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第二十八章 구중옥(九重獄) (3)
스읏!
마군은 철삭 다리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알지 못할 누군가에게 등을 맡긴 채 앞으로 나아가는 심정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경악, 수치, 회한…… 온갖 감정이 일시에 몰려든다.
자신의 무공이 겨우 이 정도였나?
누군지 알지도 못할 자가 등을 겨누고 있는데,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있다.
스읏!
마군은 철삭 다리 앞에 섰다.
철삭으로 만들어진 다리 앞은 그래도 조금 몸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있다.
그는 즉시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헌데!
츠읏!
어느새 그자가 뒤에 붙어섰다.
마군이 뒤돌아서는 순간보다 그자가 손을 쓰는 순간이 더 빠를 것이다.
이것은 마군의 직감이지만, 틀림없다.
등 뒤에 있는 자가 말했다.
“강풍이군.”
마군은 묵묵히 강풍을 지켜봤다.
골짜기를 몰아친 강풍이 최종적으로 철삭 다리를 후려친다.
굉장히 사납고 거칠다. 하지만 마군을 위협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아직까지는.
“이게 인위적인 강풍이라는 건 아나?”
등 뒤에 따라붙은 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만들어 낸 강풍이란 말이오?”
마군은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이런 바보!’하고 자책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상대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말았다. 처음 보는 자인데, 상대는 자신에게 하대를 했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존칭을 붙였다.
싸워보기도 전에 기가 눌려버렸다.
등 뒤에 선 자가 말했다.
“만들어냈지. 이 정도 강풍을 만들어 내려면 절곡 전체를 손봐야 하는데…… 참 대단한 사람이야. 어쨌든 저 밑에서 티끌만 한 바람이 일어나도 여기선 항시 강풍이 몰아치게 되어 있으니…… 이곳 바람을 멈추려면 저 아래를 무너트려야겠군.”
마군은 상대의 말을 쫓아 절곡을 쳐다봤다.
허나 그는 어디를 무너트려야 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저곳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란 말인가!’
등 뒤에 있는 자의 말을 십분 받아들이면 절곡 전체를 누군가가 손봤다는 뜻인데…… 절곡은 사람이 손대고 말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원시림이다.
크고 웅장하다.
저런 곳을 누가 손댔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뒤에 있는 자가 말했다.
“건너가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암습이 없었으니 중간에서 어쩔 생각은 없는 듯하고.”
마군은 무언의 손길에 떠밀려 발을 옮겼다.
사내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마군에게 등 뒤의 혹을 떨궈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휘이잉!
강풍이 몰아친다.
강풍의 강도가 철삭 밖에서 봤을 때와 철삭 위에 올라서서 온몸으로 느낄 때가 천지차이다.
‘욱!’
마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한낱 바람이 자신을 긴장시킬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철삭 위에서 맞이한 강풍은……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곧바로 날려갈 버릴 듯하다.
철렁!
철삭이 마구 움직인다.
밖에서 봤을 때는 철삭이 그저 약간씩 흔들리는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다리를 건너갈수록 흔들리는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아니, 무척 심해진다.
철삭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허나 이 강풍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강풍은 그에게도, 등 뒤에 달라붙은 자에게도 고루 해당된다. 마군이 힘들다면 등 뒤 사내도 힘들 것이다.
등 뒤 사내를 공격할 의사는 없다.
공격한다고 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성공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상대방의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츠읏!
마군은 빠른 속도로 철삭을 건너갔다.
그때, 등 뒤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속도를 늦추는 게 좋아. 허중강풍(虛中强風)은 나조차도 날려버릴 정도로 강하니까.”
등 뒤 사내의 말이 맞았다.
마군은 느닷없이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강풍에 철삭을 꽉 움켜잡고 움직이지 못했다.
허중강풍, 다리 한가운데로 몰아치는 강풍!
숨이 막힌다. 마군이 수련한 혈무기 같은 것은 티끌처럼 날려버릴 강기(剛氣)다.
여인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여인에게서는 귀태가 풍긴다. 은연중에 내뿜는 기도 역시 범상치 않다.
척박한 산야(山野)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
땀과 피와 검보다는 한 줄의 시와 한 잔의 차가 더 어울리는 여자.
그 여자는 마군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 두 눈을 땅에 고정시킨 채 공손히 시립해 있다.
스읏!
마군은 그녀를 쳐다보느라고 등 뒤 사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등 뒤 사내가 철살 다리를 건너와 자신의 등을 다시 잡았다.
어쩌면 등 뒤 사내를 쳐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을 지도 모르는데…… 놓쳐버린 것이다.
등 뒤 사내가 말했다.
“검왕이더냐?”
여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혈루마옥!’
마군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전율을 느꼈다.
그의 등을 따라잡은 사람, 그는 혈루마옥을 이끌고 있는 촌장이다. 그리고 공손히 시립해 있는 여인, 이 여자가 바로 혈루마옥을 양분하고 있는 증평주다.
이 두 사람, 모두 마군을 훨씬 능가하는 고수다.
마군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리고 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등 뒤 사내가 누구인지 얼굴을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솔직히 본다고 해도 촌장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기 때문에.
등 뒤 사내는 마군을 무시하고 말했다.
“소문에는 검왕에게 잡혔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잡혔다?”
“반 초 패배. 인정해 줬습니다.”
