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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五章 은검(隱劍) (3)
혈루마옥은 저주라는 철조망에 갇힌 곳이다.
저주를 푼 사람은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저주를 풀지 않고는 나가지 못한다.
짐승은 다르다. 짐승들에게는 철조망이 보이지 않는다. 저주라는 굴레도 없다. 새들은 하늘을 넘나들고, 토끼며 다람쥐며 온갖 동물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그중에 딱 하나…… 혈루마옥에서 태어나고 사육된 당나귀만은 저주가 깃든다.
혈루마옥을 벗어난 당나귀는 즉사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혈루마옥에서 태어난 다른 가축들은 저주에 구애받지 않는데, 오직 당나귀만은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해진다.
그래서 혈루마옥 사람들은 당나귀를 특히 아낀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할까? 애환이 같기 때문일까? 가축이 귀한 혈루마옥에서 죽은 짐승을 먹지 않고 땅에 묻는 것은 오직 당나귀뿐이다.
당나귀는 깊은 계곡에서 태어난 탓인지 산을 잘 탄다.
산에는 맹수도 많다. 당나귀는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맹수를 피해야 한다.
후각도 보통 이상으로 발달되었다.
그녀가 타고 있는 당나귀는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당나귀가 아니다. 혈루마옥에 특화되어 무인 이상으로 오감이 발달된 영물 중에 영물이다.
당나귀가 숨은 자의 냄새를 맡았다.
당나귀는 도주하는 자들의 냄새도 맡았다. 십절소악과 누강, 음사의 냄새를 알고 있다.
어느 쪽을 쫓을지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녀가 방향을 정해주기만 하면 된다.
“가자.”
그녀가 당나귀의 목덜미를 톡톡 건드렸다.
날수통을 사용한 자, 그자가 궁금하다.
당장 급한 것은 누강을 잡는 일이지만, 중한 것보다는 궁금한 것에 마음이 더 끌린다.
당나귀가 참나무 숲으로 깊이 들어갔다.
우뚝!
당나귀가 걸음을 멈췄다.
앞에는 장정이 입었음 직한 옷가지들이 벗어져 있다.
장삼부터 속옷까지…… 몸을 가리는 일체의 의복이 미련없이 던져져 있다.
당나귀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당나귀가 맡은 냄새는 의복에서 풍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인내다.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특유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이 냄새는 지문처럼 각기 달라서 식별할 능력만 있다면 단숨에 가늠된다.
당나귀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헌데 걸음을 멈췄다. 옷을 벗어놓은 것은 상관이 없어야 한다. 옷이 벗어져 있더라도 당나귀는 계속 인내를 쫓아갔어야 한다. 사람 냄새를 쫓아가야 한다.
즉, 날수통을 사용한 자는 옷을 벗으면서 인내도 지워버렸다는 뜻이다.
첫째, 놈은 당나귀의 존재를 알고 있다.
둘째, 놈은 인내를 지울 수 있을 정도로 독약(毒藥)에 해박하다.
“흠!”
그녀는 후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는다. 날수통을 쓴 자가 벗어놓고 간 옷에 집중한다.
팟!
어느 한순간, 그녀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하고, 혀끝을 톡 쏘는 알싸한 냄새 같기도 하고…… 좌우지간 인상이 확 찌푸려진다.
‘후각을 마비시켰어!’
당나귀는 일시간 후각을 잃어버렸다.
놈이 벗어놓은 옷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는데, 그 짓 때문에 당나귀가 코를 잃었다.
어쩌면 후각을 잃은 게 일시간이 아니라 영구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놈을 찾을 수 없다. 더 이상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잃었다.
“풋!”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그때, 놈을 쫓지 않고 누강을 쫓아갔다면 지금쯤 목덜미를 낚아챘을 수도 있다. 아니, 틀림없이 두 손에 오라를 묶어서 당나귀 뒤에 졸졸 끌고 있을 게다.
헌데 이제는 누강조차도 쫓아갈 수 없다.
당나귀를 너무 과신한 것이 잘못이었다. 틀림없이 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상관없기는 하다. 누강은 언제든 쫓아갈 수 있고, 누강을 쫓다 보면 날수통을 사용한 자 역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는 지금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고.
“일패(一敗). 내가 졌어. 인정해. 호호호!”
그녀는 웃으면서 당나귀의 목덜미를 톡톡 쳤다.
당나귀가 방향을 돌려서 금까지 쫓아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정확하게 걸렸다!’
십절소악은 인상을 찡그렸다.
쫓기는 자가 산정으로 도주한다는 것은 굉장한 우행(愚行)이다. 하지만 날수통을 쓴 자는 그것을 요구했고, 그대로 따라서 하니까 추적자가 없다.
날수통을 사용한 자는 우군이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자…… 누군지 알 수 없는 자…… 적이 하오문에 은신해 있다. 그리고 그자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을 혈루마옥에 전해준다.
‘예정된 길로 가면 안 되겠군.’
십절소악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오문이 예정한 길은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이동로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길, 무림의 이목에 걸려들지 않는 길, 혈루마옥이 무림에 풀어놓은 간자들조차도 탐지하지 못한 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길이다.
헌데 그 길이 가장 위험한 통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다른 길을 아무렇게나 가도 안 된다. 그리하면 무림의 이목에 발각된다. 혈루마옥 간자들의 눈에 띈다. 한순간에 주목거리가 된다.
하오문이 수십 번에 걸쳐서 연구하고 파악한 길을 즉각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하오문에 간자가 있어서 이동로를 누설한 경우가.
물론 혈루마옥이 대상은 아니었다. 각기 다른 경우였고, 이해관계도 달랐다. 하지만 이동로가 적에게 누설되었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이동은 실패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실패했다.
