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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四章 불파(佛破) (2)
일인(一人)이 한 문파를 멸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소림사처럼 무승들이 많은 곳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진기가 소진되면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공의 강도가 약해진다.
소림 방장이 초반에 직접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검왕은 지금 막 일어선 폭풍이다.
검왕의 무공은 어떤 적도 용납하지 않는다. 부딪쳐 오는 적은 모두 박살 낸다.
소림사에서 정면승부로 검왕을 꺾을 수 있는 무승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무가치하게 죽을 것이 빤히 보이기에.
자신이 나서서 몇 수라도 상대하면, 그만큼 검왕의 진기가 소진된다. 또 다른 제자들이 검왕의 무공을 관찰할 기회도 제공한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검왕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든다.
소림 방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몇 수나 버틸 수 있을까? 검왕의 무공이 극성에 이른 혈영마공임을 감안하면…… 잘해야 십초? 아무리 버텨도 이십 초를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장경각주와 호법원주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망설임 없이 합공에 가담했다.
소림 방장과 두 장로가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합공을 취했다고 하면 세간의 조롱감이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점을 감수하고 합공한다.
그들은 살 생각이 없다.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검왕의 무공은 그만큼 패강(覇强)하다.
최대한 차륜전(車輪戰)을 펼쳐야 한다.
검왕의 진기를 최대한 많이 소진시켜서 결국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승부를 봐야 한다.
소림사는 명문정파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다.
그런 곳의 방장이 차륜전을 펼치라고 명령할 수 있겠나. 장경각주와 호법원주인들 입에 담을 말인가.
그들은 명령하는 대신에 몸으로 직접 전하고 있다.
검왕을 무공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소림칠십이절기(少林七十二絶技)를 두루 섭렵한 고수라면 모르겠거니와 그만한 무재(武才)가 아니라면 눈을 돌려야 한다.
현재 소림사에는 그만한 무재가 없다.
소림방장도, 소림이불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장로도 그만한 무재가 아니다.
소림사에는 은거 노승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얼마 전에 세상을 놓아버렸다.
이제는 검왕을 막을 사람이 없다.
이런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다.
혈루마옥이 절곡을 깨고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언젠가는 그들의 칼이 들이칠 것으로 예상했다.
혈루마옥은 무림 최정점, 태산북두부터 노릴 것이다.
가장 좋은 사례로 적벽검문이 멸문당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완전히 멸문했다.
혈루마옥이 그다음으로 노릴 곳이 어디인지는 자명하다.
소림사는 혈겁에 휘말리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피 보라가 휘몰아친다.
소림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나.
무림연합을 생각한다.
전 무림이 하나가 되어서 똘똘 뭉치면 혈루마옥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마저 막혔다.
그런 일을 가로막은 최대 방해꾼은 바로 검성이다. 검성이 중소문파들을 견제했다.
또한 각 문파들의 우유부단도 한몫했다.
무림은 문파마다 이해관계가 다르다. 추구하는 무공 성향도 다르다. 근본적으로 전 무림이 하나로 연합한다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 뿐,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소림사는 차선책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 있을까?
불파(佛破)…… 천 년 소림사의 파괴다.
적벽검문이 그랬던 것처럼 소림사 역시 철저하게 멸문당할 생각이다. 그래야만 남은 문파들에게 경종이 된다. 소림사가 희생되어서 일체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그것도 좋다.
소림사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다.
무당파, 화산파, 아미파, 청성파…… 사실, 멸문당할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모든 문파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혈루마옥에서 공격해 오지 않았다. 뜻밖에도 소림사를 공격한 사람은 검왕이다.
불파에 착오가 생겼다.
검왕이 단신으로 소림사를 멸할 생각이라면…… 소림사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살려야 한다.
혈루마옥이 공격해 올 때와는 다른 상황이다.
소림사는 일부 무승들을 피신시킬 시간을 벌었다.
혈루마옥이 공격해 왔다면 사방이 포위되었을 테니, 도주할 방도도 없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열려있다.
소림 무공은 대대로 전수될 게다.
