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第二十五章 은검(隱劍) (2)
이번에도 여인이다.
여인은 깊은 산중임에도 불구하고 얼룩덜룩한 당나귀를 타고 있다.
그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 저 여자는 어떻게 이런 깊은 산중까지 당나귀를 타고 왔을까?
허나 그런 의문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강하다!’
십절소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 굳이 손을 섞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강한지 짐작한다.
여인은 비록 나이는 어려 보인다.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음 직하다. 허나 무공인들…… 아니다. 여인은 십절소악이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최강자다.
‘혈루마옥!’
당금 무림에서 젊은 나이에 이토록 강한 고수라면 혈루마옥 사람들밖에는 없다. 예전이라면 유지자문이나 적벽검문도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저 여자!”
음사가 여인을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누강도 여인을 알아봤다. 다만 말을 하지 않고 인상만 찡그릴 뿐이다.
여인이 검왕을 죽였다.
다각! 다각! 다각!
여인이 산책이라도 하는 듯 매우 여유롭게 당나귀를 몰아왔다.
“저, 저 여자, 저 여자가 검왕을…….”
음사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십절소악은 그 한 마디로 여인의 모든 것을 알아냈다.
‘검왕을 죽인 여자.’
십절소악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예전 같으면 검왕이라는 말에 강한 호승심을 느꼈을 것이다.
검왕은 십마와 버금가는 고수였다. 십마를 상대할 수 있는, 혈천성을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도 고수 중에 한 명으로 지칭되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마공관 사건 이후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십마가 펑펑 나가떨어졌다.
일대일의 결전도 아니다. 십마 몇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도 나가떨어졌다.
그 사건 이후로 검왕은 더 이상 승부의 대상이 아니다.
검왕이라는 말을 들으면 호승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부러울 뿐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단시간에 그토록 강해지는가.
검왕은 더 이상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한다.
당나귀를 타고 오는 여인은 검왕을 죽였다.
이 여인을 어떻게 상대할까? 어떻게 막아낼까?
십절소악은 주위부터 두리번거렸다.
먼저 여인을 막아주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날수마선의 무공을 지닌 자가 주위에 있지 않을까 해서.
물론 아무도 없다. 길을 오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 미행자를 탐지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정말로 개미 한 마리 따라붙지 않았다.
설혹 먼젓번 여인을 막아주었던 자가 주위에 있다고 해도 당나귀를 탄 여인까지 막아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여자에게는 날수마선의 병기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검왕은 마공관의 무학을 모두 섭렵했다고 소문이 난 터인데, 그런 그가 여인에게 죽었을 때는…… 검왕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해도 막지 못한다.
‘제길!’
십절소악은 절망감을 느끼면서 검을 뽑았다.
늘 가볍게 휘두르던 장검…… 늘 나뭇가지처럼 가볍다고 생각했던 장검…… 그게 이토록 무거웠나?
다각! 다각! 다각!
여인이 당나귀를 타고 온다. 십절소악을 빤히 쳐다보면서.
스읏!
십절소악은 검을 겨눴다.
“당신은 어림도 없고…….”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여인도 십절소악의 무공을 알아봤다. 자신보다 하수라는 점을 한눈에 읽었다.
십절소악은 경계의 대상이 아니다.
“정말 기가 막히네.”
여인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녀도 주위에서 인기척을 탐지하지 못한 것 같다. 분명히 누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스릉!
여인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에 신형을 띄웠다.
쒜에에에엑!
여인의 검에서 검풍이 일어난다. 번갯불이 터진다.
“아!”
십절소악은 부지불식간 탄성을 토해냈다.
여인의 검은 살검이다. 분명히 죽음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름답게 보인다. 허나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몸을 즉각 움직였다.
파파파팟!
십절소악이 최후최절초라고 여기던 독마검법(毒痲劍法)이 신랄하게 펼쳐졌다.
까앙!
첫 번째 접점이 일어났다.
검와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십절소악이 자신하던 독마검법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까앙! 깡! 깡! 깡!
접점이 일어날 때마다 검이 부러져 나갔다. 기다란 장검이 모두 잘려나가고 급기야는 손잡이만 남았다.
보검으로 철검을 자른 것이 아니다.
여인은 본인의 진신 내공으로 독마검법을 잘라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 여인의 검을 막을 수 없다. 어떤 초식도, 어떤 움직임도 생각나지 않는다.
쒜에에에엑!
여인은 무자비하게 검을 내둘렀다. 기필코 십절소악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듯이. 그때,
찰칵! 쒜엑!
어디선가 묘한 쇳소리가 일어났다.
십절소악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아버릴 수 없었던 구원의 소리다.
이제나저제나 이 소리가 들리기를 고대했다. 이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여인에게 통할지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꼭 들려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까앙!
여인이 검을 돌려 쇳소리를 쳐냈다.
십절소악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신형을 뒤로 빼냈다.
여인에게 달려들 수도 있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쇳소리를 쳐낸 여인이 방향을 틀어서 그를 공격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처럼 여겨진다.
물러서는 게 상책이다.
“안 되겠다.”
그는 물러서자마자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누강과 음사에게 한 말이다.
누강과 음사도 상황을 파악했다.
