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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六章 흑천(黑天) (4)
성주는 은거한 기인이나 마찬가지다.
성주는 남들이 찾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남들이 쳐다보지 않을 허름한 초옥에서 연못이나 들여다보고 산책이나 하면서 시간을 소비한다.
성주는 검성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검성에 관한 일은 부성주 이하 각 당주(當主)들이 조율해서 돌보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굳건하다. 하지만 검성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성은 옛날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무림에 분란이 생겨도 무인을 파견하지 않는다.
무림에 마인이 돌아다니고 있어도, 무참한 살인이 계속 일어나도 방관만 한다.
간혹 무인들을 파견하는 일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함정에 걸려서 살해당하곤 한다.
분란을 조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검성 이름에 먹칠만 하고 있는 셈이다.
검성 성주가 업무에서 손을 떼고, 현장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던 검왕이 물러난 순간부터 검성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다고 검성이 호랑이에서 고양이가 됐다는 말은 아니다.
검성은 아직도 고수들이 즐비하다. 검성이 중원을 쥐락펴락할 무렵에 활동하던 고수들이 거의 대부분 존재한다.
검성은 종이호랑이가 아니라 잠든 호랑이다.
검성주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 천하를 노려보면…… 호랑이는 다시 호랑이가 된다.
검성주는 여전히 호랑이다.
초옥은 손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지붕을 덮은 초가조차도 썩어버려서 짙은 회색빛을 띤다. 마당은 풀밭이 되었고, 마루 밑에는 쥐들이 득실거린다.
이곳에는 시녀도 시종도 없다.
검성에서는 밥만 가져다준다.
검성에서부터 이곳까지 밥을 가져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일다경이다. 허니 검성주는 늘 찬밥을 먹게 된다.
아무리 둘러봐도 검성 성주가 지낼 만한 곳은 아니다.
그는 왜 이런 곳에 은거하고 있는 것일까?
은거를 할 요량이라면 아예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심산절곡을 찾아가든가.
검성 성주는 언제든 검성에 들를 수 있다.
검성 성주는 마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 검성을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그러기 싫다. 지금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러니 내가 쉴 동안 너희들이 잘 알아서 해봐라 하고 말하는 듯하다.
사박! 사박!
그녀는 초옥으로 들어섰다.
예전에는 치마에 흙이 쓸렸는데, 이제는 풀이 쓸린다.
그녀는 연못부터 쳐다봤다.
연못가에 성주가 없다. 점심을 넘긴 시간이면 늘 연못가에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산책로를 둘러봤다.
성주는 산책로에도 없다. 산책로라고 해봐야 백여 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하니 모든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외의 상황은 아니다.
성주는 시간에 맞춰서 정확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늘 보면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꿰뚫어보면 항시 다른 시간에 다른 행동을 한다.
그녀는 초옥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성주는 초옥 안에 있다.
밥 한 그릇, 나물 한 접시를 앞에 놓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식사를 하는 중이다.
“식사가 늦으셨네요.”
그녀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성주가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흠! 예쁠 줄 알았다.”
성주가 감정 없이 말했다.
귀선부 이령, 그녀는 면사를 벗은 맨 얼굴로 성주 앞에 나섰다.
그녀는 언제나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다녔다. 누구 앞에서도 면사를 벗지 않았다.
오늘은 면사를 벗고 맨 얼굴을 보인다.
그녀는 예쁘다. 눈은 검은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맑고 투명하다. 입술은 붉디붉다. 코는 오똑하고, 피부에는 잡티 한 올 드러나지 않았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얼굴이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서 실망하셨어요?”
“악화(惡花)가 예쁘기까지 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법이지.”
“호호호! 악화……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뱀은 아무리 선해도 뱀이지. 호랑이도 고기를 먹어야 사는 법이다. 풀을 먹고 살 수는 없지. 뱀이나 호랑이가 살기 위해서는 살생을 해야만 하는 것이니.”
성주가 저금으로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속이 편하네요. 사실 오늘 성주님을 편안하게 모시려고 왔거든요.”
“나를 죽이라고 하던가?”
“네.”
“눈이 멀었군.”
“…….”
“무엇이 촌장의 눈을 멀게 했을꼬?”
“무슨…… 말씀이세요?”
“나를 죽이면 검왕을 어찌 통제하려고?”
“…….”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촌장의 결정은…… 그렇다. 검왕이 죽었다는 결론하에 내린 결정이다.
사실 검성 성주의 역할은 검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벽검문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유지자문을 이끌어내고, 적벽검문을 완벽하게 노출시키고.
성주가 자청해서 그런 일을 할 리는 없지만, 그가 살아있다면 모든 상황은 혈루마옥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래 왔다.
성주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이 선선히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검왕이라는 돌출 변수가 발생했다.
혈루마옥의 눈에 검왕은 가볍게 짓밟고 지나갈 수 있는 돌부리에 불과했는데, 아주 뿌리 깊은 돌부리가 되어서 발목을 붙잡고 있다. 아주 단단히.
그런 검왕이 죽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그녀는 확답하지 못했다.
검왕이 죽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아직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검성 성주가 죽으면 검왕을 통제할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
허면 통제가 풀린 검왕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발목을 붙잡기라도 할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촌장은 하필 이 시점에 검성을 무너트리자는 결정을 내렸다.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을 쓸어버렸듯이 검성과 혈천성을 무너트릴 생각이다. 그리고 구파일방 중에 한두 개 정도 무너트리면 나머지는 순순히 굴복한다.
