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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一章 불가해(不可解) (2)
증평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멀쩡한 몸으로 깨어났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촌장도, 검왕도, 마군도 보이지 않는다.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위도 아래도 절벽이다.
몸을 지탱해주는 것은 넝쿨이다. 자연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성된 그물 넝쿨……
잠깐 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엉뚱한 세상에 와 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작은 바윗돌로 꽉 막힌 벼랑뿐이다.
‘이것은!’
그녀는 작고 날카로운 바위돌을 만졌다.
벼랑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녀가 만진 바위는 방금 채석장에서 가져온 듯 날카롭다. 그런 작은 바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이곳으로 움직였어.’
그녀는 작은 바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헌데,
츠읏! 츠으읏! 츠으읏!
갑자기 등 뒤에서 뱀이 기어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아니, 온몸으로 감지했다.
“웃!”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봤다. 마치 기습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습은 없다.
그녀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은 오직 바람뿐이다.
‘분명히 기습이었어.’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벼랑 한 가운데, 텅 빈 공간에서 그녀를 기습하려면 적어도 날개를 달고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없다. 줄을 타고 내려오는 자도 없다.
그녀는 다시 무너진 바위들을 살피기 위해서 돌아섰다. 헌데!
츠읏! 츠으으으읏!
이번에도 역시 기습이 감지된다.
누군가가 지극히 은밀하게 다가서고 있다. 움직임이 너무 은밀해서 탐지하는 것도 곤란하다. 더욱 웃긴 것은…… 기습이 이십여 장 밖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십여 장 밖이라면 텅 빈 허공이다.
넝쿨이 붙어 있는 곳도 아니고,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허공 한복판에서 기습이 시작되고 있다.
‘뭐냐!’
그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움직임을 살폈다.
츠읏! 츠읏! 츠츠츳!
뚜렷하게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압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가만히…… 상대를 격동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등 뒤로 집중하며 은근히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헉!”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지르고 말았다.
정신을 잃었다가 금방 깨어난 후에 벌어진 일이라서 뭐가 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안 것은, 방금 깨달은 것은…… 진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운공을 할 수가 없다.
‘아!’
그녀는 그 이유를 즉각 깨달았다.
그녀는 검왕과 촌장의 진기를 한 몸으로 상대했다. 어중간한 상태에서 끼어들었다가 양쪽에서 격타당했다.
진기가 산산조각 났을 게다.
아니? 그렇다면 자신 역시 살아있을 수 없는데? 지금 죽어 있는 것이 마땅한데?
진기만 산산조각 나고 그녀는 살아있다.
그녀는 가부좌를 풀지 않고 끈기 있게 진기를 끌어모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안다. 자신이 진기를 끌어모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도 그것뿐이다. 진기를 모으지 못한다면…… 절벽 한복판에 만들어진 넝쿨 그물조차도 벗어나지 못한다.
츠츠츠츠! 츠츠츳!
무엇인가가 계속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진기를 모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십 장 밖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지?
그녀는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해봤자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순응하고 받아들인다.
츠츠츠츳!
이십 장 밖에서 일어나는 듯하던 움직임이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그녀를 덮쳤다.
기이이잉!
움직임이 몸속을 파고들더니 이내 경맥을 휘젓는다.
그녀는 의념을 모아서 움직임을 뒤쫓았다. 한 군데, 한 군데…… 움직임이 있는 곳을 감지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움직임은 그녀의 무공을 현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 이 움직임, 이 느낌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가 운기하던 경맥을 그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으음!’
그녀는 침음을 흘리면서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움직임이 기혈을 따라서 움직인다. 평소에 그녀가 운기하던 경맥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녀는 진기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맥 안으로 흘려보낼 진기도 없다. 미약한 진기는 흐르고 있겠지만, 그녀가 의식할 수는 없다.
헌데 이렇듯 어떤 움직임이 경맥을 움직이니, 그녀의 눈길도 자연히 따라간다.
그녀는 경맥을 보았다.
움직임이 있는 곳에 자신의 의념이 있다.
차츰차츰, 한 올 한 올 진기가 보인다.
그녀는 가뭄에 이슬방울을 끌어모으듯 진기를 모아들였다. 움직임이 있는 곳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경맥 속에 들어있는 미약한 진기들을 거둬들였다.
그녀의 단전에서 생명의 기운이 도약하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그녀의 것인가? 아니다. 그녀가 진기를 응축시키기 시작하자, 움직임은 조용히 그녀의 몸을 떠나 이십 장 밖 텅 빈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움직임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헌데 그 움직임은 자신의 무공을 환히 꿰뚫고 있다. 자신이 진기를 움직인 것보다도 더 정확하게 움직였다. 모든 경맥을 샅샅이 누벼나갔다.
신기(神氣)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기운이다.
그녀는 움직임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도 계속해서 운공에 열중했다.
쩍쩍 갈라진 논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 물…… 계속해서 퍼내야 한다. 끌어모아야 한다. 자칫하면 갈라진 논밭 사이로 흘러가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또 다시 운기를 못하는 몸이 될 게다.