장경각에 있는 모든 무공비서들이 암암리에 운반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서 검왕을 상대하는 것뿐…… 가급적이면 검왕을 제거하는 것뿐.
? 촤르르르륵!
혈광이 번뜩이자 백팔염주가 뚝 끊어지면서 염주알이 사방으로 퉁겨나갔다.
“아미타불!”
방장은 불호를 크게 외우며 장삼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쒜에엑!
장삼 소맷자락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왕도 혈검을 쓸어냈다. 여유롭게, 결코 서둘지 않고…… 방장의 소맷자락을 정통으로 겨냥하고.
촤라락!
방장의 소맷자락이 무 잘리듯 잘려나갔다.
방장의 소맷자락에는 내가강기가 담겨있어서 단단하기가 웬만한 철판을 능가한다.
의수변내력(衣袖邊內力)!
내공이 극도로 정심하여 무기(無氣)로 유기(有氣)를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펼칠 수 있는 공부다.
검왕은 소맷자락을 자른 것이 아니다. 방장의 내가강기를 잘라낸 것이다.
쒜엑! 쒜에엑!
장경각주가 어느새 계도(戒刀)를 손에 쥐고 도법을 펼쳐왔다.
호법원주는 땅에 떨어진 목봉을 주워들었다. 누군가가 죽어가면서 흘린 목봉인데…… 호법윈주의 손에 쥐어지자 다시 팔팔한 생기를 얻었다.
탕탕! 탕탕탕탕!
검왕은 여유 있게 게도와 목봉을 막아냈다. 허나 반격은 하지 않고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섰다.
순간, 소림방장과 장경각주, 호법원주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의아해했다.
소림방장의 염주를 갈라내고, 의수변내력을 격파한 검공은 하늘도 가를 수 있는 날카로움이다. 그만한 날카로움이라면 갈라내지 못할 것이 없다.
계도와 목봉 역시 갈라낼 수 있다는 뜻이다.
검왕은 사정이라도 봐주는 듯 뒤로 물러섰다. 두 병기를 갈라내지 않고.
무슨 뜻인가?
- 용서를!
바람결에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검왕의 음성이 분명한데, 주위에 둘러선 무승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 같다.
방장은 들었다. 장경각주도, 호법원주도 들었다.
장경각주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시주, 소림사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리 검이 험악한 게요! 이미 살겁이 일어났으니 소림 역시 간과하지는 않을 터, 이제는 생사결전밖에 남지 않았지만…… 시주, 적벽검문도라는 사실이 창피하지 않으시오!”
얼핏 들으면 훈계였다.
검왕이 혈검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전혀.”
짤막한 말 한 마디, 허나 그 대답을 들은 방장과 두 장로는 동시에 미소를 피워냈다. 자신의 제자들조차 보지 못하는, 자신들만 아는 미소였다.
적벽검문은 무림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멸문한 문파다.
검왕은 적벽검문도로서 자신의 행동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멸문? 멸문은 이해한다. 소림사의 멸문은 검왕이 아니라 혈루마옥에 의해서 진행되었어야 하지만…… 멸문은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우적낙재초엽상(雨滴落在草葉上), 우적정료태양승기(雨滴停了太陽升起).”
호법원주가 선시(禪時)를 읊었다.
비가 풀잎 위로 떨어지는구나.
비가 그치면 다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소림사가 당하고 있는 곤욕을 시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 같기도 하다.
- 그럴 겁니다.
방장은 또 들었다. 장경각주와 호법원주도 분명히 들었다.
지금 소림사는 혈겁에 고개를 숙인다. 어쩔 수 없이 멸문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혈겁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재건한다. 다시 일어선다. 일어서고자 해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자연 순리적으로, 비가 그치면 태양이 뜨듯이 일어선다.
누군가가 완전히 뿌리를 뽑지 않는 한, 불력(佛力)은 일어선다.
검왕은 그렇다고 답했다.
“아미타불!”
소림 방장이 두 손 모아 합장했다.
그것은 합장이기도 하지만 쌍수합장발산력(雙手合掌拔山力)의 기수식이기도 하다.
