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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一章 운집(雲集) (4)
“오늘은 방이 있으려나?”
“지금 이 시간이면 있을 거야. 다행히 일찍 왔잖아. 해 떨어지기 시작하면 끝이지. 꼼짝없이 노숙해야 돼.”
“나도 이곳에다가 객잔이나 낼까?”
“제발 좀 그래라. 우리 좀 편하게. 하하!”
길손들이 농을 주고받으며 곡감으로 들어섰다.
곡감은 교통의 요충지다. 안강(安康)이나 관중(關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곡감 땅을 밟아야만 한다. 곡감에서 대파산(大巴山)을 휘돌아 가면 안강이요, 미창산(米倉山) 협곡으로 들어서면 관중으로 통하게 된다.
길손 앞을 가로막는 큰 산, 대파산과 미창산.
길손들은 곡감에서 잠시 여정을 푼다. 피곤해진 심신을 쉬고, 앞으로 가야 할 험로를 준비한다.
이런 연유로 곡감은 먼 옛날부터 ‘휴식의 땅’으로 불리운다.
사람들이 이곳저곳 빈 객실을 수소문한다.
이 점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 곡감은 점소이들이 길가로 나와서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해가 떨어질 무렵쯤이면 모든 객실이 만실(滿室)이 된다.
반면에 객손들은 마음이 급하다. 빨리 잠잘 곳을 마련해야 술도 마시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텐데.
슷!
방금 전에 곡감으로 들어선 두 상인이 무심히 조용해 보이는 객잔 문을 밀쳤다.
그러나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어깨가 움찔거리고, 두 다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슬금슬금 물러섰다.
“하아!”
“휴우!”
뒤로 대여섯 걸음 정도 물러서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진다.
“뭐야?”
“몰라.”
“뭔 일이 터질 것 같지?”
“몰라. 몰라몰라.”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물러서기만 한다.
주루와 객잔을 겸하고 있는 옥룡숙(玉龍宿)은 아름다운 정원까지 갖추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애호한다. 주루에서 판매하는 백주(白酒)도 옥룡숙에서 직접 담근 것인데, 주 향이 좋고 순도가 높아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까지 있다.
옥룡숙 앞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헌데 오늘은 조용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한결같이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
무인들은 다른 반응을 한다.
“아!”
“웃!”
놀란다. 경악한다. 그러나 다음 행동은 범인들과 똑같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한다. 혹여 발자국 소리라도 들릴까봐 매우 조심하면서 물러선다.
옥룡숙에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다.
꿀꺽! 꿀꺽!
불곰을 연상시키는 자가 거칠게 술독을 들이켠다.
자그마한 항아리에서 맑은 순백의 액체가 콸콸 쏟아져 장한의 입속으로 흘러든다.
옥룡백주는 독하기로 유명하다.
주량이 높은 사람도 손톱만 한 술잔으로 서너 잔만 마시면 취기가 오른다는 술이다.
탁자 위에 대감도를 올려놓은 사내는 옥룡백주를 벌써 세 단지째 들이켜고 있다.
콸콸콸!
술이 물처럼 넘어간다.
다른 자리에는 흑포를 입은 사내가 묵묵히 앉아있다. 실내에서도 얼굴을 푹 가리는 방갓을 벗지 않고 있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체 앉아있다.
여인도 두 명이나 앉아있다.
한 명은 허리까지 구부정한 노파이고, 다른 한 명은 분단장을 요란하게 한 중년 여인이다.
주루에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여섯 명이다.
그들은 각기 탁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주루는 매우 넓다. 능히 오십 명은 앉아서 술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여섯 명이 앉아있자 자리가 꽉 찬 느낌이 든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주루 전체를 혼자 차지하고 있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다른 무인들이 그들 자리를 비집고 들어선다?
그런 일은 무공으로, 기(氣)로 이들 여덟 명을 누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꿀꺽! 꿀꺽! 꿀꺽!
술 마시는 소리가 조용한 주루를 일깨운다.
덜컹!
주루 문이 열렸다. 그리고 흑포를 입은 사내가 들어섰다.
일곱 명의 눈길이 모두 그에게 쏘아졌다.
‘검왕!’
그들은 일제히 흑포 사내를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검왕은 십마에게 패배라는 말을 일깨워주었다. 일대일의 승부도 아니었고.
검왕은 십마와의 싸움에서 변명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저벅! 저벅!
검왕은 여섯 명이 쳐놓은 강기의 벽을 편안하게 뚫었다.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은 듯 태연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 불곰 사내 앞쪽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내만 쳐다봤다.
탁!
불곰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술독을 내려놓았다.
“빚은 갚았나?”
검왕의 첫 마디다.
“……!”
불곰 같은 사내, 강신천마가 검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이.
“이령(二令)이 쳐놓은 덫은…….”
검왕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어디까지 아는 것이냐!”
강신천마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많이는 몰라. 그 날, 마공관에 나타났을 때 ‘아! 이 사람들도 당했구나!’하고 느끼는 정도였지.”
