 유기로, 유기를 무기로 전환시킬 수 있다.

혈오의 기운을 느끼자, 정신이 확 깨어난다.

긴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머리가 맑아진다.

“풋!”

검왕은 실소를 터트렸다.

촌장에게 이긴 줄 알았는데, 졌다. 무공에서는 졌지만 승부에서는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졌다. 촌장이 혈오의 기운을 읽고 당황했을 때, 사실 그때 촌장이 이기는 순간이었다.

촌장과 증평주는 서역으로 가지 않았다.

이것은 짐작이지만 틀림없을 것이다.

검왕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화천을 위해서 차를 준비시킬 때까지만 해도 티끌만 한 느낌조차 없던 생각이다.

소림…… 소림사를 왜 멸망시켰는가.

소림사는 멸망하지 않았다. 절만 불탔을 뿐이다. 소림사의 주요 경전들, 무공비서들은 모두 빼돌려졌다. 무승들 중 상당수도 방장 명령을 쫓아서 몸을 피했다.

그들은 소림사를 재건할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물자가 많고, 도움도 많으니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일이 년 안에 소림사 현판을 달 수 있을 게다. 물론 태산북두가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그가 생각했던 무림 멸망은 이런 것이었다.

껍데기만 벗겨내고, 속살은 숨겨둔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진실이라면 촌장은 힘 안 들이고 속살을 집어삼킬 것이다. 물론 자신도 제거할 것이고.

무림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

그 일을…… 무림을 벼랑으로 치모는 일은 자신이 하고 말았다.

“차 한 잔 더 하고…… 차 한 잔만 더 하고…….”

검왕은 생각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을 후딱 스쳐 간 생각들을 잡아야 한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명확하게, 질서 있게 순서를 찾아야 한다.

그는 중년 아낙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검왕은 무려 반시진에 걸쳐서 차를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찻잔을 내미는 횟수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화천은 묵묵히 기다렸다.

그도 검왕이 생각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자신과의 싸움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생각이든 마무리 짓게 내버려둔다.

끄덕! 끄덕!

검왕이 드디어 생각을 마쳤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날은 벌써 밝았다. 새벽이 지나간 지도 꽤 됐다.

검왕이 화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루했을 텐데, 고맙군.”

“솔직히 기분은 나빴지. 내가 적수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적을 앞에 두고 딴 생각이라니. 모욕이야. 후후! 자, 이제 해도 될까?”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주위는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졌다.

검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나누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이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의 싸움은 폭풍이 될 것이다. 괜히 폭풍 곁에 있다가 된서리 맞는 수가 있다. 대신 주위에 숨어서 지켜본다. 이런 싸움을 구경하지 않는다면 천하제일의 바보다.

화천과 검왕은 동시에 일어섰다. 느릿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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