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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111화 (111/225)

# 111

第二十三章 인화시(引火柴) (1)

가마를 타고 온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서 검왕을 쳐다본다.

당나귀를 타고 산을 넘어온 여인이 연인을 쳐다보듯 그윽한 눈길로 검왕을 본다.

두 여인은 악의를 품고 있지 않다. 살기 같은 것은 전혀 엿볼 수 없다. 이 여인들로부터 해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여인들은 포근하게 그를 쳐다본다.

그에 반해서 검왕은 매우 호전적이다. 그녀들이 가까이 다가서기도 전에 혈영마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붉은 운무가 피어난다.

검왕은 사라지고 시뻘건 혈인만 존재한다.

가마를 탄 여인이 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을 하자 시녀들이 흔들림 없이 가마를 내려놨다.

여인, 증평주는 가마가 완전히 내려질 때까지 가마에 누워 있었다.

증평주가 일어나 앉는다. 다리를 가마 밖으로 내밀어 땅을 딛는다. 그리고 우아하게 일어선다.

증평주는 일어서는 내내 검왕을 쳐다봤다. 검왕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긴장한다거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라 다정한 눈길로.

증평주가 말했다.

“화천을 이겼다고?”

파르르르르릉!

검왕은 거대한 불꽃을 피워냈다.

검신일체(劍身一體)!

검과 육신을 구분할 수 없다. 붉은 것, 모두가 검이고 모두가 육신이다.

“혈영마공 인사, 천축 무공 요마랍기. 이 두 가지를 섞어서 한음천강기를 무너트렸다고 들었는데?”

파르르릉!

“지금 그건…… 폭멸(爆滅). 인사와 요마랍기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 그 판단은 맞고…… 그렇다고 폭멸이라니. 그건 너무 절망하는 거 아냐?”

혈영마공은 최후의 초식을 간직하고 있다.

평생에 걸쳐서 딱 한 번만 시전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니 수련도 할 수 없고, 단지 무리로만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그래서 실전 사용이 굉장히 망설여지는 절초가 있다.

정식 명칭은 잔양화소(殘陽火燒).

전신의 모든 기운을 일시에 불사른다. 내공도 불태우고, 원정(元精)도 끌어내고, 잔기(殘氣)마저 한 줌 남김없이 끌어내어 일시에 폭멸시킨다.

평범한 사람이 잔양화소를 펼쳤을 경우, 그 위력은 화탄 열 개가 일시에 터진 것과 같다고 한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이 잔양화소를 펼치면 반경 십여 장이 초토화된다고 한다.

물론 증명한 바는 없다.

잔양화소와 맞닥트리면 쌍방 모두가 소멸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증명을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무인들은 잔양화소를 짤막하게 폭멸이라고 부른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 줌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검왕은 처음부터 죽음의 절초를 꺼내 들었다.

“제가 할까요?”

나귀를 타고 있던 가냘픈 여인이 말했다.

“아깝구나.”

증평주가 검왕을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가마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화천이라면 물러서지 않고 정면승부를 택했겠지. 너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구나. 호호호!”

나귀에서 내린 여인이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팔을 곧게 펴고 검왕을 향했다.

“분류(分流)로 갈라칠 거야.”

파르르릉!

“폭멸을 꺼내 들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마지막 초식이니까.”

파르르르릉! 파르릉!

검왕은 공격하지 않고 기세만 높였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진기가 더 높아질 때까지. 티끌만 한 잔기마저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검왕은 겉에서 보는 것처럼 화급하지 않다.

진기를 한 올 남김없이 끌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안으로 집중한다는 뜻이다. 밖을 볼 겨를이 없이 오직 안으로, 안으로 밀집해 들어가야만 한다.

그는 매우 고요하다. 평화롭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

혈영마공 잔양화소를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그렸을 때는 무척 고통스러운 무공인 줄 알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처절함이 묻어날 줄 알았다.

아니다. 정작 잔양화소를 펼치면 무엇보다도 조용해진다.