“…….”
강신천마는 침묵했다.
검왕은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십조잔괴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길을 돌려 천살마노까지 쳐다봤다.
이들 세 명, 마공관에 나타나서 검왕에게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다.
씨익!
검왕이 천살마노를 쳐다보며 웃었다.
“징그러운 새끼.”
천살마노가 오히려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찌 되었든…… 나 좀 도와줘야겠어.”
검왕이 다짜고짜 말했다.
그들, 십마 중에 여섯 명은 검왕이 무례하게 내뱉는 말에도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검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
혈루마옥!
그들은 당금 무림에서 혈루마옥의 혈겁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들일 게다.
“호호호! 동생, 도군악은 부르지 않을 셈이야?”
요염한 여인, 이제 갓 마흔이 되었을까 말까 한 여인이 검왕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검왕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들 여섯 명은 그 뜻도 안다.
쌍첨수괴 도군악은 귀선부 이령의 수족이다. 아니, 수족이라기보다는 공생하는 관계다. 아니다. 공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도와주는 관계?
솔직히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령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만은 안다.
쌍첨수괴 도군악은 이령 사람이다.
혈천혈도 진구량은 같은 십마라고 할 수 없다. 그는 혈천성의 성주이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하지 않는다.
비형은잠이 남았다.
비형은잠? 그는 여기에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직감으로 느껴진다. 그를 공격하라면 할 수도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주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비형은잠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십마 중에 일곱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런 일은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십마가 한 자리에 모이다니.
옥룡숙에 들어서려던 무인들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래서 군말 없이 물러섰다. 이들 중에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눈에 보이는 자만 여섯 명이 앉아있으니.
범인들은 이들의 기세에 짓눌렀다. 그래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당금 무림에서 정도의 최고봉인 검성 성주와 병기를 맞댈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것도 살인을 밥 먹듯이 즐기는 마인들이.
검왕에게 말을 걸었던 백화요녀가 소녀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도와주는 건 좋은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가 막혀서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마 중에 일곱 명이 힘을 합쳤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아이라도 된 듯 심한 무력함을 느낀다.
혈루마옥, 그들은 대단하다.
“나 죽으러 가는데…… 같이 가지.”
검왕이 십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 십마의 동의도 얻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검왕이 주루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십마는 움직이지 못했다.
유지자문 고수에게 핍박을 당했다. 혈루마옥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무력함을 느꼈다.
그들이 가라고 해서 왔지만, 검왕이 이런 말을 할 것이라는 것도 예측했다. 검왕이 죽으러 갈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검왕이 혈루마옥과 맞선다면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면 돌아오는 건 죽음이다.
누구를 위해서? 왜?
그들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패갑철마는 왜 죽인 거야!”
강신천마가 뒤늦게 소리쳤다.
검왕은 주루 문을 밀치고 나간 후이다. 대답해 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대답을 듣고자 한 말도 아니다.
검왕이 패갑철마를 죽였다면…… 죽일 이유가 있었을 게다. 그리고 패갑철마에게 어떤 우정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왜 죽였는지 검왕 입으로 듣고 싶을 뿐.
여섯 명은 침묵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때,
“어멋! 호호호!”
백화요녀가 맑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 비형은잠이 검왕을 쫓아간다.
일곱 명 중에서 제일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나왔다.
“큿큿큿! 여기 올 때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 도와달라. 오냐, 도와주마. 큿큿큿! 더럽게 운수 사나운 인생이구만. 결국 개죽음을 당할 운명이라니.”
십조잔괴가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혈루마옥의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잠시 무림에 나왔다가 천하무적으로 군림하고 사라진 화천 같은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혈루마옥과는 무공의 바탕이 다르다.
중원 무인들이 땅에서 무공을 수련했다면, 혈루마옥 마인들은 하늘에서 시작했다. 이미 거봉에 올라선 상태에서 수련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검왕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들이 나아갈 길이 분명하고, 상대해야 할 사람들도 명확하다.
다른 길이 없다. 죽어야 한다.
왜 그런 자들을 상대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점괘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
유삼을 입은 유생이 몸을 일으켰다.
“호호! 정말 점괘가 나쁘지 않아?”
백화요녀가 유계판서 화상상을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화(禍)는 있지만 사(死)는 없어.”
“죽음만 없으면 되지 뭐. 혈루마옥 무공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은 한 명, 두 명 몸을 일으켰다.
* * *
‘넷째가 오지 않았다.’
‘다섯째도…….’
두 명이 오지 않았다. 약속을 어겼다. 즉, 그들은 죽었다.
유지자문 사람들은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 그들이 약속할 사람은 문파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에.
약속을 어길 경우는 단 하나, 죽었을 때뿐이다.
‘혈옥이 깨졌다!’
‘넷째와 다섯째를 무너트릴 정도라면…….’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봤다.
넷째와 다섯째가 죽었다면 그들도 죽는다. 그들의 무공 차이는 크게 벌어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호기심이 생긴다.
어떤 무공에 죽은 것인가? 혈루마옥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