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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五章 불명(不明) (4)
화천은 잊은 사람이 있다.
누미도, 세상 사람들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이 순간에는 기억하지 않고 있다.
수월화!
중평 후기지수인 그녀를 잊으면 안 된다.
그녀의 행적은 십절소악, 누강과 함께 뚝 끊겼다.
누강과 음사는 기련산에 나타났었다. 분명히 수월화에게 사로잡힌 몸이었는데.
십절소악은 강호상에서 사라졌다.
하오문주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자가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 누강과 음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모르는 것처럼.
그들이 사라지면서 중평도 사라졌다.
중평주만 검왕과 함께 기련산으로 갔을 뿐…… 중평은 그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화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촌장과 중평주를 찾고 있겠지. 죽은 줄도 모르고. 당분간 모습을 보이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은 화천만 하는 게 아니다. 녹천 무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
여인네들이란…….
중평을 비하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녀들은 윗대가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몸통도 움직이지 않는다.
중평주가 없으면 수월화도 움직이지 않는다.
수월화가 움직이지 않으면 중평 전체가 정지한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융통성있게 움직일 법도 하건만, 중평은 철저하게 상명하복(上命下服)한다.
중평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녀들의 행방이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예외다. 중평이 활동을 중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화천이 딱 하나, 수월화가 누강을 사로잡았었다는 사실만 기억해 냈어도 생각을 한 번 더 해봤으련만.
“화천이 떠났습니다.”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미하고 혈오만 남았어요.”
“대단한 뱃심이네. 누산에게 아직 고수가 있는데…… 흠! 어찌 된 것인지 알 것 같아.”
수월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산에게는 유화아와 음악오귀가 있다.
화천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뛰어난 고수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들이 누산 곁에 남아있다.
그들은 언제든 누미를 죽일 수 있다. 혈오 같은 갓난아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 두 모자만 남겨두고 모두 떠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유화아는 이미 혈오에게 무공을 읽혔다.
혈오와 누미가 서로 일체(一體)된 상태라면…… 누미는 유화아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녀 혼자서도 누산 일행을 감당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련만, 지금은 모든 게 당연하게 생각된다.
“어떻게…… 누산을 빼낼까요?”
“아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요?”
“우리 역시 혈오에게 도움을 받은 몸이야. 혈오에게 목숨줄을 잡힌 몸이라고.”
수월화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린…… 녹천을 친다.”
“…….”
일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녹천이 중평을 공격하는 것과 중평이 녹천을 공격하는 것…… 양쪽 모두 쉽지 않다.
낭군이 녹천에 있다. 지어미가 중평에 있다.
누이가 중평에 있고, 오라비가 녹천에 있다.
녹천과 중평은 아주 험악하게 패권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그런 다툼은 서로 간에 우열을 정하는 선에서 그친다. 서로 피를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화천이 그 율법을 깼다.
그런고로 화천을 공격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화천은 녹천주를 암살했지 않은가. 공격할 만한 명분이 충분하다. 화천을 베는 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러나 녹천은…… 망설여진다.
수월화가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이 싸움은 녹천에게 맡겨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의사를 베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해. 그래서 그 사람들보고 선택하라고 해. 싸울 것인지, 뒤로 물러설 것인지.”
굳이 녹천을 공격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다.
수월화 역시 녹천을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혈루마옥의 정리를 생각해서 중평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다면, 중평도 검을 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녹천이 우리를 베면, 그때 마주 싸우면 돼. 일단 의사전달을 해. 화천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은밀히.”
* * *
또 한 군데, 강력한 조직이지만 큰 싸움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잊혀지는 문파가 있다.
하오문이다.
현재 무림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정사대전 같은 큰 싸움이 있을 때면 하오문은 어김없이 잊혀진다. 그들은 겨우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다.
“판을 벌여도 어지간하게 벌여야지, 이거야 원.”
나이는 노인이지만 얼굴은 소동(小童) 같은 십절소악이 중얼거렸다.
“우리도 이 판에 끼나?”
맞은편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자가 무심결에 말했다.
“쉿!”
십절소악은 급히 손을 입에 댔다.
대부분의 하오문도들은 천하태평하게 싸움구경을 한다.
십절소악은 그럴 수 없다. 하오문과 검왕과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다.
“음! 우리도 준비하고 있군. 어지간히도 큰 판에 끼어들었어. 그런데 정말 우리 이 판, 감당할 수 있어?”
“없지.”
“이 판이 끝나면 공멸인데, 그 뒤는?”
“모르지.”
“제길! 그럼 무슨 생각에서 이런 판에 낀 거야?”
“그거야 문주님 판단이지.”
“안 되겠어. 문주님도 봬야겠다.”
“지금 연공 중.”
“제길!”
넓고 큰 방파, 하오문 중에서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만 하오문이 이 판에 낀 것을 안다.
다른 자들은 천하태평이다. 무인이 검을 사러 오면 장사가 되어서 좋고, 길을 가다가 여독을 풀기 위해 기방에라도 들르면 술과 여자를 팔아서 좋고.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니 장사가 잘 된다.
“우리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뭐야?”
“오늘 저녁에 문주님이 말할 거야. 그때 들으라고.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들이 말을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술 취한 취객 한 명이 비틀거리면서 걸어왔다.
