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第二十四章 사중몽(死中夢) (4)
“신혼살림은 어떻드냐?”
“죄송합니다.”
“아이가 있으니 느낌이 새롭지?”
“죄송합니다.”
“쯧! 아이에게 정이 붙지 않는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화천은 죄송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혈루마옥 고수들을 많이 잃었다. 그 죄는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
그와 함께 떠났던 자들 중에 귀환자는 한 명도 없다.
모두 죽었다는 소리다.
유지자문에게 정통으로 걸렸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기다렸는데.
혈오를 태어나게 한 것이 잘못인가?
이 부분, 그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 부분만큼은 어떤 공로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촌장이 되물어오니 이 부분도 어쩐지 죄가 되는 것 같다.
아이에게 정이 붙지 않는다? 맞다. 정이 붙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내 자식이라는 느낌이 없다. 누미가 안고 있으니 내 자식인가 싶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촌장에게 죄스러웠다.
모든 것이 다 죄송해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한다.
혈루마옥으로 돌아왔지만 촌장이 대면을 거절했다. 혈루마옥에 들어설 때는 외인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수하들,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처지다.
이렇게 불러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다.
“누미와는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용케도 받아주었구나.”
“네.”
“누미, 그 아이를 써야겠다.”
“네?”
화천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적벽검문을 멸문시켰는데…… 생존자가 네 명 있었다.”
“…….”
화천은 숨죽였다.
녹천이 적벽검문을 공격했다. 그 공격으로 녹천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적벽검문만큼은 아니어도 희생자가 상당수에 이른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생존자가 생겼다?
사부가 실수를 해?
사부가 실수를 할 리는 없다. 만약 적벽검문에 생존자가 생겼다면 요행히 횡액을 면한 자일 것이다. 즉, 멸문당하는 자리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누미가 생존자다. 누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검왕이 생존자다. 검왕도 적벽검문이 멸문할 때 없었다.
또 누가 있나? 이 두 사람 외에 딱히 주목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촌장이 화천의 생각을 읽은 듯, 남은 두 사람을 말했다.
“누강과 누산.”
“아! 누강.”
화천이 얕게 중얼거렸다.
누강이라면 이름자 정도는 들어봤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자는 아니다. 솔직히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다. 그런 자들이라면 한 수레로 데려와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다.
다른 한 명은 누구라고? 누산? 누산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촌장이 말했다.
“누산은 적벽검문의 재정을 담당하던 재인(才人)이다. 적벽검문 역대 재인들 중에 단연 으뜸이라는 평도 있다.”
“아! 네.”
화천은 비로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산과 검왕…… 후후! 누산이 적벽검문에 입문했을 때, 검문주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누산이 있으니 우리 모두가 수련하고 싶은 무공들을 마음 편히, 최적의 환경에서 수련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화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적벽검문 문주를 만나본 적은 없다. 하지만 적벽검문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안목을 지녔을 게다. 그런 사람이 그만한 평가를 했다면…… 누산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된다.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검왕이 들어왔단 말이지. 그러자 적벽검문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화천은 이번에도 아무 소리 못 했다.
검왕은 자타공인 천하제일 무재다. 적벽검문 제일의 무인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론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적벽검문 사람도, 외인들도.
적벽검문 제일의 기재를 받아들였는데 왜 한숨을 쉴까?
“재주도 과하면 하늘이 시샘하는 법. 한 문파에 복을 둘이나 주었으니…… 필히 재난이 닥치겠구나.”
‘동의하지 못합니다.’
화천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복이 둘이면 그만큼 흥하는 것이다. 문파를 흥하는 정도가 아니라 일약 절대문파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둘이 싸우지 않고 협조한다면.
대부분 한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문주의 역량에 따라서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다.
적벽검문 문주는 두 사람을 조율하기 힘들었나 보다.
촌장은 적벽검문주를 제일의 위치에 올려놓고 말하는 것이지만, 화천이 듣기에는 삼류문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자신없는 말을 중얼거린 것이겠지.
촌장이 말했다.
“묘한 것은…… 적벽검문이 멸문한 시점에서 생존자 네 명의 위치가 모두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환히 꿰고 있었지. 그때는 어느 한 사람도 숨지 않았어.”
“…….”
“그 후, 검왕이 죽었다. 그리고 상황이 달라진다. 누미는 여기 있고, 누산은 감시하에 있다. 헌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누강, 그자가 증발했어.”
‘깊은 산중으로 은거라도 한 것이…….’
좌절감이 깊은 무인이라면 은거를 택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누강이 사라진 데 대해 아무 느낌도 없었다. 촌장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단일(但一)과 사삭(四索)이 누강을 감시하고 있었다.”
“헉!”
화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뱉었다.
“당신, 사부가 사라졌어.”
화천이 지나가는 말처럼 서두를 뗐다.
“사부님이요? 사라졌다는 말은?”
“촌장님의 그림자가 감시하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어.”
“촌장님의 그림자라면…… 그 기분 나쁜 사람들요?”
화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촌장은 검왕의 죽음을 의아해했다. 검왕의 죽음에 어떤 함정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검왕이 꼭 녹천주와 싸워야 했을까?
