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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三章 인화시(引火柴) (5)
“검왕이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귀타가 보고했다.
“들었다.”
“네?”
“허허허! 강호 소문이 네 발보다 빠르구나.”
“아! 네.”
귀타가 고개를 숙였다.
검왕은 살아있어야 한다. 누산과 유지자문, 이들과 함께 혈루마옥을 옥좨야 한다. 검왕이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유지자문이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은 정녕 생각하지 못했다.
“혈루마옥이 저주를 푼 것이 확실한 듯합니다.”
“…….”
“한두 명 정도 우연히 푼 것이 아닌 듯합니다. 혈루마옥 전체가 저주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혈오가 탄생한 듯…….”
검성주가 말이 없자, 귀타는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고변했다.
그는 검성주에게 대비책을 세우라 마라 하고 조언할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해서 당장이라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 검성주가 조용히 말했다.
“귀타, 찻물을 준비해주게.”
“네?”
“손님이 오셨으니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겠나.”
순간! 귀타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예기가 피어올랐다.
일순간에 피가 차디차게 굳어버린다. 전신감각이 날카롭게 피어난다. 귀가 열리고, 눈이 밝아지고, 후각이 세상의 모든 냄새를 빨아들인다.
손님!
허나 귀타는 손님을 찾아내지 못했다.
검성주가 말했다.
“지옥은 갈지언정 이곳은 마다할 분이 오셨네. 아주 좋은 차로 준비해 주시게.”
귀타의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처음부터 서 있었던 듯 한 사람이 서 있다.
극에 이른 은신술이다.
‘음!’
귀타는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도 이쪽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은신술이라면 나름대로 조예가 깊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자는 그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렸다. 검성주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곁에 있는 줄도 몰랐다. 경각심을 돋운 상태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당금 무림에서 이토록 은신술이 뛰어난 사람은…… 그의 이목을 감쪽같이 따돌릴 수 있는 사람은…… 전 중원을 통틀어 딱 한 명, 비형은잠뿐이다.
귀타가 검성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좋은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놈이 죽는 자리에…… 있으셨소?”
“그렇습니다.”
“그놈이 십마와 함께 움직인다는 말은 전해 들었소만…… 휴우! 어떻게 죽었소?”
비형은잠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신을 비롯한 십마들이 싸움 한 번 걸어보지 못하고 길을 열어준 것부터 해서 검왕이 혈영마공 중 폭멸을 펼치며 죽는 모습까지 그림 그리듯이 설명했다.
성주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허허! 그놈이…… 혈영마공을 수련한 게…… 잔양마소가 필요해서였던가.”
성주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수월화는 잔양마소마저 밀쳐내더군요. 그때 사용한 공부는 음공(陰功). 멀리서 지켜본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음공 같아 보였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었다.
비형은잠은 검성주가 무슨 행동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찾아온 것이다.
검성주도 그 뜻을 안다.
허나 두 사람 모두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검성주는 비형은잠에게 되물을 수 있다.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고, 일부러 검성까지 찾아와서 검왕의 죽음을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냐고.
허면 비형은잠도 딱히 할 말이 없다.
두 사람은 묵묵히 차만 마셨다.
검성주는 비형은잠이 돌아간 후에도 빈 찻잔을 앞에 놓고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
“차를 다시 내올까요?”
보다 못해서 귀타가 물었다.
검성주의 사색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기운을 잃고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을 붙였다.
“잔양마소라…….”
검성주는 대답 대신 비형은잠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되새겼다.
‘검왕이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귀타는 마음속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검성주는 검왕의 죽음을 벌써 두 번이나 겪었다. 평소 검왕을 친자식처럼 여겼던 분이니 상심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게다. 검왕을 검성에서 쫓아낼 때부터 가슴이 찢어지셨겠지만.
“귀타.”
노성주가 문득 생각난 듯 귀타를 불렀다.
“네.”
귀타는 즉시 대답했다.
“자네, 혈천성주와 싸울 수 있나?”
“……싸우겠습니다.”
귀타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약간, 한 호흡쯤 쉬었다가 대답했다.
혈천성주와 싸워? 싸움이 되지 않는다. 혈천성주 앞에서는 은신술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게다.
그래도 노성주가 싸우라고 하면 싸운다.
검성주가 귀타를 쳐다보며 말했다.
“싸움이 안 되겠지?”
“싸워야 한다면 싸우겠습니다. 언제 싸워야 합니까?”
“개죽음이야.”
“괜찮습니다. 오래전부터……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목숨을 드릴 각오가 서 있습니다.”
“혈천성주와 싸우라고 하면 어떻게 싸울 셈인가?”
귀타는 인상부터 찡그렸다.
십마는 우열을 논할 수 없는 최강자들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혈천성주는 단연 독보적이다.
십마 중 그 누구와도 싸울 수 없는데 하물며 혈천성주라.
‘죽을 수밖에 없다 이거지. 그렇다고 곱게 죽어줄 수는 없고…… 내 목숨을 주는 대가로 사지 중 하나는 받아내야 하지 않겠나. 그 정도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하지만 혈천성주의 사지를 받아낸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첫째, 무공으로는 절대 받아내지 못한다.
둘째, 암수는 사용하지 못한다. 암수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검성의 체면 문제다. 검성 사람이 암수를 쓴 데서야.
정정당당하게 싸우되 상처를 입혀야 한다.
쉽지 않다. 머릿속에 확! 하고 생각나는 게 없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하나.
‘검왕처럼 혈영마공이라도 익혔다면 나도 잔양마소로…… 아냐, 폭멸은 너무 약해. 검왕도 실패했잖아. 그러니 거기에 한 수 더 가미해야 돼.’