숨어서 날수통을 쓰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가 검왕을 능가할 리는 없다. 설혹 검왕이라고 해도 여인을 감당해 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십절소악이 여인의 무공을 증명해봤다.
그 결과, 그는 일초지적에 불과하다. 여인은 정말 강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지금 즉시 도주해야 한다.
여인은 십절소악을 뒤쫓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는 것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자신의 검만 쳐다봤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
여인의 눈길이 검신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번 겨룸으로 흠집이 난 것 같다.
“날…… 수통이 이렇게 강했나?”
한참 만에 흘러나온 소리다.
여전히 여인의 눈길은 검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뚫어지게 검신만 쏘아본다.
확실하다. 검에 흠집이 생겼다.
여인이 우측 숲을 쳐다보며 말했다.
“날수마선의 날수통으로는 이렇게 하지 못해요. 아마도 개량을 한 듯한데, 궁금하군요. 어떤 분이신데 날수통을 개량할 수 있는지. 나오실래요?”
그녀가 쳐다보는 숲에는 정적만 흐른다.
“안 나오시면 이 사람들, 죽어요.”
여인이 검신을 만지작거리더니 힘을 주어 분질렀다.
뚝! 뚝!
검신이 마치 엿가락처럼 가볍게 부러져나갔다.
여인은 검편(劍片)을 들고 숲을 쳐다봤다.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서 이 사람들을 죽여볼 게요. 날수통으로 막으실 거죠? 제가 빠른지 손잡이 없는 비수가 빠른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네요.”
스읏!
여인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우측 숲을 향하고 있다. 십절소악 등 세 명을 죽이려고 하면서도 눈길은 숲에서 떼지 않는다.
십절소악도 숲을 봤다. 누강과 음사도 숲을 쳐다봤다. 우측 숲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여인이 계속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숲은 여전히 조용하다.
“미련한 사람이군요.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여인이 싱긋 웃었다. 허나 그 웃음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졌다.
쒜에에엑!
손에 들렸던 검편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쏘아졌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편들이 공중에서 산산조각나서 마치 모래알처럼 뿌려졌다는 것이다.
팟! 파파파파파팟!
검편이 쪼개지면서 가는 빗방울이 되어 쏟아졌다.
헌데 그 전에 이루어진 일이 있다.
탁!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오직 여인의 느낌에만 잡혔다.
‘선공(先攻)!’
숲 속에 있는 자가 날수통을 쏘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비틀었다. 그녀가 막 검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쉿!
코앞으로 손잡이 없는 비수가 스쳐 지나갔다.
이런 비수가 그녀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는 있다.
파파파팟! 투투투투툭!
쪼개진 검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십절소악은 뒤로 신형을 빼냈고, 누강과 음사는 좌우로 피했다.
허나 검편 조각들은 그들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들이 미처 신형을 움직이기도 전에 빨리 도착한 검편들은 벌써 땅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신형을 멈췄을 때, 땅에는 수많은 검편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분명히 검편이 그들보다 빨랐다.
모래알처럼 쏟아진 검편에 고슴도치가 되어서 쓰러져 있어야 할 그들…… 그러나 여인이 손속에 사정을 남겼는지, 방향을 틀어서 전개하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휴우!”
음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들이 검편을 피해서 움직이는 순간, 여인도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인이 당나귀 위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 동작은 분명히 날아오는 물체를 피하는 동작이다.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돼!’
그들은 숲 속에 있는 자가 자신들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인이 또다시 검편을 쏘아낸다면 속수무책이다.
십절소악이 산정을 향해 살짝 눈짓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 빽 고함을 쳤다.
“형제! 부탁하네!”
쒜에엑! 쒜에에엑!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신형을 쏘아냈다. 물론 십절소악이 눈짓으로 가리킨 산정 쪽이다. 험한 산비탈을 쏘아 올라간 것이다.
대체로 고수를 앞에 놓고 산정으로 도주하는 것은 썩 좋은 도주책이 아니다.
고수는 힘센 호랑이다. 도주자는 가녀린 토끼다.
토끼가 제 아무리 빨리 도주를 해도 호랑이의 도약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제 아무리 숨가쁘게 도주해도 여인이 도약을 시작하면 곧 잡히고 만다.
산정보다는 도주하는데 힘이 덜 드는 계곡 쪽으로 도주하는 게 낫다. 물론 그것도 힘센 호랑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산정보다도 계곡 쪽이 조금 낫다.
그들은 산정으로 도주했다.
여인은 도주하는 그들을 힐끔 쳐다봤을 뿐…… 그녀는 나귀를 몰아 우측 숲으로 향했다.
다각! 다각! 다각!
당나귀가 참나무 군락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여인은 피식 웃음을 흘려버렸다.
그녀가 찾은 곳……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이 앉았던 흔적은 있다. 그러니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헌데 지금은 없다.
그는 그녀가 오기 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두 눈 빤히 뜨고 주시하는 가운데 몸을 빼낸 것이다.
어떻게 도주했을까?
그녀는 당나귀의 목덜미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당나귀가 움푹 주저앉은 풀더미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여인이 참나무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나. 당신, 이제는 도망가지 못하는데.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