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139화 (13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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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八章 구중옥(九重獄) (4)

녹천이 적벽검문 멸문을 주도했다.

녹천은 적벽검문을 멸문시키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녹천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혈루마옥에서 녹천과 증평은 비등했다.

절곡에 갇힌 사람들이 남자 반, 여자 반을 형성했다. 남자는 녹천으로, 여인은 증평으로 모여들었으니 그들은 다른 세력이면서도 같은 핏줄이다.

녹천과 증평은 적이 아니다.

그들은 경쟁 관계도 아니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는 관계가 아니다.

녹천과 증평은 공생한다.

다만, 그들은 혈루마옥의 저주 탓에 선천적으로 서로에게 극성인 무공을 수련해야 한다.

극성은 마찰을 불러오고, 사소한 마찰들이 그들을 앙숙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실, 증평과 녹천은 싸우지 않는다.

부부간에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무공에 대해서 자기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이는 될 수가 없다.

녹천이 적벽검문을 멸문시키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을 때만 해도 그렇다.

증평은 진심으로 슬퍼했다.

당시에 죽은 녹천 사람들은 증평 사람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아들, 손자들이었다. 부모형제들이다. 사촌이요, 사돈들이다. 모두가 한가족이다.

녹천의 세력이 절반으로 반감되었다고 해서 즐거울 리 있는가.

다른 문파 같았으면 제이세력으로 밀려났을 녹천이지만 혈루마옥에서는 여전히 촌장의 한 팔 역할을 한다.

녹천주가 살아있다는 것도 촌장의 한 팔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녹천주는 일당백의 무인이다.

녹천주 한 사람이 녹천 사람들 백 명 몫을 한다.

그만큼 녹천주와 증평주의 무공은 높다.

중원 무림에 많은 무인들이 있지만 그들 중에서 일대일의 승부로 두 사람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헌데 검왕이 증평주를 꺾었다.

비록 그 차이가 반초 차이라고는 하지만 중원 무림에서 두 사람과 견줄만한 사람이 나온 것이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증평주가 패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고, 중원무림에서 그만한 고수가 나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은 사실이다. 이렇게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촌장이 말했다.

“확실히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관심을 끄는 것뿐만이 아니라 분산지계(分散之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왕이 차분하게 말했다.

“분산지계?”

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요. 증평주를 이겨라. 허면 촌장의 한 팔을 떼어낼 수 있다.”

검왕은 증평주가 옆에 있는데도 태연히 말을 했다.

“증평주를 미끼로 촌장을 유인하면…… 녹천주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허면 남은 한 팔마저도 떼어내게 된다.”

검왕은 녹천주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촌장이 눈길을 절곡 아래로 던졌다.

혈루마옥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운집해 있다. 약속을 하거나 명령을 한 것은 아닌데, 자신들이 할 일을 쫓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다.

검왕을 쫓는 사람들, 이곳에 왔다.

누산을 쫓는 사람들, 이곳에 왔다.

살아있으면 골치 아픈 사람들이 있다. 오합지졸은 몇백 명이 숨 쉬고 있어도 상관없으나 골치 아픈 자, 무림의 기둥이 될 만한 자는 한 명만 살아있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혈루마옥은 그런 자들을 정리해왔다.

강자들, 무림이 기둥으로 삼을 만한 자들을 미리 처단해서 기댈 만한 언덕을 없애버린다.

그 사람들, 강자를 쫓는 자들도 이곳에 왔다.

이유는 오직 하나, 검왕이 증평주를 이곳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누산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으며, 무림 최고수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무림 최고수, 당연히 검왕이다.

검왕이 증평주를 이겼으니 검왕이야말로 당장 처단해야 할 자로 분류된다.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상당히 많은 무인들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중에 녹천 사람들은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촌장을 믿는 마음도 있고…… 녹천주의 야망도 있다.

촌장과 증평주와 검왕이 이곳에서 일시에 사라진다면 향후 무림은 녹천주의 텃밭이 될 게다.

혈루마옥은 이미 소림과 무당의 비승들마저 정리했다.

