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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九章 지멸(地滅) (3)
툭! 투투툭!
실 끊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단단하게 묶어 놓았던 끈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하나, 둘…… 투투둑! 떨어져 나간다.
‘으음!’
검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촌장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천지가 개벽해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촌장은 그의 경지를 훨씬 전에 넘어섰다.
당대제일을 넘어서서 고금제일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귀재가 촌장이다.
뛰어난 무인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고금제일, 당대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단순한 노력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그때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늘이 내린 기재!
말이 필요 없다. 하늘이 재능을 부여한 기재가 아니고서는 당대 제일이 될 수 없다.
촌장은 그런 사람이다.
검왕도 하늘이 내린 기재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촌장에게는 비할 수 없다. 태양 곁에 반딧불이 선 격이다. 바다와 시냇물의 차이다.
투툭! 툭!
실이 계속해서 끊어진다.
상처를 꿰매놓은 실밥처럼, 마성을 봉인시켜 놓은 기단(氣鍛)이 끊어지고 있다.
검왕은 최대한으로 기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후후!”
촌장이 웃었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검왕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직까지는 안간힘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노력도 잠시만 지나면 끝날 것이다. 저항이 사라지고, 오직 마성만 춤춘다.
“이만하면 됐다. 잘했어.”
촌장이 그윽한 눈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너무 싱거운데.’
이것은 마군만의 생각일까?
그는 마공관에서 현음자의 기관진학을 견식한 적이 있다.
마공관은 화약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누구의 지혜로도, 학문으로도, 무공으로도 뚫리지 않는 천험의 요새였다. 난공불락이었다.
현음자가 막고자 했을 때, 뚫을 수 없다.
반대로 현음자가 무너트리고자 했을 때, 무너지지 않을 방도가 있을까?
이곳을 현음자가 설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현음자가 만들었다면 요행을 바랄 수 없다.
헌데 지금은 어떤가? 현음자의 안배가 무너지고 있다. 길이 열리고 있다.
검왕이 무너지면 길은 열린다.
두 독물군은 촌장의 무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촌장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면 살기를 멈춘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봤다.
검왕이 다시 마성을 북돋워서 두 독물군을 자극하고 있는데, 그런 일만 없다면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함정, 현음자의 안배는 뿌리째 뽑히고 만다.
현음자가 졌다.
헌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싱겁지 않나.
정말 현음자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이이이익!”
검왕이 이를 악물고 저항한다.
검왕의 저항은 곧 끝날 것이다. 이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다.
검왕의 저항은 부질없다.
촌장이 잘했다고 말한 것도 이제 그만 저항을 멈추라는 뜻이다. 그래 봤자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잘한 것이다.
누가 감히 촌장을 상대로 해서 이만큼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촌장이 금제를 걸어서 기단을 풀어헤치고 있는 한, 방법이 없다.
그러고 보면 촌장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는 검왕을 제압할 수도 았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에 검왕을 마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앞으로 세상은 검왕이라는 새로운 흉겁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검왕이라는 이름으로 살생이 일어난다. 방화가 일어난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모조리 죽는다. 눈에 띄는 사람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진다.
앞으로 검왕이 할 일들이다.
촌장은 현음자의 안배도 무너트리고, 세상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심산이다.
검왕이 졌다. 현음자가 졌다.
그런데도 뭔가 찜찜하다. 이렇게 끝나기에는 검왕이라는 사람이, 현음자라는 사람이 너무 크지 않은가.
‘너무 쉬워. 쉽게 끝나고 있어.’
마군은 찡그려진 미간을 풀지 못했다.
투툭! 투투투툭!
한 번 끊어지기 시작한 기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풀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구와와와악!
봉인되어 있던 마성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왕의 얼굴이 피로 물든 듯 새빨갛게 변했다.
혈영마공의 본성이다.
두 눈도 새빨갛다. 머리카락도 빨갛게 변해간다. 검왕을 에워싸고 있는 공기들도 빨개진 것 같다.
“오성(五成)?”
촌장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검왕은 흉신악살로 변했다. 누가 봐도 징그러워서 몸서리칠 만큼 사나워졌다.
그런데 촌장은 ‘오성?’이라며 반문을 토해낸다.
“겨우 오성인가? 극성이라고 들었는데? 오성밖에 안 된다면?”
촌장이 미간에 매우 깊은 골이 패었다.
“오성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마군이 증평주에게 물었다.
“몰라.”
증평주가 짧게 말했다.
검왕의 변신은 모두를 놀라게 한다. 혈영마공의 본신이 이것인가 싶다.
헌데 촌장이 겨우 오성의 성취밖에 되지 않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증평주나 마군은 혈영마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혈영마공과 촌장이 알고 있는 혈영마공은 다른 것이다.
“후후후! 현음자, 대단한 사람이군.”
촌장이 감탄했다.
“먼 훗날, 한 기재가 태어날 것을 예측했어. 그가 혈영마공을 수련할 것도. 아니, 혈영마공을 기재의 손에 쥐여준 것이겠지. 그것도 오성밖에 수련할 수 없도록 제재를 가해서.”
구우우우욱!
검왕이 점점 더 흉신악살로 변해간다.
단지 피부색, 머리카락 색깔, 눈동자 색이 바뀐 것에 불과한데도 악마로 보인다.
“잘 봐라.”
느닷없이 촌장이 말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증평주와 마군에게 한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증평주에게 한 말일 게다.
“이것이 오성의 성취다.”