모든 기운이 밖으로 다 튕겨 나가고 텅 빈, 아무것도 없는 안을 본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이 들이친다면 굉장히 행복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 같다.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 중에서 최상의 죽음이 여기에 있다.

이생을 버리고 저승으로 가는 많은 순간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게다.

‘좋군.’

검왕은 수월화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취한 모습을 보고 분류가 형성될 것을 감지한다.

자신이 잔양화소를 일으키면 그녀는 거대한 불길을 두 쪽으로 갈라낼 게다.

이런 공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폭멸보다 강한 내공이 있어야 한다.

수월화는 내공에 자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이 될 게 뻔한데, 이런 수를 쓰겠나.

그녀가 옳은 판단을 했다면 분류가 일어난다.

그녀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눈 깜짝할 순간에 구겨진 휴지쪼가리가 되어 버린다.

그녀가 분류를 선택한 것은 판단의 문제다.

내공에 자신 있으면 분류 같은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고, 자신이 없으면 다른 공부를 구사하면 된다.

검왕이 놀란 것은…… 분류를 펼치는 수월화의 모습이다.

그녀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분류를 펼치기 위해서 양손을 추켜든 모습…… 그 모습이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다. 싸움에 임하는 모습, 긴장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그녀는 고요한 것뿐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

모르긴 해도 그녀 역시 검왕과 비슷한 종류의 몰입 속에 있을 것 같다.

삶? 죽음? 그런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됐군.’

진기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안은 텅 비었고, 밖은 바윗덩이처럼 단단하다. 일순,

슈우우웃!

검왕은 하늘로 붕 솟구쳤다. 붉게 달아오른 검, 화강(火剛)을 내리꽂았다.

슈웃!

수월화도 손을 움직였다.

누구의 판단이 옳았나!

츄르르르륵!

검왕의 화검이 옥수(玉手)에 밀려 옆으로 미끄러진다.

머리를 쳐야 한다. 내리꽂는, 일직선으로 가르는 단 한 수밖에 없다. 이 수를 벗어나면 진기가 고갈된다.

허나 어느새 여인의 옥수가 검신(劍身)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파팡! 파앙! 파파팡!

가득 부풀어 오른 진기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수월화가 이것까지, 진기가 폭발하면서 일으키는 강맹한 파괴력까지 밀어낼 수 있을까?

슈슈슈슈……!

수월화가 목화솜처럼 부드러운 진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음유롭다 음유지공(陰柔之功)이다!

증평의 무공은 화혈역심공이다.

혈루마옥의 저주를 이겨내기 위해서 여인은 양공을, 사내는 음공을 수련해야만 한다.

증평의 무학은 아주 강한 양공으로, 파괴력만 놓고 볼 때는 폭멸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수월화는 양공을 꺼내 들었어야 한다.

헌데 음공이 튀어나왔다. 아니, 음공이 아니다. 음유지공이다. 부드러운 공부다.

‘선천진기(先天眞氣)!’

검왕은 눈을 부릅떴다.

이미 그가 할 것은 없다. 진기를 더 끌어올릴 수도 없다. 이미 모든 진기가 쏟아져 나가고 있다. 작은 조각들마저 모두 폭발에 가담하고 있다.

이런 화력(火力)을 수월화는 선천진기…… 혈루마옥의 저주가 만들어낸 그녀의 본신진기로 대응한다.

지금 이 힘은 수련된 진기가 아니다. 그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진기다. 그 진기가 화혈역심공이 증진함에 따라서 반대적으로, 암중으로 커왔던 것이다.

대체로 이런 진기는 밖으로 꺼내쓰지 못하는 법인데.

그렇구나. 그녀의 판단이 옳았구나. 그녀가 폭멸을 이겨낼 수 있구나.

증평은 오래전부터 선천진기를 사용해 왔던 것 같다.

음유지공이 매우 능숙하게 풀려나온다. 혈루마옥의 저주를 풀어내면서, 화혈역심공의 도움이 없는데도 아무런 고통이나 장애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증평이 녹천보다 한 수 위다.

이런 상태를 녹천에 대입해보자.