신경 쓰이는 것이라면 유지자문뿐이다. 유지자문은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으니…… 유지오혼이 유지자문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유지자문 정도는 녹천의 힘만으로도 막을 수 있다.

유지오혼의 힘을 봤기 때문에 유지자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추정할 수 있다.

유지오혼은 증평주가 나선 것도 아니고 겨우 수월화가 나섰는데도 정리되지 않았는가.

수월화는 대단한 고수다. 하지만 녹천주 입장에서는 ‘겨우’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녹천은 유지자문을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허면 남은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임자 없는 무주공산을 느긋하게 걸어가면서 곳곳에 떨어져 있는 금은보화를 줍기만 하면 된다. 길가에 깔린 온갖 재물들을 줍기만 하면 된다.

누가 녹천을 막는단 말인가. 감히!

증평주를 이곳에 데리고 온 행위 하나로 촌장은 두 팔이 모두 떨어져 나간 셈이다.

촌장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내 팔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군. 헌데 그 팔들은 의수(義手)란 말이지.”

“아는 사람이 또 그러더군요. 의수만 떼어내면 승산은 있다.”

“그 아는 사람이 혹시 누산 아닌가? 셈이 밝은 사람이니 머리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적벽검문 제일의 지자(智者)이기도 하고 말이지.”

“…….”

“그 아는 사람이 누산이라는 증거는 또 있어. 누산의 흔적이 아주 교묘하게 이곳으로 이어졌단 말이지. 안 그런가?”

촌장이 뒤에 시립해 있던 마군에게 물었다.

“아! 예.”

마군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검성 성주가 된 귀선부 이령은 누산이 이곳 기린산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린산을 샅샅이 훑어달라고 요구했다.

마군은 당연히 그 명령을 쫓았다.

헌데 막상 이곳에 와서 기린산을 뒤져보니 누산은 없다. 찾는 누산은 없고 검왕만 있다.

누산을 찾으려고 왔다가 검왕을 찾은 격이다.

허면 이령은 이곳에 누산이 있다는 확증을 어떻게 잡은 것일까? 왜 마군에게 부탁한 것일까?

누산이 교묘하게 흔적을 흘렸기 때문이다.

누산을 찾으러 왔든 검왕을 찾으러 왔든 결과는 똑같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검왕을 찾아서 온 사람은 검왕을 만난다. 누산을 찾아서 온 사람도 검왕을 만난다. 누구를 찾아왔든 만나는 사람은 오직 검왕뿐이다. 그것도 이곳에서.

저벅! 저벅!

검왕이 촌장을 향해 걸어왔다.

“이곳에 온 이상, 아는 사람이 누산이든 하늘이든 상관없습니다. 제 앞에 선 분이 혈루마옥 촌장이든 촌부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검왕이든 흑천초부든 상관없습니다.”

스읏!

검왕이 검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검왕의 마지막 말은 몹시 단호해서 현실처럼 들렸다.

“허허! 도대체 이곳에 뭐가 설치되어 있기에 이토록 자신만만한고?”

“우선 한 수, 부탁드립니다.”

검왕이 검을 겨눴다.

검왕의 눈빛은 무심했다. 절정무인치고 검을 든 이상 무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무심하다. 모두가 마음을 조절할 줄 안다. 모두 삶과 죽음을 초월한 상태에서 무공을 이어간다.

하지만 검왕은 특히 무심하다.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돌로 만든 얼굴 같다.

감정이 없다.

“자네…… 승부에는 관심이 없군.”

촌장이 검을 뽑으면서 말했다.

“이기든 지든 상관하지 않아. 그런데 뭐하러 일전을 치르겠다는 것인가?”

“촌장의 무공을 보고 싶습니다.”

“내 무공을?”

“혈루마옥 최고 비기가 어떤 무공인지 견식하고 싶습니다.”

“자네를 이길 무공은 최고가 아니라도 가능하지.”

“제게 지든, 제게 이기든…… 죽음과는 상관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오늘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승패를 구분하지 마시고 최고의 한 수, 부탁합니다.”

검왕의 말에 마군은 급히 주위를 살펴봤다.

폭약이 매설되어 있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독이 살포되나?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기관진식이 발동되나? 마공관의 기관진학을 알아보는 그이지만, 이곳에서는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곳은 그저 평범한 산정(山頂)이다.

