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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章 차기(借氣) (4)
날씨는 선선하다. 덥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은 한여름 땡볕에 서 있는 것처럼 덥다. 너무 더워서 몸뚱이라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다.
사박! 사박!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풀잎이 바스락거린다.
“휴우!”
깊은 한숨이 절로 새어나온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때 같으면 모든 소리를 귀담아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발밑에서 일어나는 제법 큰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머릿속이 텅 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데, 꼭 해야 하는데 떠오르는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일을 어쩔꼬…….”
답답한 심정이 나직하게 입 밖으로 토해졌다. 그때,
“상태가 안 좋은 가 보군.”
그가 걷고 있는 숲 왼쪽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깜짝 놀라서 왼쪽 숲을 쳐다봤다. 방금 전에 그가 흘린 소리는 그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고민한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도 안 되고.
지금 그는 혈오를 관장하고 있다.
그가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는 것은 혈오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암시나 다름없다.
그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건장한 체구의 장년인이 보였다.
“아!”
석화선생은 안도의 숨을 불어 쉬었다.
촌장, 촌장이다. 다행히도 그의 한숨 소리를 들어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가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산책 중이십니까?”
“무슨 한숨을 그리 쉬나. 땅 꺼지는 줄 알았네.”
“제가…… 그랬습니까?”
“하하하! 자네가 걸어온 길을 좀 보게. 땅이 푹푹 꺼져있지 않나. 하하하!”
촌장이 농담을 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석화선생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촌장은 석화선생 옆으로 다가왔다.
“조금 걷지.”
“네.”
두 사람은 묵묵히 몇 걸음 걸었다. 서로 말없이. 하지만 그 침묵은 곧 깨어질 것이었다.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가?”
“안 좋습니다.”
“얼마나 안 좋기에 그리 깊은 한숨을 내쉬는가?”
“…….”
석화선생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많이 안 좋나 보군.”
“조금도 호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호전되지 않는다…… 후후! 그 정도로 석화선생이 한숨을 내쉴까.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거겠지.”
“자진 중입니다.”
석화선생은 숨김없이 말했다.
“또?”
“네.”
“진기도인이 문제였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삶의 끈을 놓아버린 듯합니다.”
“상태가 어떻기에 그러나?”
“외면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새까만 피부도 그대로고, 사람을 쳐다보는 눈길도 그렇고. 살갗 이외에는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절 젖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염소젖, 소젖…… 모유까지 먹일 수 있는 것은 다 동원해 봤는데, 모조리 토해버립니다.”
“음!”
촌장이 침음했다.
혈오는 갓난아기다. 혈오가 지닌 특성은 예외로 하고, 갓난아기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침을 쓰지 못한다. 뜸도 뜨지 못하고, 약도 쓰지 못한다.
혈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추궁과혈(推宮過穴)밖에 없다.
허나 석화선생이 이토록 난색을 토로할 때는 추궁과혈도 먹히지 않는다는 뜻일 게다.
추궁과혈이 통하지 않는다…… 혈이 제대로 엉켜버렸다.
그때, 진기도인을 할 때, 혈이 엉킨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혈을 순통한 사람이 네 명이나 되지만, 그 누구도 어떤 이상증세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혈오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럼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미지근한 물만 떠먹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미는?”
“젖이…… 안 나옵니다.”
“이래저래 난제가 겹치는군.”
꿀꺽!
석화선생은 마른 침을 삼켰다.
혈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누미다.
누미에게 혈오를 맡기면 어떨까?
누미는 젖이 생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유도 마을 여인 것을 빌려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누미는 혈오를 싫어한다. 너무 싫어해서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다. 아예 혈오라는 말만 들으면 사색이 되어 버리니.
혈오는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이 부분 만큼은 석화선생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아기가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죽어가는 데는 뾰족한 수단이 없다.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는.
촌장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허허! 그렇게 세상이 살기 싫었던 겐가.”
촌장은 지금 이 상황을 혈오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혈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혈오는 임신 중에도 자진을 택한 적이 있다. 그때는 누미가 위기를 넘겨주었는데, 이번에는 누가 위기를 넘겨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혈오 혼자 뚝 떨어져 있는데.
생각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촌장이 불쑥 말했다.
“화천이 패한 모양이네.”
“…….”
석화선생은 지금 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화천이 패해? 화천? 아! 중원에 나간 화천! 그 아이가…… 패해? 누구에게?
“저, 정말이십니까!”
석화선생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촌장은 침묵했다.
“화, 화천이…… 누구에게 패했습니까? 중원에 화천을 낭패하게 만들 사람은…….”
“적벽검문이 유지자문과 손을 잡은 모양일세.”
“아무리 그렇더라도!”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이 손을 잡는 상황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혈루마옥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약한 자들은 연수연합하게 되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연수가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이다.
“화천이 보기 좋게 얻어맞은 모양이네. 허허!”
“화천, 화천이 당했다면 다른 아이들은?”
“산 사람은 없다는 보고야.”
“…….”
석화선생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입만 쩍 벌렸다.
혈루마옥 무공은 천하최강이다.
화천은 최강의 무학을 익혔다. 당금 천하에서 혈루마옥 사람을 제외하고는 화천을 눕힐 사람이 없다.