혈천성주는 너무도 거대한 상대다. 그런 사람과 싸우면서 승부를 확신할 수 없는 초식을 사용할 수는 없다. 적어도 사지 중에 하나를 받아낼 만한 확실한 무공이 필요하다.
잔양마소는 폭약을 터트렸을 때처럼 아주 강력한 공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혈영마공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잔양마소라도 있었으면 싶지만,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기에 뭐라도 조금 더 보태서 보다 확실한 확증을 얻고 싶다.
‘잔양마소를 펼치면 필히 죽을 것…… 기왕 죽을 것이라면…….’
초식을 펼치지 않는다. 잔양마소의 효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상대와 가까이 있는 것뿐…… 초식을 펼치는 것보다 상대를 끌어안는 수법이 더 효과적이다.
칼을 맞아준다. 그리고 바싹 붙는다.
이것이 검왕이 했던 싸움보다 더 효과적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명 죽으면서 죽인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과는 많이 다른 말이다.
‘검왕은 죽는 순간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무인답게 깨끗하게 오직 무공으로만…….’
귀타는 이번에도 마음속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검왕의 행동은 싸움에 있지 않다.
혈영마공을 수련하는 순간부터 무인의 자존심 같은 것은 이미 내던진 게다.
검왕은 십마와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도의 상극은 마도, 마도의 원수는 정도……이 두 부류의 무인들은 한솥밥을 먹은 적이 없다. 헌데 검왕이…… 함께 자고 함께 먹었다.
정도를 버리고 마도를 택했다. 변절자!
검왕이 그 정도까지 타락하면서 혈루마옥을 상대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자극적인 수단을 강구했어도 무방할 듯싶다. 예를 들어 암수나 독, 화약 같은 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명예 같은 것은 이미 땅에 떨어진 후이니까.
잔양마소가 검왕 최대의 비책이었을 수도 있다. 잔양마소를 철저하게 믿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그것은 당사자밖에 모르는 일이니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분명히 한두 수 정도 보완할 수 있었어.’
노성주가 귀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결국은 암수야. 암수를 쓰려고 마도를 택한 거겠지. 암수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혈영마공을 수련한 것도 그 때문일 게고. 헌데 정작 쓰지 않았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헌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뭐가 걸리는지 모르겠는데, 좌우지간 찜찜하다. 검왕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개운치가 않다.
이 부분, 검성주도 명확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뭔가가 있는데 무엇인가를 모르겠으니 고민하는 게다. 숨겨진 게 있는데.
검왕이 다른 물음을 던져왔다.
“누강이 무덤을 보름이나 지켰다고?”
역시 혈천성주와의 싸움은 헛말이었다. 검왕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사례를 들었을 뿐이다.
“네.”
귀타가 대답했다.
“누강이 보름이나 시신을 지켰다면…… 죽음만은 분명한 것…… 허허! 그렇게 갔는가.”
“…….”
“보름이면 시신은 이미 썩고 있을 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빠르게…… 누군가가 부패가 빨리 진행되도록 손을 쓴 듯합니다.”
“혈루마옥에 그런 사법(死法)이 있지. 백회혈인가 천령혈인가를 통해서 부독(腐毒)을 넣는다고 들었네만. 죽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쓰인다는 소리도 들었고.”
‘아마 그 수법에 당한 것 같습니다.’
귀타는 침묵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혈천성주를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그가 혈천성주와 싸울 일은 없다. 검성주가 그런 일을 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혈천성주와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싸울 것인지만 물었다. 검왕이 그런 싸움을 했기 때문에.
검왕 대 혈루마옥? 상대가 안 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도 유만분수지 그런 바위 치기가 없다. 자신이 혈천성주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싸움이었다.
‘뭔가가 있긴 있어. 하지만 검왕은 분명히 죽었고, 시신까지 썩었어. 죽은 것은 확실해. 그럼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뭘 남겼지? 뭔가가 있는데.’
현장에 있던 십마가 알아내지 못했다.
천하를 주시하고 있는 노성주도 생각만 거듭한다.
혈루마옥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계속해서 누강을 뒤쫓는 것이겠지. 자신들이 죽인 검왕의 무덤을 파헤치기까지 하면서.
마치 수수께끼 같다.
검왕이 던진 수수께끼를 누가 먼저 푸느냐.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이 문제를 누가 푸느냐에 따라서 혈루마옥을 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사실, 그 문제를 풀어도 혈루마옥을 상대할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닌데.
“귀타, 누강을 쫓아봐.”
이번에는 진짜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귀타는 즉시 대답했다.
“누강은 폭풍의 핵이 되었어. 누강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야. 혈루마옥을 비롯해서…… 나 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누강을 주시하겠지. 검왕이 남긴 숙제를 풀기 위해서.”
검성주가 말하는 바를 안다.
“충분히 조심하겠습니다.”
“조심 정도로는 부족해. 멀리 떨어져서 주시하기만 해.”
검성주는 귀타의 능력을 잘 안다.
귀타는 추적이나 은신술에 대해서는 비형은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멀리 떨어져서 주시만 하란다.
혈루마옥 사람들도 누강을 뒤쫓을 것이라고 이미 단정했다. 아니, 그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검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었으니까. 그의 시신이 드러나 있으니까.
검성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검성 뒤쪽에 위치한 가산(假山)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귀타는 크게 놀라 눈만 끔뻑였다.
가산에는 귀선부가 있다. 검성 소속이면서, 검성주의 직속 휘하이면서 검성주의 말을 가장 듣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만 하는 요상한 집단이 있다.
검성주는 귀선부의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헌데 지금 귀선부로 간다. 성주께서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