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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三章 종패(終牌) (1)
누강과 음사마저도 기련산을 떠났다.
기련산은 태고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람 발길이 끊긴 곳, 음모나 살인도 없는 곳,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바위가 있고 나무가 있는 곳으로.
오직 한 사람, 검왕만은 떠나지 않았다.
그는 누강과 음사를 떠나보냈을 뿐, 기련산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말은 검왕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때를 의미한다.
그는 죽었어야 한다. 촌장과 증평주를 동반자 삼아서 저승길을 거닐고 있어야 한다.
촌장을 죽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촌장의 무공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에 현음자의 절진을 이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검왕이 죽고 촌장이 사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가급적이면 동사(同死)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억울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검왕이 살아있다는 것……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촌장이 죽고 검왕만 살아남을 리도 없고…… 그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촌장과 일전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일은 결단코 벌어지지 않는다.
촌장은 반드시 이곳에 올 것이고, 그와 싸울 것이다.
기련산은 검왕의 무덤이다.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결단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달이 일어났다.
이럴 경우…… 검왕은 가기로 한 곳이 있다.
“후후! 살았는가.”
“이런 빌어먹을 일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촌장이 죽고 검왕만 살았을 리는 만무. 촌장이 살아서 기련산을 떠났군.”
음침한 괴성들이 파란 풀잎을 뒤흔들었다.
“파천황(破天荒). 파천황을 막을 수는 없었어. 사람 힘으로 천 년의 저주를 막겠다는 것은…….”
혈루마옥의 저주는 ‘천 년의 저주’라고 불린다.
혈루마옥이 실제로 천 년 동안 이어져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은 분노를 안고 살았다.
혈루마옥 사람은 한(恨)은 깊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절망감, 통한은 뿌리까지 잠식해버렸다.
그 한이 너무 깊기에 천 년의 저주라고 부른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언젠가 저주를 풀고 중원 땅을 밟게 되면 사람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공공연히 공언해 왔다. 혹여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들의 종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절곡에서 수련한 그들의 무공이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천재가 아니다. 한 마을에서 한두 명 정도 천재가 태어날 수는 있지만 마을 사람들 전체가 무공 천재로 태어날 수는 없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무공 천재들이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혈루마옥의 무공 중에는 심신을 변화시키는 공부가 있다.
이 공부는 성인에게서 태아로 전이된다. 유전적인 성향을 띠면서 끊이지 않고 지속 발전한다.
대를 이어갈수록 심신의 변화가 극심해지며, 그럴수록 무공은 고강해진다.
혈루마옥 무공의 뼈대가 되는 근본무공이 비정상적이다.
이 공부는 분명히 파란을 몰고 올 것이다.
혈루마옥이라는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는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 익숙한 환경이기 때문에. 하지만 광활한 대륙에 나오면 분명히 어떤 이상 징조를 보일 것이다.
이성적인 혈루마옥 사람들은 용인할 수 있다.
절곡에 갇힌 한이 하늘에 닿는다고 해도…… 중원인이 일부러 그들을 가둔 것도 아니고, 중원과 어울려서 살다 보면 혈루마옥 사람들도 모두 잊을 것이다.
엄청난 무공으로 압박하는 것?
무림은 항시 엄청난 무공이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무공을 능가하는 무공이 또 창안된다. 아니면 허점을 찾아서 공격할 수 있는 무공이 준비되거나.
원래 무림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다.
강한 자가 나타나서 약자를 핍박하는 일은 으레 있어 왔다.
그것은 무림인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이겨내지 못하면 문파를 접고 도태되어야 한다.
염려가 되는 것은 발작이다.
혈루마옥 무인들이 이상증세를 일으켜서 미쳐 날뛰면 그 피해는 무림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그토록 혈루마옥이 중원에 들어서는 것을 막은 것인데.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기우일 수도 있다. 정말로 혈루마옥 사람들이 무공 천재들이라서 그렇게 강할 수도 있다. 아니면 선천적으로 근골을 세신했거나.
그렇다면 그들을 막으려고 한 적벽검문이나 유지자문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 된다. 혈루마옥이 선이고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이 악이 된다.
그들은 그런 각오를 하고 혈루마옥을 막아선 것이다.
허나…… 검왕이 살아있다면 촌장도 살아있다는 뜻, 그리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 혈루마옥을 막아설 방법이 없다.
“어떻게 죽지 않고 산 것인가?”
검왕이 다가서기 무섭게 물었다.
“중원을 파괴할 생각입니다.”
검왕의 첫마디였다.
“섬서는 내가 맡지.”
“난 호북(湖北).”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이 맡을 지역을 정했다.
어찌 보면 미친놈들이 헛소리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당사자들이 유지자문 고수들이라면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유지자문 고수 일곱 명.
그들은 혈루마옥 고수들에게 빚이 있다. 먼저 간 친구의 원한을 달래줘야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달래줄 방도가 없다.
유지자문 고수들은 증평주도 아닌 그녀의 제자에게 당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당했다.
유지자문은 혈루마옥 앞에 나서지 못한다. 당분간은.
그런 점은 적벽검문 역시 마찬가지다. 적벽검문 모두가 혈루마옥에게 당했다. 멸문했다. 가식으로 멸문을 자청할 문파가 있는가. 그것은 진짜 멸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검왕이다.
