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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102화 (102/225)

# 102

第二十一章 운집(雲集) (2)

여인이 걸어온다.

머리에 꽂은 하얀 국화꽃과 화사한 꽃무늬 화복이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

여인은 아름답다.

어찌 보면 머리에 꽂은 국화꽃처럼 청초하고, 어찌 보면 화사한 화복처럼 요염하다.

여인은 힘이 없어 보인다. 몸매가 매우 가냘파서 호미질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아니, 여인은 풍족해 보인다. 그런 험한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을 게다.

아주 고귀하게 자란 화초일까?

여인은 언뜻언뜻 진득한 색기(色氣)를 뿌린다.

붉디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어서……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보일 듯 말 듯 비치고 있어서…… 오똑한 코, 봉황처럼 크고 맑은 눈이 묘한 갈망을 던지고 있어서…….

개미처럼 가냘픈 허리를 와락 껴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아!’ 깊은 숨을 토해내며 쳐다볼 것 같다. 당신이 이렇게 해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은 지켜주고 싶은 여자와 활활 불타오르는 정염의 여자를 동시에 드러낸다.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는 최강의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누구냐!’

그는 여인이 누구인지 추측해봤다.

생각나지 않는다. 중원 무림에 이런 여인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무공이 이 정도라면…….

여인과 겨뤄본 것은 아니지만, 여인이 십마를 월등히 능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십마 중에 일인인 천살마노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런 그가 여인을 보자마자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두 발이 딱 얼어붙었다.

‘중원에는 이만한 고수가 없다. 그렇다면!’

퍼뜩 혈루마옥이 생각난다.

여인의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대여섯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원숙한 여인으로 봤을 때 그런 것이고, 청초한 모습으로 가늠하면 스물한두 살밖에 안 보인다.

그녀는 보기에 따라서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을 넘나든다.

허나 이십 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리 많이 잡아주어도 서른은 되지 않았다.

이 정도 나이에 그를 긴장시킬 정도로 무공 성취를 이뤘다면…… 혈루마옥이다.

혈루마옥의 여자!

혈루마옥에는 고수가 많지만 여인의 몸으로 고수가 되려면 중평 무학을 수련하는 수밖에 없다. 중평주이거나, 중평주로부터 사사를 받은 제자이거나.

중평주의 나이는 중년을 훌쩍 넘겼으니…… 중평주의 사사를 받은 여인이다. 그것도 그를 긴장시킬 정도로 강하다면 중평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중평에는 여인 정도의 나이에 높은 성취를 이룬 고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여인은 화천의 짝으로 불리운다.

화천이 녹천의 제일기재라면 그녀는 중평의 제일기재다.

‘그럼 이 여자가?’

그는 여인이 중평의 후기지수(後起之秀) 수월화(水月花)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별호가 어찌 되는지는 알 바 아니다.

유지자문은 그녀를 수월화라고 부른다.

간자(間者)가…… 하필이면 그녀가 가장 청초한 모습을 드러낼 때 그녀를 봤고, 한순간에 취해버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물속에 핀 달 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유지자문에는 그녀를 수월화라고 보고했다.

그녀인가?

그녀일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으나 그녀가 분명하다.

스르르륵!

그가 움직였다. 천살마노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운중도가 다시 펼쳐졌다.

그녀는 운중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왔다.

발걸음이 사뿐거린다. 어깨를 축 떨구고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싸울 준비는 이미 끝났겠지만, 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찾아온 것 같다.

스르르릇!

그는 수림 속으로 몸을 감췄다.

천살마노는 은형마강술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몇 번째?”

여인이 붉은 입술을 달싹인다.

그는 침묵했다. 은형마강술에서 운중도로 이어진다. 단숨에 끝낼 생각으로.

‘일격에 실패하면 위험하다.’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을 상대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긴장한 적은 없다. 일격이 실패하면 곧바로 위험에 처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여인이 그가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앞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유지자문에 유지오혼이 있는 것으로 알아. 그중 몇 번째인지 궁금해서. 몇 번째?”

“…….”

“굳이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고. 어차피 유지오혼 모두 죽일 생각이니까. 검왕이 곡감에 있어? 뒤따라 다니기를 잘했네? 꼭 뭔가 건질 것 같더라고.”

“……!”

그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을 며칠이고 미행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여인의 말은 사실일 게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렇다면 여인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자신이 미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오늘을 길보다 흉이 많겠군.’

그는 좋지 않은 생각을 곧 떨쳐버렸다.

유지자문 사람들은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다. 속세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한 가닥 갈망, 조금 더 강한 무공에 대한 갈망만 남아있다.

여인이 조금 더 강한 무공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줄 생각이 있다.

스릉! 팡!

은형마강술이 운중도로 변했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뿌연 운무가 반경 오 장을 휘어감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검 한 자루가 번뜩였다.

팡! 팡! 팡!

그가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터져나갔다.

그는 공기가 일으키는 저항마저 무너트린다. 축지(縮地)처럼 공기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그와 여인 사이의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쒯!

여인의 머리를 향해서 검날이 번뜩였다.

천살마노를 칠 때는 단지 칠 성의 진력만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십 성……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서 전개했으니까 거의 십이 성에 이르는 진력으로 공격한다.