비틀! 비틀!
그는 대낮인데도 상당히 취했는지 몸을 가누지 못한다.
“허! 저놈…… 어지간히 해먹지.”
“쯧! 아예 거덜을 내고 있네. 거덜을.”
십절소악도 혀를 찼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취객이 몸을 비틀거릴 때마다 그들의 품속에서 전낭 하나씩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취객, 그가 바로 칠지신투(七指神偸)다.
하오문주는 정사대전을 앞두고 하오십걸(下午十傑)을 소집했다.
하오문의 존폐가 걸린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소집하지 않았을 모임이 열린다.
즉, 하오문주는 하오문의 존폐를 상담하려고 한다.
낙양(洛陽)에 모이는 하오십걸도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짐작한다.
얼마 전에 하오문 친구들이 혈루마옥을 상대로 인간 뺏기 노름을 했기 때문에 더 잘 안다.
그 노름은 검왕이 부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오문에 노름 밑장을 깔아놓은 자가 정사대전의 주역으로 부상했으니.
문제는 그가 마인 편이라는 것이다.
하오문이 결코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지도 마인 쪽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정도 쪽이 조금 가깝다. 아니, 사악한 짓을 많이 하니 마인 쪽이 가깝나?
어쨌든 검왕이 정도 쪽에서 정사대전을 벌였다면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을 게다.
헌데 그가 마인 쪽이다.
이겨도 께름칙하고, 지면 세세손손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싸움은 피하는 게 능사다.
헌데 하오문주가 모임을 주재한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려고 한다.
하오문주의 생각은 이미 굳어졌다.
“제길! 이럴 때는 독주 한 잔 쫙 끼얹어줘야 속이 후련한데.”
“술 마시고 싶으면 마셔?”
“큰일 앞두고 마실 수 있나.”
그들은 저녁 술시(戌時)가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 *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다.
귀선부!
검성주의 직속 명령만 받든다는 신비조직.
귀선부의 제일령과 제이령은 상당히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귀선부 조직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존재는 한다. 하지만 누군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검왕 곁을 따라다니는 나무꾼이 있다.
그는 나무를 할 때 쓰는 작은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있다. 등에는 나뭇짐을 이는 지게도 지고 있다. 입고 있는 복색도 영락없이 나무꾼이다.
그가 검왕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또 언제부터인가 중년 아낙이 나타나서 검왕의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검왕이 누울 자리를 살핀다.
검왕은 대부분 관도 한켠에서 노숙을 하기 때문에 돌멩이 좀 거둬내고 담요를 깔면 된다.
아낙은 불도 피우고 음식도 만든다.
검왕은 그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낙의 수발은 온전히 받아들인다.
나무꾼이나 아낙은 고수다.
그들의 행동거지에서 언제 어느 때든 적을 맞이해서 싸울 수 있다는 기개가 풍긴다.
무림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또 언제부터인가 검왕 주위를 맴도는 엽사가 있다.
그는 검왕으로부터 이십 장쯤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 검왕이 쉬면 그도 쉬고, 검왕이 걸으면 걷고, 검왕이 먹으면 그도 먹는다.
그리고 그가 검왕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면서부터 검왕을 쫓는 무리들이 일정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엽사가 검왕 이십 장 주위를 가로막는다.
누구든 이십 장 안으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화살 과녁이 된다. 엽사가 실제로 활을 재우는 것은 아니지만 꼭 과녁에 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엽사도 고수다.
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가.
소림사가 화겁에 휩싸인 지 칠 주야가 지났다.
검왕은 그제야 무당산이 보이는 산음(山蔭)에 들어섰다.
그즈음, 검왕의 주변에는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로 꽤 북적거렸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행동반경이 있다.
검왕 최측근으로는 중년 아낙과 나무꾼이 꼽힌다. 두 번째 반경에 대여섯 사람이 있고, 세 번째 반경에는 십여 명이 둘러싸고 있다. 엽사처럼 멀리 떨어져서 네 번째 반경을 맡고 있는 사람도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다.
거의 이십여 명이 검왕 주변에 늘어서 있다.
그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일체 말이 없다는 것이다.
“저 혹시…… 어느 문파 고수분이신지 말해주실 수 있소?”
“…….”
“기도가 굉장히 뛰어나신데, 검왕과는 어찌 된 사이이신지?”
“…….”
그들에게 호기심을 느낀 몇몇 고수가 일전을 각오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들은 침묵했다.
시선은 피하지 않는다. 싸우고 싶으면 싸워도 좋다는 듯 다분히 도전적인 시선을 보내온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 어떠한 물음에도 대꾸가 없다.
이들도 마인인가?
어쨌든 검왕에게 다가서기가 매우 어렵게 됐다.
그에게 다가서려면 적어도 네 겹을 뚫어야 하는데, 이들 개개인이 모두 고수이니.
“무당산이군.”
검왕이 무당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대꾸하는 사람은 없다. 검왕의 수발을 드는 중년 아낙 정도라면 한두 마디 정도 해도 될 성 싶다. 그래도 말이 없다. 아예 입을 꿰매놓은 것처럼.
검왕이 말했다.
“산음에서 무당산…… 이 사이에서 무림 판도가 결정 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