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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四章 사중몽(死中夢) (1)
화천은 혈루마옥으로 돌아왔다.
혈루마옥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 녹천과 증평 사람들 중 상당수가 중원 무림으로 들어섰지만, 자의 혹은 타의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타의로 남은 사람들은 아직 저주를 풀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의로 남은 사람들은…… 중원 땅을 밟는 것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부류도 있다.
중원으로 들어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꾹 눌러 참고 있는 사람들이다.
촌장이 그렇다.
촌장은 녹천주와 증평주를 중원에 보내놓고도 정작 자신은 혈루마옥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촌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혈루마옥으로 와야 한다.
“기다려주십시오.”
“뭐라고?”
“방문 사실을 통보하겠습니다.”
“지금 뭐라는 건가!”
“규칙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갈흠(碣欽)이 머리를 숙여 보인다.
화천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갈흠은 녹천 사람이다. 무재(武才)가 탁월한 편이 아니라서 겨우 절곡이나 지키는 하수(下手)다.
그에게 말대꾸할 위치에 있지도 않은 자다.
“나, 화천이다.”
화천이 짧게 말했다.
그는 이 한 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토해냈다.
감히 혈루마옥에서 화천이라는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느냐! 녹천오수 중에서도 으뜸인 화천을! 더군다나 네놈이 날 무시하다니. 안면을 이런 식으로 바꿔도 좋단 말이냐!
갈흠이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편히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촌장님이 워낙 바쁘셔서 답변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혈루마옥에 오지 않으려고 했다.
검왕에게 패했을 때, 검왕이 말했다. 혈루마옥으로 돌아가라고. 가서 아비 노릇 하라고.
그 말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혈루마옥으로 돌아가면 안 돼!’
그가 혈루마옥으로 회귀하지 않은 데는 데리고 나온 수족을 모두 잃었다는 자괴감뿐만이 아니라 검왕의 얄팍한 간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심정도 숨겨 있었다.
헌데 검왕이 죽었다?
그것도 증평 수월화에게?
그 말을 그대로 해석하면 수월화의 무공이 그의 무공보다 월등히 높다는 뜻이지 않나.
그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검왕이 펼쳤다는 혈영마공의 폭혈을 자신이 맞이한다면 수월화처럼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은 불가(不可)다.
검왕이 폭혈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졌다. 하물며 폭혈까지 펼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수월화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할 수도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수월화를 잘 안다. 평생 동안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살아온 관계인데 모를 리 있는가.
수월화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속옷 색깔까지도 안다.
수월화가 꼬마였을 때부터, 다 큰 여인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켜봤다.
혈루마옥의 선남은 화천이다.
혈루마옥의 선녀는 수월화다.
선남과 선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둘은 남자와 여자다.
만약 혈루마옥의 저주가 일부라도 풀리지 않았다면, 아직도 고착상태라면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어 안았을 게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아이도 생겼을 게고.
혈루마옥의 저주가 미세하게 금이 가면서부터, 저주를 풀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사람 사이에 골이 팼다.
증평과 녹천은 같이 갈 수 없다.
태생적 한계로…… 이것 역시 혈루마옥의 저주겠지만…… 둘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
혈루마옥은 증평과 녹천이 섞여 있다.
아내는 증평이요, 사내는 녹천인 경우가 태반이다.
둘이 함께할 수 없다면 아내와 남편도 함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태생이 갈라진다.
사내는 녹천에 몸을 담게 되고, 여인은 증평 소속이 된다.
피보다 진한 것, 혈육보다 진한 것…… 혈루마옥의 저주다. 태생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운명이다.
이 부분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막연하게…… 지금 알고 있는 것은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기 시작하면서 증평과 녹천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더 면밀히 관찰한다.
수월화는 화천을, 화천은 수월화를…… 언제 손속을 마주쳐도 이길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결국 수월화가 이긴 것인가.
검왕이 수월화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 순간, 그는 즉시 회향했다.
아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허나 만나려고 한다.
검왕이 아이의 아빠가 되라고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수월화를 꺾을 수 있는 해답이 있다.
이것이 설혹 검왕이 안배한 간계라고 해도…… 뭐 어떤가? 이제는 검왕도 죽고 없는데.
중원 무림은 혈루마옥을 막지 못한다.
남은 것은 증평이냐, 녹천이냐 하는 혈루마옥 생존자들끼리의 쟁투뿐이다.
갈흠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촌장님께서는 만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
화천은 할 말이 없었다.
패군지장이 무엇을 말하랴. 수족을 모두 잃게 돌아온 주제에 무엇을 요구하랴.
갈흠이 말했다.
“그래도 사람의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처자식은 보고 가시랍니다. 하루 여유를 주신다고…… 편하게 밥이나 먹고, 회포도 풀고…… 내일 아침에 떠나시랍니다.”
갈흠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화천은 누미를 만났다.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누미!
그녀는 그가 찾아왔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태연하게 혈오에게 젖을 물린 채 그를 쳐다봤다.