화천이 데리고 나간 아이들은? 그들 역시 최강이다.
당금 무림에서 그들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한다. 검성이나 혈천성도 안 된다. 십마 전원이 나서도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하지만 촌장 말이 사실이라면, 적벽검문과 유지자문이 연수를 했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적벽검문의 전력이야 환히 드러나 있지만 유지자문은 비밀이 많으니.
촌장이 석화선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힘들겠지만 혈오를 써야겠네.”
“네?
“보름 안으로 어떻게 해보게.”
“보름……입니까?”
“화천이 돌아올 때까지 보름 정도는 걸릴 것 같네. 허허! 다행이지 않은가. 우리에게 보름이라는 시간이라도 주어졌으니. 그 안에 무슨 수라도 써야지.”
“자금 혈오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부탁하는 것 아닌가.”
석화선생은 멍하니 촌장 얼굴만 쳐다봤다.
지금 촌장은 불가능한 말을 하고 있다.
사실 혈루마옥이 중원 진출에 시한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중원 진출은 언제 해도 무방하다. 지금 안 되면, 내일, 내일 안 되면 내년에 나가도 무방하다. 지금까지 숱한 세월을 인내하면서 지내왔는데, 새삼스럽게 급할 것도 없다.
아니, 아니다.
촌장은 급하게 서두르고 있다.
촌장은 화천이 돌아올 때까지 준비하라고 했다. 그나마 보름이라는 기한이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까지 했다.
화천이 돌아오는 날, 사달이 일어난다.
이것은 직감이다.
석화선생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촌장을 급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촌장을 압박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촌장을 믿는다. 촌장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는다.
촌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판단이라는 것을 잘못한 적이 없다.
촌장의 별호는 무심만계(無心晩計)다.
촌장이 젊었을 때 잠시 불렸던 별호이지만…… 지금 그 별호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촌장은 혈루마옥에서 가장 생각이 깊고 계략이 특출한 사람이다.
촌장이 급하게 서둘 때는 이유가 있다.
“해보겠습니다.”
석화선생은 진정 자신 없는 말을 했다.
“도와주시게.”
석화선생이 진심으로 말했다.
“가세요.”
누미는 여전히 냉담했다.
“그래도 그 아이, 자네 핏줄 아닌가.”
“제가 가도 뾰족한 수가 없어요. 잘 아시잖아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섭섭했다는 것은 아네.”
“섭섭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잘 대해 주셨잖아요.”
“산모에게서 아이를 바로 빼앗았으니…… 그만큼 우리에게는 혈오가 소중했네. 그러니 잠시 분기를 거두고…….”
“분기 같은 것은 없어요.”
누미의 표정에는 얼음이 풀풀 날렸다.
“가서 아이를 돌봐줄 수는 없는가? 그것만 부탁함세. 의술적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넨 그저 따뜻한 정만 쏟아주게. 그것만 부탁함세.”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누미가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무엇인가? 말만 하게.”
석화선생이 즉시 반색했다.
지금까지 냉담하게 거절만 하던 누미가 약간이라도 반응을 보였으니 이게 어딘가.
“앞으로 절대…… 두 번 다시…… 제게서 혈오를 빼앗아가지 마세요.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제 손으로 혈오를 죽여버리겠어요. 약속하실래요?”
“아! 그거라면 걱정 마시게.”
석화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역시 그것이었는가. 아이를 낳자마자 빼앗아가서 원통했던 것인가. 그게 심기를 건드린 것인가. 누미는 그 누구보다도 모성애가 강한 여인이었나.
석화선생이 다짐하듯 말했다.
“그건 염려 말게. 앞으로는 절대로 자네 허락 없이 혈오를 내돌리지 않겠네.”
“그럼 가요. 제가 볼게요.”
누미가 흔쾌히 일어섰다.
석화선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얼떨떨해하면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누미는 혈오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저었다. 안색이 싸늘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의 모든 행동들이 혈오를 빼앗긴 데 대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천만다행이고.
석화선생은 난제를 푼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미가 혈오를 어떻게 달래줄 수 있느냐, 자진하려는 혈오의 마음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느냐 하는 실질적인 문제는 아직도 남아있는 상태지만.
‘못난 놈.’
누미가 혈오를 쳐다봤다.
혈오는 여전히 새까맣다. 기식도 엄연하다. 태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다.
누미는 어미의 눈으로 혈오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에게서 저주를 풀어주는 도구로 쳐다봤다.
‘나 좀 도와줘야겠어.’
그녀는 혈오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혈루마옥의 저주를 받았다. 혈루마옥의 이상한 마기가 그녀를 잠식해 버렸다.
그녀 역시 계곡을 떠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 기운을 떨쳐줄 사람, 혈오밖에 없다.
지금, 혈오는 문제가 많다.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그녀는 혈오를 보자마자 혈오의 상태를 알아챘다.
이상한 일이지만 혈오의 마음도 이해되었다. 태아를 품고 있을 때 느낀 그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혈오는 살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런 혈오라고 어미 한 사람쯤은 살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 좀 도와줘야겠어.’
그녀가 혈오를 가슴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