스읏! 쒜엑!
두 장로 역시 계도와 목봉으로 검왕을 겨눴다.
모두들 최후의 승부를 예감했다.
소림방장이 취한 쌍수합장발산력은 부동심공(不動心功)의 정수다.
칼날이 목을 베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일점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무상(無常)이다.
세상의 본래 주인은 무(無)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無)에서 유(有)가 된 것이니, 반드시 변화할 것이며, 다시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
육신 역시 유(有)다.
검왕이 쳐내는 검도 없음에서 탄생한 있음이요, 검을 맞는 육신도 텅 빔에서 탄생한 있음이다.
그것들은 모두 본래 주인들이 아니다.
그러니…… 본래 주인인 없음은 기다린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부동심공의 요체는 불문의 요체이기도 하다.
쌍수합장발산력은 바로 그 무(無)에서 터져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텅 빈 상태에서, 의식이 없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저절로 일어나 발산된다.
죽음의 순간에 펼치는 마지막 일초다.
수련이 깊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일초를 펼치지 못한다. 무의식이 일어나기도 전에 절명한다. 의식이 떨어지는 순간, 몸도 같이 떨어진다. 죽는다.
의식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일초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불문에서는 이를 두고 ‘죽음을 지켜보는 눈’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뚜렷하게 지켜보면서 맞이한다.
범인(凡人)들도 이런 수련을 하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다.
소림방장은 바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장경각주와 호법원주 역시 같은 죽음을 준비한다. 그들이 펼쳐낸 기수식은 허점투성이다. 검왕이 아니라 주위에 늘어선 무승들 중 누구라도 쉽게 공격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세 승려는 이제 그만 목숨을 거둬가라고 말한다.
방금 전까지는 최대한 버텨라. 차륜전을 펼쳐서라도 검왕을 잡아야 한다. 가급적 최대한 진기를 소모시켜라. 확실하게 검왕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고수는 섣불리 나서지 말라. 뒤로 물러서서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보라고 말했다.
방장과 소림이불은 더 버틸 수 있다.
악착같이 버티면 검왕으로 하여금 십여 초는 더 쓰게 만들 수 있다. 그게 별것 아닐지라도 검을 십여 번이나 더 휘두르게 만드는 것이니 그만큼 진기도 소모된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세 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다 이유가 있으리라.
무공이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들대로, 낮은 사람은 낮은 사람들대로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싸움을 주시했다.
쒜에엑!
검왕이 혈검을 쏟아냈다.
혈광이 세 사람을 뒤덮는다. 노을이 세상을 물들이듯이…… 처음에는 단지 붉은 빛, 허나 곧 세 사람 모두 붉은 노을에 휘감겼다. 그들 전신에 혈광이 쏟아진다.
싸악!
무엇인가 잘리는 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호법원주의 머리가 육신에서 분리되어 하늘 높이 둥실 떠올랐다.
순간, 기가 막히게도 죽은 몸이 말을 했다.
탁! 쒜엑!
호법원주가 들고 있던 목봉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검왕의 심장!
검왕은 피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또, 목봉이 너무 빨랐다. 단언컨대 이토록 빠른 공격은 소림 무승들 중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
퍽!
목봉이 정통으로 검왕의 심장을 쳤다.
헌데, 심장이 뚫리지 않는다. 검왕은 심장 부위에 철판이라도 둘러놓은 듯 잠시 휘청이는가 싶더니 이내 검초를 이어갔다. 소림 방장을 향해서.
싸악!
소림 방장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죽은 몸이 말을 했다.
퍼억!
이번에도 검왕은 피하지 못했다.
소림 방장의 쌍수가 검왕을 가격했다. 노승이 평생 동안 수련한 모든 공부가 쌍장을 통해서 퉁겨졌다.
검왕은 더 이상 검초를 이어가지 못하고 뒤뚱뒤뚱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울컥!
검왕이 토악질을 하듯이 피를 쏟아냈다.
그러나 그뿐, 그는 다시 냉엄한 얼굴로 혈검을 들어 올렸다. 장경각주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