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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二章 망사(忘死) (1)
깊고 깊은 산골짜기, 너무 골이 깊어서 맹수도 들락거리지 않을 고요한 땅.
그곳에 적벽검문이 있다.
그녀는 처음으로 적벽검문이라는 곳을 봤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할 적벽검문이건만, 지금에서야 고색 창연한 지붕을 본다.
적벽검문은 깊은 산골짜기에 존재한다. 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지붕이며 담이며…… 잡풀 하나 자라지 않는다. 무너진 곳도, 깨진 곳도 없다.
적벽검문을 고스란히 옮겨서 도읍 한복판에 놓으면 당장 고관대작의 저택으로 변할 것이다.
적벽검문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세상은 죽음으로 들끓고 있는데, 이곳은 풍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봉문(封門)!
대문 한 가운데 떡하니 붙어 있는 두 글자가 평화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인다.
슷! 스슷! 슷!
많은 사람들이 조요히 적벽검문을 에워싼다.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는다. 모습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인다. 신법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산책하듯이. 고요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무심하다. 살기도 긴장도 드러내지 않는다. 적벽검문을 보는 눈길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길가에 핀 꽃을 볼 때처럼 무덤덤하다.
그녀가 말했다.
“이곳인가요?”
“이곳이다.”
“마옥에서 한 걸음도 나오신 적이 없으실 텐데, 평생 중원에서 자란 저보다 잘 아시네요.”
“넌 눈과 귀를 닫고 살았고, 우린 항상 열고 살았으니까.”
“얼마나 걸리죠?”
“해가 질 때까지는 가능할 게다.”
“시작해 주세요.”
“약속을 지키는 즉시 시작할 게다.”
“알았어요.”
그녀는 대답과 함께 품에서 밀지 한 통을 꺼냈다.
“이 속에 적어놓았어요.”
사내는 밀지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밀지를 주지 않고 다시 거뒀다.
그녀가 고갯짓으로 적벽검문을 가리켰다.
“쯧! 사람이 때로는 신뢰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여우 같은 계략은 속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주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더구나.”
“저는 이게 좋아요.”
“그러자. 지금 보나, 해 진 후에 보나 마찬가지이니.”
슷!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적벽검문을 에워싼 사내들이 천천히 걸어나갔다.
‘대가를 치러야 돼!’
누미는 차가운 눈으로 적벽검문을 쏘아봤다.
적벽검문은 그녀의 사문이다.
그녀의 성씨까지 누 가로 바꿔 놓았으니 누구보다도 끈끈한 정으로 맺어졌어야 한다.
헌데 적벽검문은 그녀를 버렸다.
그녀가 혈루마옥의 마수에 걸려드는 동안 적벽검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적벽검문에 힘이 없는 것인가? 혈루마옥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지켜본 것인가.
그런 것이라면 십분 이해한다.
그녀도 그런 줄 알았다. 사부나 검왕이 어떻게 화천을 이길 수 있겠는가. 화천이 그녀를 능욕하고자 할 때, 누가 있어서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헌데 그게 아니었다.
혈루마옥에서 지켜본 적벽검문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두 문파를 꼽는다. 그중에 하나가 적벽검문이다. 또 하나가 유지자문이다.
적벽검문은 혈루마옥이 중시할 만큼 강한 문파다.
적벽검문은 그녀를 혈루마옥에게 내준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적벽검문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녀가 혈오를 낳으면 혈루마옥은 자유를 찾는다. 계곡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육신의 자유를 찾게 된다.
적벽검문으로서는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겠나.
도대체 적벽검문이 이런 일을 벌임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이 무엇일까?
그녀는 사부의 멱살을 잡고 이 일을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사부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누강은 그럴만한 주제가 되지 못한다.
이번 일은 검왕이 주도했다.
한때, 연모의 정까지 품었던 사내로부터 보기 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풋! 이런 줄도 모르고…… 사문도끼리의 연정을 용납하지 않는 적벽검문 문규만 걱정하고 있었으니.
모두 죽인다!
그녀는 적벽검문을 향해 걸어가는 사내들을 보면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꽝!
‘봉문’이라고 쓰인 글자도, 단단해 보이는 문짝도 발길질 한 번에 두 쪽이 나버렸다.
대문이 산산조각 났다.
헌데…… 대문을 박살 낸 자는 적벽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부서진 문 안쪽에 한 노인이 앉아있다.
맨땅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데…… 몹시 왜소하다.
등이 굽은 꼽추인 데다가 몸집마저 어린아이처럼 작아서 더 왜소해 보인다.
꼽추 노인은 두 무릎 앞에 낫 두 자를 놓아두었다.
아마도 노인의 병기인 듯싶은데…… 병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녹이 슬었다. 녹슬고, 투박하고, 날까지 무뎌서 사람은커녕 풀도 베지 못할 것 같다.
“쌍겸타자(雙鎌駝子)…….”
문을 박살 낸 사내가 다소 긴장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쌍겸타자라고 불린 노인은 묵묵부답,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눈도 뜨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있기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문 안으로 한 걸음만 들여놓으면 당장 앞에 놓인 두 낫이 괴소를 토해낼 것이다.
스릉!
문을 박살 낸 사내가 검을 뽑았다.
적벽검문을 만만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강적과 만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그가 긴장한 채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한순간,
슛! 타타탁! 타탁! 탓! 슉! 팍!
요란한 소리가 부서진 대문 위에서 터졌다.
사내가 검초를 떨치며 쏘아갔다. 쌍겸타자도 낫을 들었다. 마주 쏘아왔다.
낫과 검이 어울렸다.
벼락이 떨어지는 한순간에 두 사람은 수십합을 교환했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순간에 적어도 각기 십여 초씩은 전개한 것 같다.