증평주와 마군은 검왕의 모습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육성으로 넘어서면 붉은색이 분홍빛으로 변한다.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옅은 색으로 변한다. 하지만 뜨거움은 더욱 강렬하다. 곁에 다가서기도 두려워질 정도로 뜨거워진다.”
‘무색!’
증평주와 마군은 단번에 극성의 상태를 짐작해냈다.
혈영마공은 피로 비유되어서는 안 된다. 피로 비유하면 가장 붉은색이 극성이 된다. 붉은색을 지나쳐서 검붉은 색, 종래에는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허나 혈영마공은 피가 아니다. 불이다.
불은 뜨거움을 더해가면 빨간색에서 분홍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극성까지 뜨거우면 무색이 된다.
무색이 가장 뜨겁다.
혈영마공은…… 피가 아니다. 불이다.
다시 말해서 혈영마공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는다. 무공의 이름도 화영마공(火影魔功)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혈영마공이라고 불린 것은, 아직까지 혈영마공의 극성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촌장이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오성이…… 최고의 성취?’
증평주와 마군은 촌장의 말뜻을 알아챘다.
지금까지 혈영마공의 극성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람이 익힐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검왕이 보여주는 것, 이것이 최고다.
혈영마공은 이후의 단계도 준비되어 있지만,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지경에 있다.
촌장이 말했다.
“내가 현음자에게 감탄한 것은 몇 가지 안배가 톱니처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첫째, 검왕이 혈영마공을 오성까지 연마했다. 인간으로서 이를 수 있는 극성을 이뤘다.”
눈길이 저절로 검왕에게 향한다.
촌장이 계속해서 말했다.
“둘째, 내가 그의 기단을 풀어헤쳤다. 본인 스스로는 절대로 풀지 않을 기단을 내가 풀어줬다. 현음자는 오늘 내가 그의 봉인을 풀 것까지 예상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놀란 점이다.”
촌장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촌장의 말을 듣다 보면 꼭 그렇게 들리지 않는가?
“셋째, 두 종류의 독물이 위협을 가해옴으로써 검왕의 기단이 예상보다 빨리 풀렸다. 이는 내 통제를 벗어나 자연의 상태에서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음자의 안배!”
구와와와와왁!
검왕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닐 정도로 사납게 변했다.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다. 검왕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의 검왕 모습에서 예전의 검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현음자의 최고 안배, 이곳에 우리를 부른 목적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이자, 검왕을 완벽체로 만들기 위한 수련 과정에 초대한 것이다. 하하하하!”
촌장이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검왕은 곧 사나운 모습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마성을 붙잡고 있던 기단은 모두 끊어졌다. 검왕은 온전히 마인이 되었다. 본성은 사라지고 오직 마성만 전신을 휘도는 마인 중의 마인이 되었다.
헌데 그의 모습이 매우 평온하다.
증평주와 마군은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촌장은 여전히 두 손을 거두지 못하고 무기를 줄줄이 뿜어낸다.
그는 지금 검왕과 겨루는 중이다. 그가 손을 멈추면 검왕의 무기가 밀려든다. 촌장을 직접 가격하는 것이 아니고 두 독물을 자극하여 힘차게 달려들도록 유도한다.
촌장이 손을 놓으면 두 독물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수천만 마리의 개미, 수억 마리의 벌떼와 싸워야 한다.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다. 계속해서 무기를 뻗어내어 두 독물들을 다독일 수밖에 없다.
고요하라. 평온하라. 차분하라. 움직이지 마라.
촌장과 검왕은 두 독물을 사이에 두고 겨루는 간접 결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전처럼 격렬하다.
검왕의 몸에서 뿜어나오던 붉은 기운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혈영마공의 경지가 오성을 넘어서 육성, 칠성으로 치솟고 있다.
검왕이 이토록 장족의 발전을 하는 데는 촌장의 도움이 크다. 그리고 계속해서 도와주고 있다.
촌장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손을 멈추지 못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검왕의 발전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게다.
스릉!
증평주가 검을 뽑았다.
그녀는 초고수다. 그러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검왕과 촌장이 어떤 입장에 처해있는지 단박에 파악한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현재 상황은…… 촌장이 어려움에 처해있다. 함정에 빠졌고,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대로 지속되면 현음자의 안배가 성공한다.
정확하게 현음자가 무엇을 노리는지, 검왕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
스읏!
증평주가 촌장을 쳐다봤다.
촌장이 무거운 눈길로 그녀를 봤다.
촌장도 그녀의 마음을 안다. 그녀가 검왕을 급습할 게다. 검왕이 내뿜는 무기 속에 뛰어들어서 난투를 벌일 것이다.
사실, 이런 행동은 죽음을 동반한다.
증평주가 싸움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검왕과 촌장의 무기를 동시에 맞받아쳐야 한다.
증평주에게 그만한 내공이 있을까?
증평주는 싸움 한복판에 뛰어들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하려고 한다. 이 싸움의 균형을 무너트려야 한다. 그래야만 촌장이 곤경에서 헤어난다.
촌장은 증평주의 죽음을 예견하기에 무거운 눈길을 보낸 것이다.
증평주가 검을 두 손으로 쥐고 촌장을 향해 읍했다.
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거운 눈으로 증평주만 쳐다봤다.
스읏!
읍을 마친 증평주가 고요한 신색으로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형을 쏘아냈다.
쒜에에에엑!
그녀는 검왕을 향해 쏘아갔다. 전심전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