검왕의 무공은 급속도로 신장했다.
그는 마공관에 들기 전만 해도 십마와 비슷한 정도였다. 검성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 무인이기는 했지만 천하제일이라거나 초절정고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마공관을 섭렵한 후로 십마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다뤘다.
마공관을 벗어나서는 혈루마옥과 맞섰다.
그는 유지자문 고수들과도 비슷했다. 허나 지금은 훨씬 앞서 나간다. 유지자문 고수들도 증평에게 당했는데, 검왕은 증평주를 사로잡기까지 했다. 비록 반초 차이라고는 하지만.
검왕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자넨 어디로 갈 건가?”
“검성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 여우…… 이령에게 말인가?”
“네.”
“이령을…… 휴우! 말을 말지.”
계속 묻던 자가 말을 중간에서 그쳤다.
검왕은 이령을 죽이지 못한다. 그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검성이 혈루마옥 편에서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이령을 통제해야만 한다.
검왕에게 숙제가 남겨져 있다.
“보름 안에 무림을 죽여 주셔야 합니다.”
“후후후!”
유지자문 일곱 고수는 옅은 웃음으로 할 말을 대신했다.
“이령을 죽이는 게 어때?”
“…….”
“죽이고 싶은데.”
“…….”
“왜 말이 없어? 아직도 그 여자에게 미련이 남은 거야?”
“…….”
“성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
“조용히 좀 해라.”
검왕이 투박스럽게 말했다.
“죽이자. 죽이는 게 깨끗해.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할 수도 있어. 네 생각을 해서 편하게 보내줄게.”
“몇 명이나 돼?”
“응?”
“모두 말이야.”
검왕이 어둠 속을 훑어보며 말했다.
유지자문 고수들이 떠난 자리에 그들이 찾아왔다. 아니, 그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유지자문 고수들도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들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한 예비 무인들이다.
“한 백 명쯤. 사람만 많아.”
“후후후!”
검왕이 웃었다.
일령은 검성주의 직속 수하 중에서도 가장 유능한 수하다. 웬만한 일에는 나서지도 않는…… 중원이 지금처럼 극단으로 치달을 때만 나서는 인재 중의 인재다.
그가 키운 수하들이니 어련하랴.
검왕이 서신을 내밀었다.
“내가 검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리해줘.”
“마군?”
일령이 되물으며 서신을 받아서 펼쳤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서신을 봤다.
“이 사람들은?”
“이령의 수족들이야.”
“알지. 알아.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속에 마군이 없다는 거야. 마군의 졸개들도 그렇고.”
“마군은 무인이야.”
검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일령은 그 말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이지. 후후!”
마인일지라도 무인이면 같이 움직일 수 있다.
무인이 무엇인가? 욕심이 없는 자를 뜻한다. 아니, 욕심은 있다. 그것도 아주 많다. 인간이 지닌 모든 욕심을 하나의 욕심, 오직 무공에만 던진 사람을 말한다.
무공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하고도 기꺼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무인이다.
마군이 그런 자다.
마군은 이령의 휘하에 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싸우지 못한다. 마치 개줄에 목이 감긴 개처럼. 하지만 그 목줄을 풀어놓기만 하면 거침없이 싸울 사람이다.
마군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일령도 잘 안다.
“하기는…… 정리하기는 좀 아까운 사람이지. 그런데 이령은? 설득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두고두고 후환이 될 여자야. 그건 알지?”
“…….”
“네가 죽일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러니 내가 할게. 그게 깨끗해.”
검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왕과 일령마저 떠난 기련산……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개미가 움직인다. 벌떼가 웅웅거리면서 날아다닌다.
개미와 벌떼는 작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안으로…… 계속 들어간다.
그리고 얼마 후, 산봉까지 휘몰아치던 돌풍이 잠잠해졌다.
철삭으로 만든 다리를 끊어버린 돌풍이다. 회오리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헌데 고요해졌다.
기련산 절곡에는 어떤 바람도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포근하기만 하다. 철석이 끊어졌던 자리에도 따뜻한 햇볕만 내리쬔다. 간혹 부드러운 바람이 밀려온다.
“맞네요. 기진이 사라졌어요.”
“현음자. 현음자가 살아있군.”
촌장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음자가 살아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의 진전을 이어받은 누군가가 기진을 조정했다.
기진은 사라지고 없다.
저절로 사라졌을 리는 없고, 누군가가 기진을 거둬들인 게 분명하다.
그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나? 모두가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돌풍을 거둔 것으로 보아서는 모두를 주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산정에 있다.
물론 지금 산정으로 달려가 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속셈만 발각된다.
지금은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고 조용히 물러서는 게 바람직하다.
“정말 서장으로 갈 생각이세요?”
증평주가 물었다.
“가야지. 그건 검왕과의 약속이니까.”
“혈루마옥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거예요. 그 일로 인해서. 어쩌면 중원 진출이 좌절될 수도 있고요.”
“그다음은 내가 하면 된다. 혈오가 끝난 다음에. 무공. 난 무공으로 중원을 정복할 생각이야. 간특한 생각이나 이상한 주문 같은 것이 아니라.”
촌장이 혈오를 빗대서 말했다.
그들은 절곡이 잠잠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