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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二章 망사(忘死) (4)
여인이 가마를 타고 온다.
사방이 확 트인 가마를 시녀 네 명이 둘러메고 있다.
시녀들은 가마꾼 이상으로 가마를 잘 멘다.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도 가마가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정지해 있을 때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여인은 가마 안에 비스듬히 누워서 흘러가는 산천을 구경한다.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귀태가 물씬 풍겨 나온다.
시녀들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비록 가마를 메고 있지만, 화사한 비단으로 짠 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찼으며, 미모는 한결같이 빼어나다.
살랑살랑……!
시녀들이 부드러운 바람을 즐기면서 가마를 메고 간다.
펑!
산정에서 붉은 폭죽이 터졌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산정을 쳐다볼 눈만 있으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다.
“음!”
강신천마가 신음을 흘렸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적도 없는데 두 눈에는 핏발이 곤두선다.
“제길……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죽을 자리군.”
유삼을 입은 자, 유계판서가 말했다.
산정에 터진 폭죽의 의미…… 당나귀를 탄 여인이 계속 산길을 더듬어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서 유지자문이 나섰다.
여인 한 명을 제지하기 위해서 신비의 고수들이 대거 나선 셈이다.
그런데도 제지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십마들은 유지자문 고수들에게 형편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십마를 허수아비처럼 뭉개버린 유지자문이거늘.
산 너머에서 고요한 태풍이 몰려온다. 너무 고요해서 눈에조차 띄지 않을 폭풍이지만, 일단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십마 정도는 단숨에 날려버릴 게다.
또 한 쪽에서는 가마가 밀려온다.
그렇다. 밀려온다.
시녀들이 가마를 메고 오지만 꼭 거대한 태풍이 밀려온다는 느낌이 든다.
뚫을 수 없는 철벽이 점점 좁혀온다.
십마는 그 사이에 끼어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다.
검왕이 죽자고 해서 따라왔다. 그가 죽자고 했으니 죽을 자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루마옥이라면 정말로 횡액을 당할 공산이 크다.
이런 점들은 모두 감안하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이토록 의미없이 개죽음을 당할 줄이야.
저들을 상대로 무슨 무공을 선보일까? 어떤 식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까?
싸움이라면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십마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손짓조차 재대로 해보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개죽음이 두렵다.
스읏!
유계판서가 판관필을 꺼내 촉을 살폈다.
그는 병기를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판관필로 어떤 공격을 펼쳐야 일초가 제대로 먹힐 것인지…… 효과적인 초식을 궁리하고 있을 게다.
웃기지 않은가?
십마 정도 되면 초식이 의미 없어진다.
흔히 무초(無招)라고 부르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손에 잡는 것이 병기다. 손짓, 발짓이 무공이다.
평생 수련해 왔던 초식은 물론이고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초식들까지 자유자재로 펼쳐진다.
이런 경지는 노력하고자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고수들은 비초(秘招)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초식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초식이 펼쳐지기만 하면 상대는 꼼짝없이 당한다. 어떻게 손써볼 틈도 주지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초식이 있다.
그런 거 없다.
무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전수한다. 호흡 한 톨까지 남김없이 전수한다. 세세하게 지도까지 하면서.
사부나 제자나 똑같은 초식을 똑같이 구사한다.
헌데 같은 초식을 펼쳐도 실전에서 사용할 때 보면 전혀 다른 초식이 구사된다.
초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은 순간의 틈을 파악할 줄 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틈을 보게 될 때, 그런 틈이 자연스럽게 보일 때…… 그때에서야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절대 고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십마는 그런 고수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고민한다. 어떻게든 일초라도 펼치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킬킬! 난 한 수 생각했다. 킬킬!”
천살마노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 바로 숨죽이고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다.
설마 유지자문이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이야!
유지자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더더욱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죽였다.
스릇! 스윽!
음사가 몸을 숨겼다가 다시 드러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은신술을 펼쳤다가 고수 앞에서 재롱질을 하는 것 같아 다시 드러냈다.
음사는 십마도 까마득한 상대다.
십마는 소위 무초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는 아직도 초식에 연연한다.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손 놓고 있는데 그가 무엇을 하랴.
누강의 심정도 음사와 다르지 않다. 뭐를 하기를 해야겠는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십마도 쓸모 없다. 하물며 그와 음사 정도야 말해 무엇하나.
그들은 정녕 쓸모없다.
그러면 검왕은 왜 이런 자리에 자신들을 데리고 왔나. 검왕의 의중은 무엇인가. 그래도 그들이 쓸모 있으니까 따라오라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누강은 검왕만 쳐다봤다.
혈루마옥은 눈과 귀가 밝다.
그들은 결코 절곡에 갇혀 있던 게 아니다. 중원 어느 문파보다도 중원에 대해서 잘 안다.
혈루마옥은 정확하게 그를 찾아왔다.
가마를 타고 오는 증평주, 산을 넘어오는 수월화…… 저들은 혈루마옥을 나서자마자 일직선으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길안내를 해준 듯이.
적벽검문을 들이친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익숙한 길을 가듯이 거침없이 달려와 들이쳤다.
공격을 하면서도 망설이지 않는다.
누구든 타문파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적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를 따져본다. 내가 이길 수 없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다.
저들은 따지지 않았다. 무조건 공격했다.
적벽검문의 무공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적벽검문의 무공은 중원인들도 알지 못한다.