검이 허공을 흘렀다. 겸이 사내의 목을 찍었다.
피 분수가 솟구친다. 사내가 검을 놓고 구멍 뚫린 목을 움켜잡으면서 무너진다.
쿵!
사내가 땅에 쓰러져 바르르 떤다.
너무 왜소해서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노인은 다시 앉았던 자리로 걸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음! 쌍겸자천(雙鎌刺天)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죽음의 초식이라더니.”
새롭게 문앞에 나타난 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쓰러져있는 동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쌍겸자천에 당한 자는 살지 못한다.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살릴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할 수 있다.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내는 아직 숨이 붙어있다. 하지만 죽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살릴 수 없다. 의술이라면 혈루마옥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을 터,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을 자를 위해 심력을 쏟느니 눈앞의 일에 전념한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자가 그랬듯이 즉시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쒜엑! 파라락! 파락! 쒜에엑! 퍼억!
이번에도 지극히 짧은 순간에 수십 종류의 소리가 터졌다.
쇠가 허공을 쓸어 헤친다. 검이 허공을 가른다. 검과 겸이 부딪치기도 하고, 빗겨가기도 한다. 그리고 한순간, 병기가 살을 찢는 파육음이 들린다.
“큭!”
이번에 손해를 본 사람은 노인이다.
노인이 쌍겸을 든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사내가 피 묻은 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눈썰미가 좋아서. 방금 전에 쌍겸자천을 봤는데, 같은 수에 또다시 당한 데서야 체면이 안 서지.”
“역시 혈루마옥.”
쌍겸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서둘지 않고 천천히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베인 곳, 아랫배를 다시 묶었다.
배를 다 묶은 노인이 쌍겸을 움켜잡으면서 말했다.
“한 놈은 더 죽일 수 있겠다.”
“쌍겸천자 외에 뭐가 더 있는 것인가?”
쌍겸자천은 쌍겸타자의 최대 절기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절초로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내가 쌍검천자를 피하고 노인을 벤 것은 방금 전에 쌍겸자천이라는 초식을 면밀히 살펴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같은 초식을 또 사용한다고 결과가 달라질까? 이미 사내는 쌍겸자천 파해법을 알고 있는데.
쌍겸타자가 말했다.
“큭큭! 적벽검문 문지기 역할을 한 것이 십오 년이다. 기골이 천박해서 성취가 높지 못하다만, 설마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까. 문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작심해서…… 평생 써먹지 못할 초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볼 생각이 있는가?”
사내가 흠칫했다.
쌍겸타자가 허튼소리를 할 리 없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적벽검문에서 십오 년을 있었다면 예전보다 훨씬 강한 초식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생각을 못 했구나.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후후! 아무래도 나는 오늘 살지 못하겠군. 좋은 자를 만났고, 잘 싸웠다. 잘 봐라. 잘 보고, 나처럼 실수하지 마라.”
사내의 등 뒤에 서 있던 자, 부서진 대문 밖에 있으면서 싸움을 조용히 지켜본 자가 말했다.
“다 보고 있다.”
쒜에엑! 쒜엑! 촤르르르륵! 팟!
쌍겸이 정수리를 찍었다.
쌍겸타자가 장담한 대로 그는 쌍검자천이 아닌 다른 초식을 펼쳐냈다. 사내의 검이 땅에서 하늘로 쳐올려질 때, 쌍겸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서로가 살상하는 형국이다.
사실 서로가 살상했다. 사내의 검은 쌍겸타자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그 자신도 하늘에서 떨어진 쌍겸을 피하지 못하고 정수리를 찍혔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무너졌다.
그제야 대문 밖에 서 있던 자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정수리를 찍혀서 무너진 동료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졌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적벽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동귀어진을 한 것은…… 쌍겸타자의 진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싸움에서 배를 갈린 충격이 진력을 삼 할이나 쓸어내 버렸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사내만 죽었다.
만약 쌍겸타자가 처음부터 이 초식으로 두 번째 사내를 맞이했다면 배를 갈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쓰지 않았던 것은…… 습관 때문이다.
쌍겸타자는 쌍겸자천이라는 초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무적의 초식이라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 초식만 쓴 것이다.
무인에게 습관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적벽검문 같이 폐쇄적인 공간에 머문다면 초식 또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쌍겸타자가 이곳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지 않고 중원을 활보했다면 이런 고정관념,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 수도 있는데.
적벽검문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강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벅! 저벅!
그들은 적벽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죽은 자는 돌보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 싸움, 많은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시간을 오래 끄네요.”
누미는 못마땅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벽검문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녹천주가 왔다. 촌장을 대신해서 왔다.
그는 자신만의 싸움방식을 고집한다.
그는 패싸움 같은 것을 지양한다. 철저하게 무공으로 승부를 가리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일대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여러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공격했다면 훨씬 우세한 싸움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는다.
쌍겸타자만 해도 그렇다. 그에게 두 명,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한 명도 죽지 않았을 게다. 헌데 실제로는 그를 뚫기 위해서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애꿎은 희생이다.
혈루마옥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솔직히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백 명이 죽어도 좋고 천 명이 죽어도 좋다. 아무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가 다른 변수가 생길 것 같아서 불안할 뿐이다.
적벽검문을 빨리 몰락시키고 싶다.
하지만 녹천주는 천천히 말살시킨다. 반드시 무공으로 짓누르려고 한다.
혈루마옥이 적벽검문보다 강하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그녀가 말했다.
“정말 해지기 전까지 가능해요?”
“가능하다.”
“다른 변수가 생길까봐 걱정되는군요.”
“그런 건 없다. 적벽검문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니까. 무공 대 무공으로 싸우고 있지 않느냐.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이 나오고, 이기면 끝까지 싸우고.”
녹천주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