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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二章 배신(背信) (1)
한 여인이 검을 축 늘어트린 채 고요히 서 있다.
그녀는 눈을 감은 듯 만 듯 반개한 채 조용히 검 끝만 쳐다본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스러움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는 잘 다듬어 놓은 조각상이다.
아름답다!
그녀를 본 첫 느낌은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척 많다.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뚜렷하고,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고, 차지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탄력 있고…….
그 많은 미녀들 중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사람은 제각각 개성이 있고, 그 개성에 미모가 보태져서 자신만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울리기도 하고 반응이 없기도 한다.
여인은 정말 아름답다.
‘굉장하다!’
달리 어떤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에 그저 굉장하다는 느낌만 계속 일어난다.
“저 여자가 유화아구나. 소문대로 예쁘네.”
화천은 누미의 음성을 듣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유화아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었는데, 참 좋았는데…… 도원경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서 언짢았다. 아니, 자신의 행동이 누미에게 발각된 것 같아서 민망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냐.’
화천은 곧 정색을 했다.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할 ‘때’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하게 지금은 누미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미는 예쁘다. 너무 예쁘다. 그래서 한눈에 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질린다.
“내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데…….”
화천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누미가 자신을 능가할 것이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기에.
헌데 지금……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일어났다.
유화아의 고요한 모습, 검을 쳐다보는 무상의 눈길, 자신조차도 잊어버린 듯한 검세.
유화아는 궁극의 검도를 깨우쳤다.
어찌 된 일인가. 근래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화아가 저런 식으로 변했나.
수하들의 보고를 받았을 때는 ‘한심한 놈들!’이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그렇지 않다. 수하들의 보고가 정확했다. 음악오귀와 유화아를 제거하려면 적어도 서른 명 이상은 희생되어야 한다. 그때,
“으아앙!”
느닷없이 낮잠을 자고 있던 혈오가 울음을 터트렸다. 큰 울음은 아니고 약간 칭얼대는 정도.
“호호호!”
누미가 요악한 웃음을 그려냈다.
저 웃음…… 저 웃음 뒤에는 계산이 깔려 있다. 자신의 계산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일치할 때, 그녀는 요귀도 홀릴 듯한 웃음을 흘린다.
‘혈오를 데려온 이유가……?’
화천은 혈오를 쳐다봤다.
혈오는 약간 칭얼댔을 뿐, 곧 다시 잠속에 파묻혔다. 누미 품에 안겨서.
평소, 누미는 혈오를 안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만질 때는 특정한 목적이 있을 때뿐이다.
지금이 그런 때다.
그녀가 혈오를 안고 있다. 안아주는 일이라면 질색을 하던 그녀가 숙소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걸어오는 험한 길을 걸어왔다. 아이를 안고서.
그리고 예의 그 웃음을 흘렸다.
누미가 말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어?”
“없지.”
“없는데 변했잖아.”
그녀가 음악오귀와 유화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때는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 바로 쥐약을 먹었다는 거지. 죽을 줄 모르고 말이야.”
“독단을?”
“여긴 쥐약 천지인데, 아무것도 못 느끼나 봐?”
누미가 다시 요악한 웃음을 흘렸다.
화천은 은밀히 진기를 이끌어 전신에 유포시켰다. 그리고 이끌어진 진기를 이용해서 감각을 초고도로 일깨웠다.
츠으으으읏!
감각이 주위를 훑는다.
이상한 냄새를 찾는다. 이질적인 촉감도 찾는다. 나무는 나무 같아야 하는데, 물컹거린다거나 끈끈하다거나…… 누미가 말한 ‘쥐약’에 해당할 만한 부분을 찾는다. 그러다 문득!
“큭!”
화천은 급체에 걸린 듯 큰기침을 토해내면서 뒤로 쑥 물러섰다.
“이제 알았네?”
“이거 뭐야?”
“저들을 이렇게 만든 쥐약.”
“이거 어디서 흘러나오는 거지?”
“땅.”
“땅?”
화천은 즉시 눈길을 땅으로 쏟아 부었다.
촤아아아악!
땅을 훑는다. 땅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는다. 무엇인지 모를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 기의 원천을 찾아본다. 이런 식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미가 흔들림 없이 태연한 안색으로 말했다.
“이 쥐약은 모두에게 상극이야. 괜히 힘이 빠지게 만들어. 헌데 희한한 것은 저들에게는 보약이 된단 말이지. 마치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마신천강기, 투살진기!”
“그 두 무공이 이 땅에 적합해.”
“마신천강기나 투살진기를 수련한 사람이 있나!”
화천이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수련은 하지 않았지만 연구는 한 적이 있습니다.”
혈루마옥 무인들 중에 한 명이 나섰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 두 무공은 이 땅에서 최상의 정화를 꽃 피울 수 있습니다.”
“무공의 성격이 뭔가?”
“마신천강기는 둔(鈍)으로 요약할 수 있고, 투살진기는 상(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둔상?”
화천은 둔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느낌을 잡았다.
둔과 상은 전혀 무관하다. 굳이 글자 풀이를 하자면 둔과 상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지녔다. 마신천강기가 방어요 투살진기가 공격인 것처럼.
무딜 둔, 빙빙 돌아 날 상.
둔상이라는 말을 듣는 불현듯 일어난 생각은 느림과 여유다.
바쁘게 설치지 않고 천천히 여유 있게, 무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날개를 펴고 바람을 쫓아 하늘을 날아가는 것도 인위적인 몸짓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렇군.”
화천이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음악오귀와 유화아를 쳐다봤다.