솔직히 중원 무림은 혈루마옥과 싸울 생각이 없다.
그들은 화천을 통해서 혈루마옥의 무공을 견식했다. 자신들은 적수가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중원 침공?
이런 것을 두고 중원 침공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고 있는데.
검성과 혈천성만 무너지면 중원 무림은 발 아래 굽어본다.
일단 그렇게 하려고 한다. 검왕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소기의 목적부터 이뤄놓고 본다.
그녀도 촌장의 생각에 동의한다.
검왕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우선 큰 바다를 만들어 놓는다. 그 안에서 피라미 몇 마리가 허우적거린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자잘한 저항일진대.
촌장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가차 없이 무림을 접수했어야 한다.
슷!
그녀가 품에서 날이 잘 선 단도를 꺼내 지긋이 쳐다봤다.
“이 칼, 알아보세요?”
성주가 흘끔 단도를 쳐다봤다. 그리고 역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물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으적! 으적!
나물 씹는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린다.
‘동요하고 있어!’
그녀는 속으로 웃었다.
검성 성주는 단도를 알아봤다. 마음에서 미지의 감정이 치솟고, 그를 휘감는다.
성주는 마음의 변화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물을 힘주어 씹는다.
“놓고 가면 되죠?”
그녀는 성주에게 가까지 다가가지도 않고 발밑에 단도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오늘 제가 검성을 접수할 거예요.”
으적! 으적!
“일호명령서(一號命令書)를 주세요.”
“그것까지 바라는 게냐?”
“써주실 거라고 믿어요.”
“허허허! 정말 악화구나.”
“제가 이렇게 할 것, 알고 계셨잖아요.”
“한마디만 하마.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리거라. 넌…….”
성주가 말을 하다말고 뚝 멈췄다.
성주가 그녀를 쳐다본다. 두 눈에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쳐다본다.
“제가 뭐요?”
그녀가 되물었다.
“이 길을 계속 가면 넌 곱게 죽지 못해. 반드시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게다. 그러니 멈춰라.”
성주가 감정을 다시 숨긴 채 딱딱하게 말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지금까지 그래 왔는데 앞으로인들 못 하겠어요?”
그녀가 뒤돌아섰다.
성주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돌아서서 사박사박 걸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멀어져 간다.
성주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귀선부 이령, 그녀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하나는 성주가 벌써 귀선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혈루마옥 촌장을 만날 때, 성주는 귀선부에서 모종의 일을 마쳤다. 귀선부 일령(一令)을 만났고, 지시할 것을 모두 지시해 놓은 상태다.
현재 귀선부는 텅 비었다.
이령이 검성에 돌아온 후, 귀선부부터 들렀다면 무엇인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허면 자신 앞에 단도를 내려놓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한 번 더 생각했을 것이다. 촌장의 지시가 잘못된 점은 없는지 숙고했을 게다.
또 한 가지 실수는 귀타가 성주 곁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귀타는 성주의 수족이다.
귀타는 성주의 목숨을 저당 잡혔다.
성주가 단도를 써야 하는 시점인데, 그런 일이 닥쳤는데, 귀타가 곁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오늘 이 상황은 그녀도, 성주도 예견했던 것이다.
촌장이 검성 접수를 뒤로 미룬다면 모르겠거니와 접수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면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
성주를 가장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이령뿐이다.
으적! 으적!
성주는 먹던 밥을 다 먹었다. 나물 한 접시도 말끔하게 비웠다.
“좋군. 맛있는 한 끼였어.”
성주는 하늘을 쳐다봤다. 맑고, 푸르다.
어머니의 심장에 박혔던 단도가 성주의 심장에 꽂힌다.
그녀는 성주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는 사실은 의심치 않는다.
성주는 죽는다.
성주가 죽기 전에 일호명령서를 건네줄 것인가 하는 점은 회의적이다.
그 부분만큼은 해주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일호명령서는 검성의 주인을 변경한다는 명령이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이령을 검성 주인으로 삼겠다, 성주의 후인으로 앉히겠다는 명령서다.
일호명령서를 발부하기 위해서는 성주의 단지(斷指)가 필요하다.
단지는…… 후인을 정하고 자리를 물려주니만치 차후 검성에 어떤 일이 생겨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손가락을 끊어서 다짐하는 것이다.
단지를 함에 있어서 어떤 손가락을 끊을 것인가는 오로지 성주의 마음에 달려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무공을 펼칠 때 가장 중요한 손가락을 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무공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인 게다.
성주는 단도를 심장에 꽂을 것이다. 허니 단지 역시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마음이라는 것을 먹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이야 도리를 지키는 행위라고 하지만 검성을 물려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검성 성주가 일호명령서를 발부할까?
발부한다면 검성을 피 흘리지 않고 접수하는 것이고, 발부하지 않는다면 멸문시킬 뿐이다.
검성 멸문에는 막대한 희생이 요구된다.
검성 고수들을 모조리 쓰러트리자면 그만한 힘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쪽의 희생도 만만치 않다.
물론 혈루마옥은 그럴 만한 힘이 있다.
허나 촌장이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그녀의 힘만으로 검성을 무너트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호명령서를 받는 쪽이 가장 편하고 좋다.
성주…… 일호명령서…….
그녀는 초옥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몸에 힘을 풀고, 어떠한 긴장도 떠올리지 않은 채 사박사박 풀밭을 걸어갔다. 성주가 걸었을 산책로를 지나, 연못가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