유지자문은 더 그렇다. 사람들은 적벽검문은 알아도 유지자문은 알지 못한다.
혈루마옥은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적벽검문은 단숨에 무너졌다.
유지오혼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누강은 아직 적벽검문이 멸문한 사실을 모른다. 음사도 알지 못한다. 중원처럼 소문이 빠른 곳이 없으니, 곧 그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사조, 사숙, 사부, 사형, 사제, 사매…….
요행히 화를 피한 사람도 있지만 적벽검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맞이? 아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통쾌하게 싸움을 해봤다.
결과는 혈루마옥의 승리다.
적벽검문의 모든 무공을 총동원해서 싸웠다. 적벽검문의 고수들이 대거 나섰다. 하지만 저들을 이기지 못했다. 사람과 무공에서 철저하게 패했다.
부인할 수 없다. 혈루마옥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유지오혼도 할 말이 없다.
그들도 최선을 다했다.
유지오혼은 유지자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무공을 섭렵한 초고수들이다. 그들이 어쩌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 다른 문도들이 나서도 어쩌지 못한다.
유지오혼은 펼칠 수 있는 무공을 한껏 펼쳤고, 졌다.
유지자문보다 혈루마옥이 훨씬 강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들은 중원 천하 역시 샅샅이 훑었을 것이다. 모든 세력과 무공을 파악해 놨을 것이다.
저들에게는 눈과 귀가 있다.
중원인이면서 무림의 판도를 갈아엎고자 하는 자가 있다. 세력일 수도 있고.
그는 화천을 공격했다.
전에 패배를 안겨주었던 상대라서 복수심에 싸움을 벌였던 것이 아니다. 물론 중원을 침략하는 이질집단이라는 생각에서 저지한 것도 아니다.
일부러 화천을 공격할 필요는 없었으나…… 공격해 봤다.
중원에 소문도 나지 않은 조용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첫째, 검왕 자신이 혈루마옥 제일 주적이 되었다.
검왕에게는 혈루마옥 사람들을 기꺼이 죽일 수 있는 무공과 배짱이 있다.
둘째, 검왕은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인다.
즉, 검왕을 죽이는데 크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자객을 보내서 처리하듯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보내서 간단하게 쓰러트리기만 하면 된다.
혈루마옥도 요란한 싸움이 기피한다.
검왕을 눕힌 다음,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아주 큰 소리를 지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자들을 눕힐 때까지는 조용히 움직일 필요가 있다.
지금이 그때다.
헌데 말이다…… 정말로 실력 있는 자들, 정말로 세상이 무서운 줄 모르는 자들이라면 조용히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누가 앞을 가로막아서든 아니든 상관이 있을까?
검왕은 그게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알았다.
혈루마옥은 조용히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유지자문을 조용히 무너트리고, 검왕도 무너트린다. 그다음에 세상을 향해서 큰 소리로 고함친다.
저들에게도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약점이 있다. 조용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단서를 잡기 위해서 아주 큰 희생을 치렀다.
무엇보다도 유지오혼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아주 큰 손실이다. 본인들 스스로 자청해서 나선 싸움이지만, 그들은 더 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저기…… 이제 뭐라도 좀…….”
누강이 힘들게 말을 건네왔다.
시녀 네 명이 메고 있는 사인교가 뚜렷하게 보인다.
시녀들은 잠시 큰 나무 그늘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땀을 식히는 중이다. 쉬는 중인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서로 깔깔거리면서 웃기까지 한다.
가마를 타고 온 여인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풀잎도 밟고, 상쾌한 공기도 들이켜고…….
저들에게 급한 것이라고는 없다. 하지만 저 가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가마가 그들 앞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다.
퍼엉!
산정에서 두 번째 폭죽이 터졌다.
비형은잠이 산정이 있다. 이제 그도 철수하려고 한다. 여인이 산정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쪽저쪽 모두 급해졌다.
그들 중에 한쪽만 맞이해도 승산이 없는데, 양쪽 모두와 싸운다면 필패가 자명하다.
증평주보다는 수선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사인교를 버리고 당나귀를 타고 오는 여자 쪽을 들이치는 게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그런 공격이라도 취하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검왕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동쪽 능선을 가리켰다.
“음사, 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제 걸음으로요?”
끄덕! 끄덕!
“방해받지 않고 달린다면 한 시진 정도? 한 시진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왜요?”
검왕이 품속에서 밀지를 꺼내 음사에게 건네주었다.
“한 시진은 너무 늦고…… 반 시진까지 당겨. 반 시진 안에 반드시 저곳으로 가 있어야 돼.”
“반 시진요? 그건…… 알았습니다. 해보죠. 그런데 이건?”
“가서 펼쳐봐.”
“가서요? 알겠습니다.”
음사가 밀지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검왕은 음사에게 떠나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누강을 향해 말했다.
“저기로 가주세요. 말을 들었으니까 아시겠지만 반 시진 안에 도착해야 합니다.”
검왕이 검은색 밀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누강이 눈빛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묘수가 있었습니다. 하하! 아무 대책 없이 저들을 맞이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하하! 기꺼이 가죠. 반 시진은 빠듯하지만 꼭 해내겠습니다. 하하하!”
누강이 검은색 밀지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검왕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약간은 씁쓸하고, 약간은 퇴폐적인 그만의 웃음.
쉬이익!
누강과 음사가 서로 앞다투어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