이 순간, 여인이 그를 쳐다봤다.

여인의 눈빛은 바람 불지 않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눈앞에서 돌풍이 일어나고 있는데,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스릇!

바람에 흩날리는 듯 여인의 머리카락이 흘러간다.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움직임이 너무 느려서 일일이 머리카락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팡!

문득, 목 밑에서 강렬한 폭음이 일어났다.

목 밑…… 가슴 부근…… 그것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굉장히 큰 폭음이라는 것밖에.

“운중도…… 대단하네.”

여인이 약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림 저 너머에 한 사내가 널브러져 있다.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서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는데…… 영혼은 이미 육신을 떠났을 게다.

아직까지 피를 토해내고 있는 것은 몸뚱이가 일으킨 작용이다.

여인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전에 베어진 옷을 쳐다보면서 감탄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살이 긁힐 뻔했어.”

손을 들어서 베어진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어깨 부근에 화복이 길게 찢어졌다. 검에 직접 베인 것이 아니라 검기에 찢겨졌다.

놀라운 무공이다.

솔직히 그녀는 유지오혼의 무공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자신의 옷자락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지자문의 무공을 환히 꿰뚫고 있는 상태에서 치른 접전인데…… 그래도 옷자락이 베였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옷자락이 갈린 시점이다.

운중도는 그녀를 치지 못했다. 빈 허공만 갈랐다. 그리고 그녀의 옥장(玉掌)이 가슴을 강타했다.

운중도가 옷자락을 찢은 것은 그다음이다.

즉…… 유지오혼은 숨이 끊어진 후, 마지막 일격을 전개했다. 숨겨진 일초를 터트렸다.

운중도는 생도(生道)와 사도(死道)가 있다.

중원인들은 생도밖에 모르지만, 혈루마옥 무인들은 오히려 사도에 익숙해 있다.

그녀도 사도를 안다.

유지자문 고수들은 목숨을 잃는 순간, 절명하는 순간에 진기를 변형시킬 줄 안다. 이는 초식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마치 절명한 후에 새로운 초식을 전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생도에는 초식이 있다. 법칙이 있다. 숙련된 기술이 있고, 집중된 힘이 있다.

사도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초식이 일어난다. 죽는 자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초식이 전개된다. 진기가 어떤 식으로 변형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도는 즉발성이다.

그녀는 사도를 충분히 조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그녀가 여전히 베인 옷자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곡감에 다 모일 거야. 곡감만 치면 돼. 그렇게 보고해.”

유지자문 고수가 쓰러져 있는 곳, 그 너머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예상대로라면 곡감에 검왕과 십마, 그리고 유지오혼이 모두 모일 겁니다.”

“그래서?”

“주모(主母)를 기다리시는 게…….”

“호호호! 누구를 염려하는 거야?”

“…….”

“검왕?”

“솔직히 그렇습니다.”

“은류, 검왕은 네 상대도 안 된다고 했잖아? 그 말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잊었어?”

“화천 공자는 검왕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패했죠. 저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검왕이 저보다 강하다고 해도 전혀 창피하지 않습니다.”

“뭘 염려하는지 알아.”

“음!”

수림 속 사내가 침음했다.

여인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었기에.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사내는 떠났다. 기척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안다.

‘검왕…….’

여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인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서 색기를 뿜어내는 듯 보였다.

한 명, 두 명…… 혈오를 통해서 혈루마옥 사람들이 재생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주어졌고, 그 삶을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혈루마옥의 저주를 깨고, 통한의 절곡을 벗어난다.

그녀는 선택받았다. 혈루마옥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서 저주를 풀어냈으니까.

이제 혈루마옥에서 생각만 했던 일들을 실천에 옮긴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적벽검문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들을 무너트리고 싶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일은 단신으로 감행해도 성공할 자신이 있다.

화천을 그녀와 견주지 마라.

녹천의 하수와 중평의 진정한 후기지수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저울질하지 마라. 화천의 반듯한 용모만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그녀와 나란히 서지 못했을 게다.

‘그런데 주제도 모르고…….’

그는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아이를 통해서 저주를 풀었다.

참 기분 더럽다.

화천의 행동이 혈루마옥의 염원을 푼 것이라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누미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비웃는 듯, 경멸하는 듯 살짝 비틀려 올라간 그 입꼬리를.

‘검왕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자리에 모두 모인다니…… 일이 수월해졌네.’

유지자문 고수는 이제 피도 토해내지 않는다. 모든 육체적인 행동을 멈춰버렸다.

그녀는 죽음 하나를 뒤로 남겨두고 걷기 시작했다.

운중도 사도에는 또 다른 묘용이 있다.

진력의 변형은 강한 파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파동은 익숙한 사람에게 전해진다. 거리를 불문하고, 시간을 불문하고…… 어떤 사실이 전해진다.

번쩍! 번쩍!

그들이 눈을 떴다.

“넷째가 당했군.”

“넷째가…… 음!”

그들은 잠시 격동하는 듯했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넷째의 파동이 만족한 듯 곧 스러졌다. 어떤 사실만 전하고는 가라앉았다.

만족할 만한 고수를 만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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