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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九章 지멸(地滅) (5)
쏴아아아아!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스쳐 간다.
바람은 부력(浮力)으로 변해서 등을 떠받친다. 텅텅 비어있는 허공 속에 혼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푸왁!
입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뿜어진 핏줄기는 허공에서 비산했다. 마치 붉은 꽃잎처럼, 붉은 이슬방울처럼.
핏줄기를 내뱉을 때 혼도 함께 빠져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등을 떠받치는 부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귓가로 흐르는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의식이 점점 멀어져간다. 까마득해진다.
증평주의 일격은 무시해도 좋다. 문제는 증평주의 일격을 맞받기 위해서는 촌장의 무기 앞에 자신을 완벽하게 노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발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뒤는 철벽으로 막힌다.
두 독물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걸을 때처럼 독물들의 성질을 북돋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촌장과 무기를 겨룰 수밖에 없었고, 촌장이 심어놓은 마성에 시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모든 일들이 외통수였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촌장도 혈갈잔봉과 시부독의에게는 쩔쩔매는 모습을 봤다.
퇴로가 끊긴 이상 저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촌장의 내력에 한계가 없다면 몰라도 인간인 이상, 한계를 지닌 인간인 이상 곧 무기가 바닥날 게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미진함을 느낀다.
현음자라면 이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함정을 설치할 수 있었을 텐데…… 강풍으로 철교를 끊고, 절대 독물들이 대를 이어서 생존하게 만든 것으로 모든 안배가 끝난 것일까?
현음자의 안배라고 보기에는 너무 싱겁다.
허나…… 이제는 그런 생각도 멀어져 간다. 머릿속이 텅 비면서 그저 바람 소리만 울린다.
쉬이이익! 파라라락!
절곡에서 휘몰아치는 강풍에 옷자락이 펄럭인다. 몸이 밑으로 떨어지다가 다시 위로 들쳐진다.
그는 꼼짝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는 손가락이라도 꼼짝거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기에는 힘이 없다. 너무 무기력하다. 정말로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쉬이이이익!
그는 떨어지는 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턱! 출렁!
갑자기 떨어지던 육신이 뚝 멈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 뒤쪽으로 은은한 통증이 울리는 가운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되퉁겨졌다.
넝쿨 같은 것에 걸린 듯하다.
‘질긴 목숨…….’
그는 한순간, 자신이 요행히 자연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헌데 아니다.
출렁!
되퉁겼다가 다시 떨어진 몸이 거대한 그물에 휘감겼다.
그물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듯 몹시 낡았다. 하지만 굵기가 어른 팔뚝만 해서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듯싶다.
그는 굵은 밧줄로 만든 그물 위에 떨어졌다.
‘현음자!’
퍼뜩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절곡 밑에 동아줄로 그물을 만들어 놓은 사람은 현음자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현음자는 오늘과 같은 상황을 예상했던 듯하고.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어쨌든 그는 그물에 걸렸다. 밑에서는 계속 강풍이 몰아치지만 그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더 이상 떨어지지도 않는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물을 따라서 이리저리 휘청이면서…… 잠이 들었다.
툭!
얼굴에 차디찬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퍼뜩 차렸다. 순간,
출렁!
그가 움직이자 그물도 움직인다.
그는 잠시 그물을 움켜잡고 혼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그리고 절벽 위를 쳐다봤다.
절벽 위, 정상 부근에는 새까만 구름이 뒤덮여 있다.
혈갈잔봉이 아직도 정상을 에워싸고 있다.
까만 구름이 난폭하게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도 촌장의 무기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는 벌떡 그물 위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치민다. 가슴도 숨이 막힐 듯이 답답해진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전조증상이다.
순간, 그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난기(亂氣)를 다스리지 않고 이대로 놓아두면 틀림없이 주화입마가 찾아온다.
아마도 촌장에게 얻어맞은 일격이 치명타로 작용한 것 같다.
그렇다고 난기를 다스리기 위해서 운기를 하면 한계까지 치솟은 마성이 발작한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魔)로 들어선다.
“으음!”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운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평생 무공을 펼치지 않고 살아갈 심산이라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고 무림에서 살 생각이라면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그물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츠으으읏!
단전에 응축된 기운을 풀어낸다.
“허! 허허! 허허허!”
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연인가, 안배인가, 재주인가.”
뒤이어 새어 나온 말이다.
촌장의 눈길은 절곡 아래로 향했다. 절곡 밑을 쳐다보면서 탄식을 불어낸다.
‘살았어! 놈이!’
마군은 촌장의 말과 행동에서 숨은 뜻을 찾아냈다.
촌장은 검왕의 기운을 감지했다. 검왕의 기운과 직접 부딪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감응이 빠르다.
촌장은 지금 검왕의 기운을 읽고 있다.
검왕이 살았다.
증평주의 일격을 받아냈고, 촌장의 일격까지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거기에 마성까지 휩싸였다.
검왕이 살아난다는 것은 기적과 다를 바 없다.
헌데 검왕이 그 일을 해냈다. 모두가 그가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잊고 있었는데 살아났다.
‘운이 좋은 것인가, 실력인가.’
마군도 촌장이 했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했다.
“현음자일 것 같지?”
촌장이 마군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네.”
마군은 부지불식간 대답했다.