하오문이 마련한 이동로를 따라가면 필사가 기다린다. 그렇다고 다른 길을 가도 필패다. 결국은 발각되고, 적에게 가로막혀서 목숨을 잃게 된다.
십벌소악은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너희, 살지 못하겠다.”
십절소악이 웃음기 뺀 얼굴로 말했다.
“간자입니까?”
음사가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십절소악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오문에 간자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입으로 자파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다. 그 일은…… 자신들이 죽고 나면 문주가 나서서 찾아낼 것이다. 이동로가 발각된 만큼 적은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까.
“산을 빠져나가자.”
하오문의 이동로를 버리면 결국은 누군가의 눈에 발각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관도로 나가서 버젓이 걸어가는 것이다. 위장을 해도 좋고.
누강이 반대했다.
“관도로 나가서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누강도 자신들의 입장을 안다. 십절소악이 산을 빠져나가자고 하는 이유도 안다. 하오문에 간자가 있다는 사실도 짐작한다. 모든 것을 알고 말한 것이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가다가 저것들을 또 만나자고?”
“그래도 그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은자(隱者)를 믿어보고 싶은데요.”
“은자?”
“날수통을 쓰는 사람…… 누군지 모르니 일단은 은자로 부를 수밖에요.”
“음.”
“그 사람 덕분에 두 번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대책이 강구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관도로 나가는 것보다는 은자를 믿는 쪽이 나을 듯해서요.”
“으음!”
십절소악이 신음을 흘렸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산 아래로 질주하고 싶었지만, 날수통을 쓰는 자가 산정을 가리켰다.
하오문이 지시한 이동로다.
“제길! 좋아! 가보지 뭐!”
십절소악이 툴툴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흠!”
가마를 타고 있는 여인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밀서를 흘렸다.
가마 곁에 시립해 있던 여인이 얼른 밀서를 주워서 다른 여인, 수월화에게 건넸다.
수월화가 밀지를 읽었다.
“어떻게 생각해?”
수월화가 읽기를 마치자 가마에 타고 있던 여인, 증평주가 물었다.
“생각을 모르겠네요.”
수월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기분 나빠. 이건 마치 우리 모두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러네요.”
“얼마든지 해보려면 해보라는 투잖아. 호호! 대단한 배짱이야.”
“제가 가보겠어요.”
수월화가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누강을 잡는데 시간이 조금 지체될 줄 알았다.
누강은 다른 길로 접어들 것이다. 하오문이 알려준 길은 당장 버릴 것이다. 지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헌데 저들은 하오문의 이동로를 계속 이용한다.
하오문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저들이 계속해서 이동로를 이용하고 있다고.
밀지에는 저들을 잡을 다음 장소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다.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사로(死路)임을 빤히 알면서 걸어갈 수 있는가.
증평주가 말했다.
“날수통을 쓴다는 자, 생포해와. 얼굴 좀 보게.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너답지 않았어.”
수월화는 서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즉시 달려가서 십절소악을 베고 싶다. 누강과 음사를 붙잡고 싶다.
그녀는 차분하게 지도를 살폈다.
하오문에서 명시해준 부분은 두 군데다. 두 군데 모두 옆으로 빠져나가기 어려운 외통수 길이다.
첫 번째 길은 버린다.
지금 즉시 출발하면 첫 번째 지점에서 낚아챌 수 있다. 하지만 또다시 날수통이 나타나면…….
날수통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지닌 지모가 꺼림칙하다. 무공으로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날수통까지 한 번에 잡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녀는 중평오화(仲平五花)를 쓸 생각이다.
녹천에 녹천오수가 있다면 중평에는 중평오화가 있다.
화천이 녹천오수 중에 일인이지만, 그녀는 중평오화 중에 한 명이 아니다.
“너희 둘, 십절소악을 죽여.”
“우리 둘이요?”
일화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반문했다. 옆에 있던 이화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십절소악 정도 상대하는 것은 그녀들 중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자에게 두 명이나 달라붙을 필요가 있나.
수월화가 말했다.
“날수통이 달려들 거야. 한 명은 날수통을 상대하고, 한 명은 가차 없이 십절소악을 쓰러트려.”
“그러죠.”
일화와 이화가 수긍했다.
그녀들도 날수통 때문에 두 번이나 실패한 사례를 알고 있다.
실패한 사람은 증평주의 제일호위였다. 중평오화가 무시하지 못할 강자다.
중평의 최강자 중에 한 명인 수월화도 실패했다.
수월화는 제일호위처럼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누강을 잡지 못했으니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 둘은 누강와 음사를 맡아.”
그녀가 삼화와 사화를 지목했다.
삼화와 사화가 마뜩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역시 날수통이 문제다. 누강과 음사 같은 자들은 손가락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지만 날수통이 나선다면…… 헌데 그자가 나서도 일화를 제치고 달려들 수 있을까? 누강과 음사가 잡히는 것을 막지는 못할 텐데?
“넌 나와 함께 날수통을 잡을 거야.”
그녀가 남은 오화에게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아주 몹시 놀랐다는 듯.
그녀가 일화에게 날수통을 상대하라고 할 때, 그녀 혼자서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화가 전력을 다할 수 있게끔 하기 위서 이화에게 십절소악을 맡긴 것이라고.
그런데…… 수월화가 직접 날수통을 맡겠다? 거기에 오화까지 가세시킨다? 허면 날수통을 상대하는 사람은 일화까지 해서 모두 세 명이나 된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오화가 물었다.
수월화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처럼 보여. 그자는 여우니까. 틈만 있으면 빠져나갈 것 같거든. 우리 셋이 삼재진(三才陣)을 쓰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