“반 초라…… 후후! 한때는 화천에게도 졌던 자가 이제는 증평주를 이긴다. 놀랍군.”
“더 놀라운 건, 그자가 흑천초부라는 겁니다.”
“흑천초부가…… 검왕?”
“적벽검문 멸겁을 재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번에는 촌장이 말문을 닫아버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흑천초부…… 검왕이 흑천초부…….’
마군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중원은 흑천초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혈루마옥 사람들은 아주 잘 안다. 혈루마옥 사람들에게 흑천초부는 갓난아기조차도 아는 아주 유명한 인사다.
흑천초부는 혈루마옥을 끊임없이 두들겨왔다.
혈루마옥의 저주가 닿지 않는 곳에서, 혈루마옥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게끔 도발했다.
흑천초부는 너구리처럼 능글맞다.
흑천초부는 단숨에 목을 비틀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얄밉다.
흑천초부는 증평 사람을 넷이나 벴다.
결코 만만치 않은 고수다.
혈루마옥은 흑천초부를 적벽검문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해왔다.
증거를 잡을 수는 없지만 오직 적벽검문 만이 혈루마옥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고,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흑천초부는 딱 그런 식으로 싸웠다.
저주를 받지 않고 빠져나간 유일한 사람.
사실, 흑천초부는 저주를 받을 겨를이 없었다. 겨를? 그는 저주를 받지 않을 땅에서만 싸웠다. 오히려 혈루마옥 사람들이 그와 싸우기 위해서 모험을 해야만 했다.
이것이 적벽검문 사람들의 싸움방식이다.
그들은 혈루마옥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그러면서 싸우러 나오라고 손짓한다.
마군도 그 정도까지는 안다.
그는 혈루마옥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혈루마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만큼 흑천초부를 모르지 않는다.
‘검왕이 흑천초부. 적벽검문이 몰살당했는데. 그럼 검왕이 왜 나타난 거지? 흑천초부라는 신분까지 드러내고?’
뭐가 뭔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귀선부 이령이라면 이 상황을 단번에 헤아렸을까?
여인이 말했다.
“검왕은 여기 있습니다.”
“봤다.”
‘봤다?’
촌장의 말에 마군은 또 한 번 미간을 찡그렸다.
검왕을 봤다고? 언제? 촌장과 그는 함께 길을 건너왔다. 그렇다면…… 촌장이 봤다면 그도 봤어야 한다. 하지만 오는 길에 사람은 없었다.
“허허! 검왕인지 흑천초부인지 얼굴부터 봐야겠구나.”
“모시겠습니다.”
여인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뒤돌아섰다.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건장한 중년 사내이고, 또 한 사내는 흑발이 치렁치렁한 젊은 사내다.
‘검왕!’
마군은 검왕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가 검왕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검왕과는 손속도 마주쳐본 관계다.
허나 지금의 검왕은…… 그가 알고 있는 검왕이 아니다.
마군이 알고 있는 검왕은 광명정대했다. 눈빛에서 맑은 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검왕은 반쯤 죽어있다.
왠지 모르지만 그는 생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눈빛에서 삶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퇴폐적이다.
밝음은 전혀 없고 오직 축축한 음기만 느껴진다.
검왕이 마공을 수련했다고 하더니…… 마공의 정도가 매우 깊어진 듯하다.
하기는…… 증평주를 이겼다지 않은가.
마군이 알고 있는 검왕은 결코 증평주를 이기지 못한다. 증평주는 십마 서너 명이 합격을 해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초강 무공을 수련했다.
한때, 마군은 검왕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검왕은 그 정도의 인물이다. 마군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적당한.
그런 검왕이 증평주를 이겼다면, 그 밑바탕 무공은 틀림없이 마공일 게다.
반면에 검왕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는 촌장이 틀림없다.
촌장은 촌부(村夫)의 복색을 하고 있다. 낡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영웅건 대신 무명끈을 묶었다. 신발은 가죽신이기는 한데 너무 낡아서 제 색깔을 구분할 수 없다.
촌장은 매우 건장하다.
팔 근육도 두툼하고, 어깨도 딱 벌어졌다. 가슴이 벌어진 것인가?
촌장은 뒷짐을 진 채 검왕을 쳐다봤다.
검왕은 넓은 바위에 앉아서 일어서지도 않고 고개만 돌려서 촌장을 봤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
눈에서 불통 같은 것은 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담담하게 상대를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아무런 은원이 없는 사람끼리 만난 것으로 봤을 게다.
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검왕인가, 흑천초부인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검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우 느리게.
“증평주와는 흑천초부로 만났다고 들었네. 그럼 흑천초부라고 봐도 되겠나?”
“차이가 있습니까?”
“있지.”
“후후! 궁금하군요. 어떤 차이입니까?”
“검왕이라면 적벽검문이 멸문했을 것이고, 흑천초부라면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적벽검문 멸문에 대해서 다시 알아볼 생각이네.”
“내가 검왕이라고 해도.”
검왕이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촌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은데요? 적벽검문의 멸망, 다시 알아볼 생각이지 않습니까?”
“후후! 내 마음이 보였나?”
촌장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검왕은 천천히 걸어와서 촌장 맞은편에 섰다. 일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촌장이 옅은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날 죽일 셈인가? 이곳이라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