파해 방법을 찾아냈다.
혈오가 제일 먼저 이 땅의 성격을 알아냈고, 그다음으로 누미가 눈치챘고, 그는 마신천강기와 투살진기의 요체를 전해 들은 후에야 깨달았다.
어쨌든 깨달은 것은 깨달은 것…….
슷!
화천은 음악일귀에게 검을 쳐냈다.
그가 쳐낸 검은 너무 느려서 누구를 살상하기 위한 검이라고 볼 수 없다. 힘도 깃들어 있지 않다. 그저 친구 간에 장난삼아서 검으로 가슴을 툭 건드리는 듯한 힘과 속도밖에 깃들어 있지 않다.
스으으읏!
일귀는 당연히 반응했다.
장난삼아 내뻗은 검일지언정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쒜엑!
일귀가 대도를 쳐내서 화천을 검을 맞받아갔다. 헌데 그 순간, 화천은 이미 뒤로 물러선 후였다.
일귀도 대도를 내렸다.
슈웃!
삼귀는 헛손질 삼아 창을 들어 올렸다.
화천은 일귀에 이어서 이귀를 건드리더니 그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다. 역시 장난삼아서.
화천은 마치 음악오귀를 놀리는 듯한 표정까지 짓는다.
스읏!
삼귀가 내지른 창에는 힘이 담겨 있지 않다. 어차피 화천은 물러설 것이므로. 하지만 무심히 창을 뻗을 수는 없기 때문에 마신천강기는 실었다.
마신천강기는 한시도 운용을 멈춰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멈추면 다른 네 명이 일으킨 진기조차도 무용지물이 된다. 뒤에 버티고 서있는 유화아도 갈 길을 잃는다. 여섯 명의 연수합격이 무너진다.
스읏!
화천이 창을 상대하지 않고 물러섰다.
화천은 계속해서 다섯 명을 건드렸다.
이런 행동은 일면 음악오귀의 진기를 소모시키는 소모전 같지만…… 실은 진기 소모는 화천이 훨씬 심각하다. 음악오귀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응하면 되지만, 화천은 계속해서 진기를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화천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음악오귀가 심심하다 못해서 와르르 달려들어 끝장내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그 순간을 노리려고? 일격에 와해시키려고?
슈웃!
화천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계속했다.
‘으음!’
유화아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그녀는 미미한 진동을 느꼈다. 단단히 일체화되었던 제방에 조금씩 금이 간다. 마신천강기와 투살진기는 일체였다. 헌데 지금 금이 가고 있다.
쿵!
진동이 일어난다.
화천이 움직이고, 음악오귀가 그에 대응하고…… 당연히 마신천강기가 운용된다. 대응은 한 사람이 하고 있지만 음악오귀 모두가 한 마음으로 화천을 쳐다본다.
음악오귀는 일체가 되어서 화천을 쳐다본다.
그녀는 마신천강기 뒤를 이어서 투살진기를 쏘아내어야 한다. 먼저 마신천강기가 운용되었다면 그다음은 투살진기가 움직일 차례인 것이다.
마신천강기는 운용되고 있지만 투살진기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 차이는 별것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신천강기가 방어만 하고 투살진기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싸움은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결코 이상한 공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진동이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니 서서히 균열이 일어난다.
마신천강기와 투살진기가 별개로 쪼개지고 있다.
이 땅의 힘은 그들이 움직였을 때 일어난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물론 일어난다. 뭉쳐 있을 때도 일어나고 별개로 흩어졌을 때도 일어난다.
문제는 최상의 힘이다.
마신천강기와 투살진기가 하나로 합일되고, 이 땅의 힘까지 보태졌을 때, 혈루마옥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한 시진? 두 시진? 그때쯤이면 확실히 균열이 생겨.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돼.’
유화아가 반개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
“검에 찔려주세요. 저자의 검세를 보면 찔려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음 누구 차례죠?”
“끄응!”
음악오귀가 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음악오귀의 병기는 활이다.
음악사귀와 오귀는 화천의 공격을 강철 화살로 쳐내고 있었다.
슈웃!
화천이 검을 찔러온다.
음악오귀는 화살을 들어서 막고 싶었다. 막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어떤 놈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검을 막지 않고 맞겠는가. 하지만 유화아가 찔려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음악오귀는 대응하지 않았다.
슈우우우웃!
검이 다가온다. 그럴수록 마신천강기도 굳건해진다. 헌데 뒤에서 유화가 그마저도 풀라고 말한다.
“진기를 푸세요.”
“끄응!”
“지금 당장!”
“에라! 차라리 날 죽여라!”
음악오귀는 진기를 확 풀어버렸다.
진기를 끌어올린 상태로 검을 맞는 것과 완벽하게 풀어버린 상태에서 맞는 것은 상처 자체가 달라진다.
부상이 훨씬 심해질 수 있다.
음악오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때,
쒯!
음악오귀의 귓가로 칼바람 소리가 일었다.
유화아다. 그녀가 뒤에서 검을 쳐냈다. 굳이 그녀가 나서지 않아도 될 가벼운 사안에 투살진기를 있는 힘껏 쏟아냈다.
스읏!
당연한 말이지만 화천은 검이 다가오기 전에 훌쩍 물러섰다.
괜히 유화아만 헛손질을, 그것도 있는 힘껏 내지른 꼴이 되고 말았다.
허나 이 순간, 유화아는 웃었다.
“휴우! 이제 균형이 갖춰졌어.”
반면에 화천은 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파해를 막아냈군. 균열을…… 보완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