아니, 평범하지는 않다. 천연의 험지라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한다. 그리고 현음자가 손을 본 곳이라는 것도.

그러나 검왕이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아니, 자신 있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말한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중얼거리는 것 같다.

그것이 더 무섭다.

검왕은 확신에 넘쳐있지 않다.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두가 죽는다.

죽기 전에 당신의 최고 검학을 견식하자.

이 싸움에서 자신이 죽더라도 여한 없다. 이겨도 기쁘지 않다. 기쁘기는 할까? 어쨌든 모두가 죽는다.

검왕과 촌장의 싸움은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검왕은 그렇게 생각한다.

“궁금하군. 현음자가 어떤 일을 벌이려는지. 허허!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후인을 압박하는군. 좋아. 자네 소원대로 내 최고 검학을 보여주지. 난 이것을 일선(一旋)이라고 칭한다네.”

“일선!”

촌장의 말에 증평주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증평주도 알고 있는 검학인 것 같다. 그리고 증평주 정도 되면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을 사람인데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검학인 것 같기도 하다.

“자네는?”

“저도 제 나름대로 검학을 정리했습니다.”

“그래?”

“비꼬려는 것은 아니고…… 저는 이것을 혈선(血線)이라고 칭했습니다.”

“혈선이라. 혈영마공이 원공(元功)인가?”

“그렇습니다.”

“알겠군.”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검왕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촌장뿐만이 아니다. 증평주도 마군도 알아듣는다.

검왕은 자신의 검학을 혈선이라고 했다.

촌장이 일선이라고 하니까 자신도 비슷하게 지어낸 이름이 아니라 원래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혈영마공이 원공이라고 하지 않나.

혈영마공을 극도로 압축하여 하나의 선으로 전개해낸다.

검왕은 이 검학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오직 한 줄기 선밖에 안 보이기 때문에, 붉은 선이 이어지기 때문에 혈선이라고 말한 것이다.

압축과 폭발이다.

반면에 촌장은 일선, 한 번 돈다는 뜻으로 검학을 밝혔다.

촌장 역시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오직 검이 도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무공이 절정에 이르면 말이 끊어지는 단계에 이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계다. 초식 명칭조차 정할 수 없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몸으로 받아내야만 해득이 가능한 경기가 온다.

그럴 경우, 고수들은 아주 짧은 말을 사용한다.

무(無), 허(虛), 탄(呑) 등등 한순간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명칭을 사용한다.

일선과 혈선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무학이다.

물론 여기에는 무공 격차에 따른 오인(誤認)이 존재한다.

검왕이 촌장보다 무공이 많이 약하다고 할 경우, 검왕에게 촌장의 무공은 정말 일선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면 일선조차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촌장이 일선으로 봤다고 해서 하수까지 일선이 보일 수는 없다.

반면에 무공이 높은 촌장 입장에서는 검왕이 말한 혈선이 명확하게 보일 수도 있다.

검왕은 혈선밖에 보지 못하지만, 촌장은 검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호선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옆으로 쓸어내니 천군만마를 베는 것 같군. 횡소천군(橫掃千軍).

초식 명칭은 검이 그려내는 검로(劍路) 혹의 검강(劍?), 혹은 검력(劍力), 혹은 검환(劍幻) 등에 따라서 붙여진다.

검왕이 혈선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촌장은 초식 명칭을 붙일 수 있을까?

스으읏!

검왕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갔다.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충혈되고, 검을 들고 있는 손도, 손톱도…… 종래에는 검까지도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검왕은 혈인(血人)이다.

‘응축! 진기를 응축하고 있다!’

생사를 결하는 입장이라면, 이곳이 전장이라면, 오직 죽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상대가 이런 상태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진기를 응축시키지 못하도록 방해해야 마땅하다.

검왕은 시간을 얻었고, 방해받음 없이 차분하게 진기를 응축시켜 나갔다.

파아아앗!

검왕의 몸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실제로 불길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진기가 극성에 이르니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것 같다.

스으읏!

검왕이 검을 들어 천중(天中)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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