검왕은 녹천주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기습을 전개하는 것도 가능했다. 적어도 그토록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촌장 입장에서는 검왕의 죽음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른 곳에서 줄이 꼬였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아야 할 미행이 실패했다. 감쪽같이 눈앞에서 증발해 버렸다. 두 눈 빤히 뜨고 있는데.
“사부님이 그럴 분이 아닌데요?”
누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화천의 누미의 고혹적인 모습에 탄식을 흘렸다.
누미는 천염(天艶)을 지녔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말 한 마디, 고갯짓 하나에 요염함이 묻어나온다.
혈오를 낳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난 후, 염색(艶色)이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졌다. 아니, 아이를 낳고 난 후에도 누미를 봤는데 이렇게까지 요염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중원을 다녀오는 동안, 아이를 기르는 동안 색녀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누미는 고개를 갸웃거린 것뿐인데, 불현듯 욕념이 치민다.
누미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사부님은 절대로 그 사람들을 따돌리지 못해요.”
“하오문이 개입한 모양이야.”
“아! 그럼 또 모르죠.”
“적벽검문에서 사부의 위치가……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나?”
“풋!”
누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적벽검문에서 누강의 위치는 아주 보잘것없다. 단지 서열만 지키고 있는 맹꽁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적벽검문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무공만 놓고 볼 때는 그중에서도 중간 정도의 위치밖에 되지 않는다.
숨기는 것은 없다. 이게 모든 진실이다.
화천이 한 마디 더 거들었다.
“하오문은 이번 일에 많은 것을 걸었어. 자칫하면 혈루마옥의 제일 주적이 되는 위험도 감수했단 말이지.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누강을 숨겼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거야.”
“없어요. 그럴 만한 이유.”
“으음! 그렇게 확신한다면야…….”
“이게 당신을 부른 이유예요?”
“그래.”
“그 말인즉, 나보고 사부를 찾아내라는 거죠?”
“그래.”
“그래요. 찾아줄게요.”
“정말인가?”
화천은 반색했다.
촌장은 이번 일의 대가로 그의 복직을 약속했다. 옛 위치로 복원시켜줄 것을 확약했다.
누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누미는 너무 간단하게 말한다.
“그럼 남은 일 해요.”
“남은 일이라면?”
“우리 정식으로 혼인해요.”
“뭐라고?”
“당신과 증평 공주 간에 염문이 자자하더군요. 둘이 결혼할 뻔했다고요? 그런 말 더 듣고 싶지 않기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으니 정식으로 아빠도 만들어줘야겠고. 어때요? 할래요?”
“누강을 찾고 난 다음에 하지.”
“호호호! 그게 뭐 어렵다고요? 촌장님 앞에 가서 냉수 한 사발 떠놓고 약조해요. 그럼 난 만족해요.”
“그, 그러지.”
화천은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으려니와…… 누미가 싫지 않다. 아니, 그녀의 치마폭이 그립다. 그녀는 단지 육감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녀와 살을 섞다 보면 온몸이 녹아드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쾌락을 맛본다.
한때, 그는 자신이 춘약(春藥) 같은 것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녀와의 운우지락은 그토록 위험하고 강렬하다.
누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겪어보는 요물임에 틀림없다. 요물인 줄 알면서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점점 그 속으로 함몰되어 가고 싶은 요물…….
누미는 저항할 줄 모르는 화천을 보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누미는 혈루마옥에서 묘한 입장이다. 그녀는 자의로 혈루마옥에 들어서지 않았다. 끌려 들어왔다. 또한 자의로 임신하지 않았다. 억지로 임신을 강요당했다.
그녀가 낳은 아이는 혈오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혈오를 통해서 중원으로 빠져나갔다. 혈오를 통해야만 혈루마옥의 저주가 풀어진다. 그리고 혈오는 오직 누미의 말만 듣는다.
누미가 살아라 하면 살고, 죽어라 하면 죽는 게 혈오다.
누미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그녀가 혈루마옥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혈루마옥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외인인 것이다.
화천의 입장도 애매하다. 그는 혈루마옥의 중추였지만 한순간에 외톨이로 밀려나 버렸다.
이 두 사람이 혼약을 맺는다.
촌장이 누미에게 물었다.
“이곳 사람이 되겠느냐?”
누미가 대답했다.
“네.”
촌장이 화천에게 물었다.
“후회는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네가 하는 말 한 마디에 네 운명이 결정된다. 누미를 아내로 맞이하겠느냐?”
“네.”
화천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다. 두 사람, 혼인을 승낙한다.”
촌장이 옅은 웃음을 띠면서 혼인 승낙을 내렸다.
“그래도 화천이더냐?”
“그래요.”
“혈오를 통해 저주를 푼 사람들…… 사실은 혈오의 수족이겠지?”
“어멋!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억울해요.”
“네 그 염미(艶美).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악(惡)에서 피어난 꽃, 악화(惡花)다. 너무 활짝 피지 말거라.”
“점점 이상하신 말씀만…….”
“네가 무엇을 획책하는지 안다.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멈춰라. 이게 아마도 네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가 될지니. 선을 넘지만 말거라.”
누미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역시 촌장은 그녀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다시 혈루마옥에 돌아왔는지도. 혈오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도. 왜 화천을 남편으로 맞이하는지도.
‘늦었어. 이젠 아무도 날 막지 못해. 적벽검문까지 죽여버린 나야. 누가 날 막아.’
누미는 환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절대로 선은 안 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