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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三章 종패(終牌) (3)
바람 한 점 없는 깊은 밤, 고요하게 세상을 비추는 월광(月光), 그리고 담장 위에 서 있는 면사여인.
한순간, 세상은 깊은 정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술은?”
“준비했다.”
“좋은 거야?”
“순도 높은 것으로 준비하라고 했다.”
“어떤 술인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이네. 확실히 변했어.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일일이 확인하고 점검하고 미리 맛도 보고, 내 취향도 정확하게 알고 있고.”
“…….”
“변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아?”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일, 말해서 뭣할까.”
“호호호호!”
면사여인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그녀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풀려나간다. 피리 소리처럼 맑고 청량한 웃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면사여인은 웃음소리만으로도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능력자다.
“검왕, 아직 안 변했네.”
여인의 말에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점소이가 깜짝 놀라 정원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가 검왕이라니!
무정검사도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검왕!
검성 사람치고 검왕의 무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검성에서 십마와 맞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실제로 혈천성 마인들을 수도 없이 베어냈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지옥의 검귀라고도 부른다.
검왕과 무정검사는 동시대의 무인이다. 허나 검왕이 검성 본성에서 한참 무위를 날릴 때, 무정검사는 소호에서 객잔이나 돌보는 무뢰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은 소속이나 무공은 차이가 많다.
‘어쩐지 감당하지 못할 고수더라니. 검왕, 검왕이라. 소문에는 죽었다고 하던데.’
검왕은 꽤나 많이 죽은 사람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모두 모아보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게다. 툭하면 누구에게 죽었다, 어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는 이런 식으로 불쑥 나타나서 건재를 과시했다.
면사여인이 말했다.
“내 취향을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깟 점검 한 번 하지 못할까. 술병 한 번 확인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런데도 알지 못한다는 것,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부러 마음을 억눌렀다는 것. 검왕, 아직도 날 좋아하는구나.”
“…….”
“불쌍해서 어쩌지, 우리 검왕.”
“…….”
“이렇게 최후의 만찬을 손수 준비한 것은 날 죽이겠다는 뜻이야?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네?”
“죽일 생각 없다.”
“그럼 잡아놓을 생각이야?”
“…….”
“치사해. 자기 마음 편하자고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잖아. 차라리 죽여.”
“생각해보지.”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검왕과 귀선부 이령의 만남은 검성 최대의 연사(戀事)였다.
중원의 모든 선남선녀가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갖춘 자들의 만남이었다.
혼인해서 남들이 그렇듯이 알콩달콩 그저 그렇게 살기만 해도 부러움을 자아내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
그 만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검왕이 검성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돌연 은거에 들어갔다. 이령도 버린 채.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고 있다.
“날 도와줄 생각은 없지?”
“지금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 이미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겠지만.”
“현음자에게 한 방 먹은 거?”
“검성주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당신은 왜 날 버렸고. 촌장은 왜 그 절곡에서 벗어나지 못 해 안달을 한 거야? 나는 또 왜 검성을 움켜쥐었지?”
“…….”
“적벽검문 사람들이 제일 불쌍해. 도대체 왜 멸문당한 거야? 녹천의 힘을 조금이라도 감쇄시키려고? 살신성인? 그래서 누가 알아준대? 멸문당한 걸 기억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검왕은 대답 없이 면사여인만 쳐다봤다.
그녀 말이 맞다. 모두 헛죽음을 했다. 모두 상대를 잘못 택했다.
그러나 적벽검문이 녹천의 힘을 절반이나 감쇄시킨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서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던 혈루마옥 무인들의 발걸음이 주춤 멈춰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일이 없었다면 중원은 벌써 혈겁에 잠겼을 것이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일 때, 현음자만 저승에서 낄낄 웃고 있었네. 현음자에게는 어떻게 복수할 거야? 이미 죽은 사람이니 또 죽일 수도 없고.”
“들어가자. 술 한 잔 줄게.”
“그 술, 독배(毒杯)지?”
“나는 네가…… 그 술을 마셔주었으면 좋겠다. 이번만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그 술을 마시면 내 죄가 모두 씻겨?”
“…….”
“그 술을 마시면 날 다시 사랑할 거야?”
“…….”
“그것 봐. 아무것도 못하잖아. 기껏해야 날 죽이지 않는 것뿐. 그런 게 협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들어가자. 술 한 잔 줄게.”
검왕이 같은 말을 두 번째 했다. 누구도 알 수 있을 만큼 잔잔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두 사람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머리 다듬으니까 보기 좋다. 예전 검왕 모습이야. 마공관에서 봤을 때는 꼭 귀신같았어.”
“넌 여전히 예뻤지.”
“그랬어?”
“그래서 화가 많이 났어. 여전히 네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그날 손속이 매웠구나.”
두 사람은 연인이라도 되는 듯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긴장도 흐르지 않았다. 호변에 놀러 온 어느 연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마공관은 어떻게 들어간 거야?”
“들어가지 못했다.”
“거짓말. 혈영마공을 사용하잖아.”
“적벽검문의 무공을 변형시킨 거야.”
“그게…… 가능해?”
“가능해. 내가 직접 해보였잖아.”
“다른 무공들은? 마공관의 마공들 중에서 몇 개를 사용한 것으로 아는데?”
“다 마찬가지야. 모두 적벽검문의 무공들이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공(功)이 정(靜)하면 무변(無變)이 외형(外形)인 것을.”