백주대낮에 가슴을 환히 연 채 젖을 물린다.
화천이 놀란 것은…… 변화한 누미 모습 때문이다.
“아!”
화천은 부지불식간 탄성을 토해냈다.
세상에 이런 여인이 있었나? 이건 도대체가…… 온몸이 색기(色氣)로 똘똘 뭉친 여인이라니!
누미는 여자가 아니다. 색(色) 그 자체다.
화천은 욕정이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을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까이 가서는 안 될 여자라는 느낌도 받았다.
여인이 위험해서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 같은 사람이 안을 수 없는…… 뭐랄까? 너무 존귀해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여인이랄까?
누미는 그가 숱하게 품었던 여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누미의 신체 모든 부분이 환히 그려진다.
그녀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가? 그렇게 부둥켜 안고 살았는데.
그런데도 그녀가 멀게 느껴진다.
욕정은 들끓는데, 가까이 갈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누미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땅 안 꺼져. 들어와.”
“음! 많이 변했군.”
그가 걸어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누미를 경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누미가 들어오라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이가 많이 컸군.”
그는 혈오를 쳐다봤다.
혈오는 눈이 똘망똘망하다. 흑요석 같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미의 가슴을 꽉 쥐고, 입으로는 연신 젖을 빨면서.
이 갓난아기가 벌써 상당수의 저주를 풀어냈다.
이 아이를 통한 사람들이 중원 땅을 딛기 시작했고, 엄청난 무인이 되어 활약한다.
“안아볼래?”
화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미가 아이를 떼어내어 그에게 건넸다.
화천은 혈오를 받아들었다.
아이는 울지 않는다. 빨고 있던 젖을 빼앗겼는데도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는다.
그는 아이를 가슴에 품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원래 아이에게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를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 외에는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정이라는 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호호! 안 되겠다. 이리 줘.”
누미가 다시 혈오를 안아갔다.
그녀는 화천이 무감정하게 아이를 받아 안았는데도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검왕에게 패했다며?”
“음.”
“증평 여자, 봤어. 그 여자가 검왕을 죽인 거야?”
“그래.”
“당신은 검왕에게 패하고, 그 여자는 당신을 이긴 검왕을 죽이고. 호호! 당신, 끈 떨어진 연이네?”
“…….”
“여긴 왜 왔어?”
“…….”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지?”
꿀꺽!
화천은 마른 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해서 혈루마옥을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누미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미에 대한 미련이나 연모, 혹은 아내로서의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촌장님이 만나주지 않을 것은 뻔하고, 여기 와봐야 푸대접만 받을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
“결국 이 아이네.”
“검왕이…… 아이의 아빠가 되라고 했다.”
화천은 자신이 생각해도 치졸하다 싶은 말을 했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이런 말을 했을까? 왜 검왕을 끌어들였을까? 그냥 솔직히 아이가 필요해서 왔다고 말해도 될 텐데. 그 속이 너무 빤히 보이는데.
누미가 속을 들여다봤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도와줄게.”
“…….”
“이 아이에게는 힘이 있어. 아무도 모르는 힘. 그 힘을 어떻게 쓸까 생각 중이야.”
“어, 어떤 힘이?”
“어떤 사람을 단숨에 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이긴 해. 하지만 그러려면 정말 아이 아빠가 되어야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
“내일 아침에는 나가야 한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구차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할 때는 몰랐다. 헌데 막상 말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다.
내일 아침에는 나가야 한다. 아이 아빠가 되든 뭐가 되든 고수도 되고 싶다. 너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 아니면 네가 촌장에게 말을 해주던가.
사내가 이렇게 비굴해도 좋을까 싶다.
누미는 이번 말뜻도 알아챘다.
“말은 해줄게. 있게 해줄 거야. 하지만 여기 머물려면 수모가 만만치 않을 거야. 알지?”
“그 정도는…….”
“그러나저러나 검왕…… 그 사람 되게 웃겨.”
“……?”
“나 중원에 나갔었어. 적벽검문이 무너질 때 그 자리에 있었거든. 다 봤지.”
“그랬나.”
“그런데 다시 돌아왔어. 혈오가 이곳에서만 필요한 이유를 알았거든. 아주 거대한 힘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내야 할 것 같아서.”
“…….”
“검왕이 아이 아빠가 되라고 했다며?”
“정확히 말하면 혈오에게 돌아가라고.”
“그 사람,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 당신을 내게 보낸 거지. 호호!”
화천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것도 검왕 생각대로인가? 검왕은 일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일까? 자신이 이곳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혹시 그의 죽음도 계획된 것일까?
검왕이 죽지 않았다면 그는 여기 오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보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누미가 혈오를 내민다. 혈오에게 엄청난 힘이 있다면서.
‘제길!’
화천은 뭔가 삭히지 않은 것을 먹은 것처럼 찜찜했다.
혈오에게 기대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꼭 이용당하는 기분이 든다.
누미가 아이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살 생각이면 내 남편 노릇도 해야지? 나, 독수공방한 지 오래됐어.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