십마는 혈루마옥을 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결코 존대를 하지 않는다. 헌데 그는 한다. 적이니 아군이니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촌장이 물으니 대답한 것인데, 자신도 모르게 존대가 되어서 튀어나온다.
“허허허! 이번 행보에는 득은 없고 실만 가득하군. 증평주를 잃었고, 검왕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줬고…… 검왕, 다음에 날 보면 사부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
“허허허!”
촌장이 웃었다.
증평주는 아직도 기식이 엄연하다. 정신을 잃고 한 밤을 보냈지만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다.
깨어나도 증평주는 무인 몫을 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검왕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한층 더 강해진 것 같다.
지금도 강한데 다음에 만나면 얼마나 강해졌을까?
‘난 일초지적도 안 되겠군.’
그런 생각을 하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려왔다.
촌장이 말했다.
“저 애를 업지.”
증평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촌장은 늙어 보이지 않는다. 아주 건장한 중년인이다. 기껏해야 마흔을 갓 넘은 것 같다. 그런데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증평주를 ‘저 애’라고 부른다.
마군은 증평주를 등에 업었다. 순간,
쉬익!
마군이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촌장이 쾌속하게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엇!”
마군이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촌장의 행동을 말리려는 것인데…… 이 역시 본능적인 손짓이다.
촌장은 이미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마군도 촌장의 생각을 읽는다.
촌장은 절벽 밑에서 뻗어오는 검왕의 기운을 감응해냈다.
촌장은 자신과 검왕과의 거리를 계산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절벽 밑으로 뛰어내려도 안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게다.
촌장은 그에게 증평주를 업으라고 했다.
촌장 자신이 업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하다는 뜻이다. 단지 추측뿐이라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촌장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차피 퇴로도 끊겼으니.”
쉬잇!
마군도 촌장을 따라서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렸다.
현음자는 기린산 절봉에 어떤 기관진식을 심어놨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현음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진식을 펼쳤을까?
그가 기린산 절봉을 알게 된 것은 마공관 마서를 통해서이다. 그곳에 단지 한 줄로 기린산 기관진식이 설명되어 있었다.
단 한 줄.
기린산에 사지(死地)가 있다는 글귀다.
어떤 절대고수도 빠져나오지 못할 절대 사지라고 한다.
혈갈잔봉, 시부독의…… 사실 그런 독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독물들을 피하게 된 것도 임기응변이고, 독물들의 마성을 건드린 것도 즉시즉행이다.
눈 앞에 부딪히는 대로 뚫고 나갔을 뿐이다.
그래서 현음자의 안배가 너무 허술하다고 느낀다. 마공관 마서에 절대사지라고 표현했다면 그럴만한 위험이 몰아쳤어야 하는데, 너무 싱겁다.
쉬이이이잇!
머리 위에서 산뜻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 눈을 뜬 것과 동시에 신형을 쏘아내 앞으로 치달렸다.
그물이 휘청거린다.
머리 위에서 느낀 기운은 촌장의 것이다.
촌장이 다가오고 있다. 촌장이 자신의 기운을 감지해냈고, 지체 없이 뛰어내린 것 같다.
그것 봐라. 현음자의 절대사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가.
그물이 쳐져 있는 곳에는 동굴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물을 쳐놓고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하산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절벽 밑이 까마득하게 보이는데.
그물로 떨어지는 사람을 받는다. 그물에 떨어진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게 굴을 파놓는다.
당연한 수순이다. 헌데,
“웃!”
그는 동굴 안으로 급히 쏘아져 들어가려다가 두 발이 묶인 듯 우뚝 멈춰 섰다.
“으…….”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두 주먹만 꽉 움켜잡았다.
시커먼 동굴!
안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서 음험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동굴은 생로가 아니다. 사로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저곳으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죽는다. 현음자가 말한 죽음의 사지는 절봉이 아니라 바로 저곳이다.
절봉에서 뛰어내려 그물에 올라서는 것은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현음자가 안배한 대로 죽음의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가는 것일 뿐이다.
쉬이이잇!
촌장의 기운이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보인다. 촌장이 새라도 된 듯이 훨훨 날아오고 있다. 두 팔을 쫙 벌리고 자신을 쏘아보면서.
촌장 뒤로 마군도 보인다.
자신이 저들을 봤으니 저들도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그물도 봤을 것이고.
그는 씩 웃었다.
“어차피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으음!”
촌장은 동굴을 보면서 신음했다.
동굴…… 시커먼 동굴…… 정녕 들어가기 싫은 동굴!
촌장은 그물 밑을 쳐다봤다.
동굴을 피해서 빠져나갈 길은 없을까?
없다. 길은 완벽하게 끊어졌다. 밑으로 뛰어내리면 분신쇄골 당한다. 더욱이 머리 위쪽에서는 혈갈잔봉이 날아오고 있다. 시부독의도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시부독의가 그물에 이르면 당장 갉아먹을 것이다.
이제 방법은 없다. 벌써 안으로 뛰쳐들어간 검왕을 쫓아서 동굴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촌장이 말했다.
“지금부터 상대는 현음자다. 정신 바짝 차리고.”
“알겠습니다.”
“힘들면……버려도 좋다.”
마군이 등에 업고 있는 증평주를 일컫는 게다.
마군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하겠습니다.”
쉬잇! 쉬이잇!
두 사람은 음험한 기운이 풀풀 피어나는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