겉으로 드러난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면 겉도 변화한다. 겉모습은 사나울지라도 마음이 선하면 선한 행동이 나오는 것.
어떤 무공을 펼치느냐 하는 것은 마음의 조화다.
검왕은 마음의 조화를 외형의 변화로 바꿔서 보여줄 정도로 무공이 지고하다.
“검왕, 정말 천재네.”
“과찬.”
“아냐. 남들이 천재라고 말할 때 난 그냥 좋기만 했거든. 천재구나 하고. 정작 천재라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헌데 이제는 알겠어.”
검왕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그가 한 말은 진실이다. 거짓을 말할 바에는 말하지 않고 침묵하니까.
모두들 그가 마공관의 무공을 수련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수련하지 않았다.
“앗!”
이령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어서 고함을 내질렀다.
현음자는 적벽검문 사람들에게 마공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곳, 적벽검문만이 마공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적벽검문 무인이 마공관의 마학을 연성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음자의 안배다.
현음자는 적벽검문의 누군가가 마공관의 마학을 수련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공관을 만들었고, 검성으로 하여금 단단하게 지키도록 했다.
현음자는 왜 그런 안배를 해놓았을까?
모른다. 어쨌든 현음자는 혈루마옥을 막을 생각이 아니었다. 기련산에서 보여주었듯이 그의 모든 안배는 혈오에게 집중되었다. 혈오로 하여금 중원을 철저하게 파괴시킬 생각이다.
촌장을 중원을 지배하고자 했다.
중원 말살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중원을 굴복시켜서 발 아래 꿇리겠다는 의도다.
죽은 사람만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서 무엇하나.
물론 피에 굶주린 늑대들을 풀어놓으니 혈겁이 꽤 많이 발생할 게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혈겁은 중원을 지배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겨진다.
촌장이 구상한 혈겁은 그 정도다.
검왕이나 적벽검문, 검성주는 그 정도의 혈겁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지한 것이다.
그런데 현음자는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지금 예상하기로 혈오가 만들 중원파괴는 아주 지독할 게다. 철저하게 뿌리를 뽑지 않을까 예상된다. 물론 누미는 그럴 생각이 아니겠지만.
누미는 혈오를 모른다.
모순되게도 혈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검왕이다.
검왕은 현음자의 안배대로 움직였고, 그 효과를 혈오가 모두 가져갔다. 그러니 당연히 혈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검왕이 손꼽힐 수 있다.
두 사람의 매개체는 현음자다.
검왕과 혈오는 현음자 안배의 양쪽 극단에 서있다.
헌데……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
현음자의 안배대로라면 검왕은 마공관의 마학들을 수련했어야 한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검왕은 적벽검문의 무공으로 마학의 흉내만 냈다.
검왕이 펼친 형영마공은 그야말로 혈영마공의 정수다.
누가 그런 무공을 보고 거짓으로 흉내만 낸 것이라고 생각하겠나. 뼛속까지 혈영마공으로 물들지 않고는 펼칠 수 없는 무공인데, 어찌 거짓으로 펼치겠나.
검왕은 그 일을 해냈다.
현음자의 안배는 여기서 무너진다.
모든 것이 현음자의 안배대로 움직여 왔지만, 검왕으로 하여금 무공을 수련하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까?
이령이 검왕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 아직 사랑해?”
“사랑해.”
“정말?”
“알잖아. 사랑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
“미안. 정말 미안. 우리 오늘 정말 속 탁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지난 날에도, 앞으로도 우리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영영 없을 거잖아.”
“그래서 말한다. 여전히 사랑한다.”
“유화아와 살아.”
“…….”
“그 여자라면 평생 잘 받쳐줄 거야. 나처럼 야망이 있기를 하나, 잘났다고 뻐기기를 하나.”
“한 잔 더?”
“됐어. 취했어.”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이별의 순간을 예감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승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만나서 말할 게 없다.
“나 촌장 말 거역 못 해.”
“알아.”
“또다시 네 등에 칼을 꽂으라고 하면 꽂을 거야.”
“그렇겠지.”
“부탁인데, 그때는 날 꼭 죽여줘. 네가 날 용서하니까, 네가 날 사랑한다는 것 아니까…… 나 점점 못돼지잖아.”
“그럴게.”
“그때 나 용서하지 않았으면 검성주도 죽지 않았겠지?”
“그분은 네가 아니더라도 운명하셨을 거다. 촌장이 제일 먼저 건드릴 사람은 그분이었으니까. 자책감 같은 거 있으면 떨쳐버려. 그분의 운명은 그분의 선택이었다.”
“알아. 검성주 스스로가 아니면 누가 검성주를 죽일 수 있겠어.”
이령이 앞에 든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쭉 들이켰다.
“크으! 쓰다.”
이령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술이라는 요물은 처음에는 달다가 나중에는 써. 그만 마시라는 뜻이겠지.”
“더 마셔도 돼. 오늘만큼은. 취해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봐. 오늘만큼은 긴장을 풀어도 좋아.”
“내가 눈을 뜨기 전에 떠나겠지?”
“그럴게.”
“미리 인사해. 잘 가. 그리고 꼭 유화아와 결혼해. 그 여자, 좋은 반려자가 돼줄 거니까.”
“그럴게.”
“못됐어. 옛 연인에게 할 말이 아니잖아. 호호!”
이령이 웃었다. 웃으면서 술상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장정도 한 모금만 마시면 쓰러지고 만다는 천일취를 두 병이나 마신 후이니.
검왕은 취해서 쓰러져 자는 이령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