츠으으읏!
그녀는 꽉 잡은 진기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증평주의 눈길이 어둠 속을 향했다.
어둠 저 편……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거대한 산 속의 한 곳일 뿐이다.
그곳에 그녀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있다.
그녀가 느꼈던 기운은 저 먼 곳에서 흘러왔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후,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그게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반드시 알고 싶다.
허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녀는 무너진 바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투두두둑!
바위들이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바윗돌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어둠을 깨운다. 정적을 뒤흔든다. 자고 있던 사람들을 깨운다.
이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깨어날 게다.
무슨 소리지?
그녀는 무너진 바위돌을 간신히 치웠다. 전부 치울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녀 몸뚱이 하나만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됐지.’
그녀는 개구멍처럼 뻥 뚫린 공간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저쪽 끝까지 바윗돌을 치워냈다고 생각하는데…… 가다가 중간에 막혔을 수도 있다. 허면 또 치워야 한다. 치울 수 없으면 처음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길을 열어야 하고.
첫 술에 만족하랴. 이번 길은 반드시 되돌아나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첫 걸음이 열 걸음이 될 터이니…… 자꾸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터이고.
* * *
“들었나?”
“들었습니다.”
“허허허! 내가 뭐라고 했나. 난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촌장의 말에 검왕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검왕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길게 늘어진 흑발 사이로 눈동자가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망진이라. 허허! 정말 망진이 될 뻔했는데.”
마군은 촌장의 말을 들으면서 슬그머니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가로막아 섰다. 혹여 검왕이 탈출구를 막아버릴 것 같아서.
지금 마군의 몸으로는 검왕을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일초라도 막아야 한다는 심정에서 길을 막았다.
검왕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증평주군요.”
“요행이 겹쳤어. 원래를 마군이 증평주를 업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지. 둘째, 증평주는 무공을 쓰지 못해. 헌데 저 움직임은…….”
촌장이 귀를 귀울여 바깥 소리를 들었다.
퍽! 퍽퍽퍽! 퍽!
바윗돌을 치우면서 다가오는 소리가 무척 빠르다.
무공을 모르는 여인의 움직임이 아니다. 무공을 모른다면 적어도 맨손으로 황소를 쓰러트릴 수 있는 거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저 정도 속도를 낸다.
“증평주가 어떻게 무공을 회복했을까?”
촌장이 검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검왕의 흔들리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망진이라는 말을 취소해야겠군요. 활로가 생겼다는 점, 인정합니다. 그럼 이것은 어찌하시렵니까?”
스릉!
검왕이 검을 뽑았다.
촌장과 마군은 혈이 점혈되어 있다. 검왕이 검을 사용하면 막을 방도가…… 검왕은 검을 뽑다 말고 피식 웃었다.
“혈을 푸셨습니까?”
촌장은 대답 대신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였다.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망진 속에 갇힌 사람은 검왕이다. 더군다나 검왕은 자신의 무공을 백지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촌장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끝은 조금 있다가 보도록 하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파팟! 파앗!
촌장과 검왕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렇다.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망진이 누구에게 해당되는지는 아직 결판나지 않았다. 증평주가 이곳까지 길을 뚫지 않는 한, 아직 산 것이 아니다.
검왕은 절벽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검왕이 증평주를 압사시켜버린다면 이곳은 여전히 망진이 된다. 반면에 바깥 공기가 한 올이라도 스며든다면 검왕의 패배가 되어 버린다.
검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절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대책이 없는 듯이. 현음자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하기는 누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겠는가.
촌장이 은근히 검왕의 앞으로 가로막은 채 구멍이 뚫리기를 기다렸다. 검왕은 앉은 자리에서 불길이 완전히 사라져 가기를 기다렸다. 공기가 완전히 소진되기를.
파르르륵!
모닥불이 꺼질 듯이 미약해져간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편하게 숨을 쉬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호흡 곤란을 느낄 것이다.
그 전까지 증평주가 들어설 수 있을까?
구르릉! 텅!
바윗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 여인의 얼굴이 안으로 쑥 들어섰다.
파라라라락!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생명을 잃어가던 모닥불이 다시 세차게 타오른다.
증평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 촌장님!”
그녀는 촌장을 보고 반갑게 반색했다.
촌장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검왕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혹여 검왕이 어떤 짓을 또 할까봐.
현음자…… 현음자가 만들었다는 것, 이제는 두려워진다.
촌장이 말했다.
“자네의 태연함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
“…….”
“현음자가 기관이 아직도 남아있는가?”
“없습니다.”
“무공으로 날 꺾을 수는 없을 것 같고…… 태연하게 앉아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휴우!”
검왕이 탄식부터 불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현음자…… 후후! 현음자라는 사람…… 이 사람, 마중마(魔中魔)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노린 것, 처음부터 철저한 중원파괴이니. 그리고 우리는 완벽하게 걸려들었고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검왕이 고개를 푹 떨구면서 말했다.
“중원이 완전히 파괴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