녹천은 한음천강기와 버금가는 혹은 그보다 훨씬 정심한 양강지공을 펼쳐낼 수 있어야 한다.

화천이 그럴 수 있었다면 먼저 싸움에서 패한 사람은 자신이었을 게다.

‘졌군.’

졌다는 느낌이 불쑥 치민다. 허나 그런 느낌이 공포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졌지만 담담하다.

가가가가각!

폭멸하는 진기가 둘로 갈린다.

옆으로 밀려난 혈영마공의 진기들이 산과 들을 마구 할퀸다. 흙과 돌멩이를 두들긴다.

퍼억!

가슴에서 둔탁한 소리가 일어났다.

아픔은 없다. 안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의식을 잃어갈 뿐이다. 한순간,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해갔다.

퍼억!

두 번째 격타음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검왕은 하늘을 나는 새처럼 훌훌 날아갔다. 사지가 무력해진 채.

수월화는 땅에 떨어지려는 검왕의 검을 받아들었다.

쒜엑!

그녀는 힘없이 퉁겨나가는 검왕을 향해 삼척장검을 쏘아냈다.

퍼억!

검이 검왕을 꿰뚫었다. 등 뒤로 뚫고 들어간 검이 심장 앞으로 튀어나오는 게 보인다.

일수조사(一手鳥死)라는 놀이다.

혈루마옥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살려면 하늘을 나는 새도 낚아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활이 있다. 표창도 있고, 단검도 있다. 비수도 있다.

허나 혈루마옥 어린아이들은 삼척장검을 던진다. 참새처럼 작은 새는 정확하게 두 쪽으로 갈라내야 하고, 큰 새는 정확하게 심장을 뚫어야 한다. 그래야 땅에 떨어져도 먹을 것이 나온다.

혈루마옥 사람치고 일수조사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또 이런 수법은 죽음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일수조사를 펼친 후에도 살아남은 생명체는 없었으니까.

뱀, 토끼,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부터 멧돼지, 호랑이 같은 맹수까지 모두.

쉬잇!

가마를 메고 왔던 시녀 중에 한 명이 재빨리 신형을 쏘아냈다.

그녀는 땅에 떨어지는 검왕을 낚아챘다. 그러나 추후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수월화에 대한 모욕이 된다. 대신, 검왕의 죽음만 살폈다.

그녀가 증평주를 향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일수조사가 어긋날 리 없다.

사실, 이러한 확인조차도 수월화에 대한 모욕이 된다. 다른 곳, 다른 싸움이었다면 절대로 이런 무례를 저지를 리 없다. 시녀도 하지 않고, 수월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는 검왕이다.

그는 예전에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화천의 검에 정통으로 심장을 꿰뚫리고도 살아났다.

그래서 확인해 본 것이다.

시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녀는 그것도 부족했는지 암암리에 사혈(死穴)을 지긋이 눌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혈루마옥 사람에게는 검왕이 매우 끈질긴 목숨으로 각인되어 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난 자이기 때문에, 화천의 손에서 벗어난 자이기 때문에.

“꽤 많이 늘었구나.”

증평주가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먼 것 같아요.”

“그래? 어떤 징조를 느꼈기에 그런 말을 하누?”

“마지막 순간에 역기(逆氣)를 감지했어요. 검왕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제가 당했을 거예요.”

“화혈역심공의 역공…… 호호!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야.”

증평주가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선천진기를 사용하면 화혈역심공이 반란을 일으킨다. 화혈역심공을 과도하게 소진하면 선천진기가 반란을 일으킨다.

녹천은 이런 부분 때문에 선천진기를 꾸욱 억누르고 있다.

증평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녀들은 이미 선천진기를 쓰기 시작했다. 화혈역심공과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물론 양공(兩功)의 불균형에 대한 방책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

쉬잇!

검왕의 죽음을 확인한 시녀가 돌아왔다.

유지오혼이 이 산에서 죽었다. 검왕도 죽었다. 염라대왕조차도 돌려보낼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죽었다.

수월화가 나귀를 탔다.

증평주도 가마에 올랐다.

그녀들은 올 때처럼 조용히 산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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