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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97화 (97/225)

# 97

第二十章 차기(借氣) (2)

츠으으읏!

진기가 유유하게 흐른다.

언제나 운기조식을 하면 기분이 편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세상이 잠잠해진다.

오늘은 특히 더 그렇다.

바깥세상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각이 떨어져 나간다. 냄새도 맡지 못한다. 눈을 감으니 저절로 시각도 떨어진다. 청각이 떨어지고, 가장 마지막으로 촉각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오감이 떨어진다.

진기를 운용하는 자와 진기를 운용하는 몸이 남는다.

물이 흐른다. 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급할 때는 급하게, 천천히 흐를 때는 천천히…… 진기를 조절하는 사람은 없다. 진기는 스스로 흘러간다.

진기를 운용하는 자마저 사라진다.

오직 진기만 흐른다.

몸도 마음도 없는 곳에서, 처음도 끝도 없는 곳을…… 진기가 흘러 다닌다.

츠으읏!

어느 한 순간, 각성이 일어난다.

운기조식 중에 느끼는 각성은 이제 그만 운기조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경고다.

경고는 운기를 하는 사람이 사전에 심어둔 것이다.

‘운공을 한 시진만 하자.’

‘진기를 딱 삼백주천만 돌리자.’

각인된 심어(心語)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저절로 일어난다.

이런 경고를 심어두지 않으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운공을 지속하게 된다.

운공은 편안함을 제공한다.

운공은 피땀 흘려서 노력하는 공부가 아니다. 일명 ‘고요함이 주는 쾌락’이라고 하는데, 이 속에 빠져 있다 보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만큼 운공조식이 주는 즐거움은 지극하다.

특히 오늘처럼…… 예전보다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 경우에는 깨어나기가 싫어진다.

“휴우!”

석화선생은 긴 숨을 내쉬었다.

운공 끝에 내쉬는 숨은 진기를 정리하는 측면도 있지만 고요함 속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섞여 있다.

석화선생은 운공을 끝내면서 습관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려 목을 풀었다. 헌데,

‘응?’

그는 목을 풀다 말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촌장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증평주와 녹천주도 눈을 감고 있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린 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

혈루마옥의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인가?

석화선생은 혈오를 통한 진기 정화가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지 못한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기를 정화시킨 후에 다시 거둬들일 때, 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저주가 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저주가 풀렸는지 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혈루마옥을 벗어난 후에야 알 수 있다. 당장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다.

허면 왜 촌장과 일월양장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인가!

‘혈오!’

석화선생은 즉시 혈오를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무릎걸음으로 혈오에게 다가가서 혈오의 맥문을 움켜잡았다. 아니, 맥문을 잡자마자 급히 손을 뗐다.

“헉!”

다급한 경악성이 그제야 튀어나왔다.

혈오가 심상치 않다.

우선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피부색이 완전히 검은 흑색으로 변해 있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래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맥문을 움켜잡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그런데…… 맥문을 움켜잡자마자 강한 전율이 느껴진다.

벼락이 손끝을 스치는 느낌?

혈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꼼지락거린다.

물론 그 모습은 좋게 보이지 않는다. 혈오는 여전히 촌장을 쳐다보도 있다. 촌장이 머리 위에 있는 관계로 검은 동공이 없이 하얀 눈동자만 희번덕거린다.

새까만 옻칠을 해놓은 듯, 검은 먹물에 풍덩 담갔다가 꺼내놓은 듯 새까만 피부에 눈동자만 새하야니 마치 악마의 자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석화선생이 말을 더듬거렸다.

촌장은 고개를 좌우로 설래설래 흔들었다.

“깨어나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군.”

녹천주가 촌장 대신 말했다.

석화선생은 다시 조심스럽게 혈오의 맥문을 잡아갔다.

방금 전에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맥문을 잡았다가 벼락을 맞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으니 충분히 조심하면서 잡는다.

스읏! 팟!

살짝 손끝만 스쳐 봤다.

헌데 아니나 다를까 손끝으로 벼락이 스며든다.

“웃!”

석화선생은 예상을 했으면서도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무슨 현상인가?”

촌장이 물어왔다.

“방어기제(防禦機制)입니다.”

“어떤 종류인가?”

방어기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비정상적인 방어기제와 정상적인 방어기제가 있다. 예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있고, 예정된 억압에 예정된 반동이 튀어나오는 것이 있다.

석화선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촌장이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는 진맥조차 거부한다.

혈오의 피부에 손가락을 대면 즉시 강한 벼락을 투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실제로 혈오가 벼락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설혹 혈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혈오 같은 갓난아기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이 방어기제는 타고난 것이다.

비정상적인 방어기제라기보다는 정상적인 방어기제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석화선생은 혈오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혈오가 맥문을 내주지 않기 때문에 눈꺼풀을 살피고, 눈동자를 보고, 혓바닥을 살피고…… 온갖 관법과 찰법을 동원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해 나갔다.

“정상적인 방어기제입니다.”

“정상적이라고?”

“이 현상은 짧으면 보름, 길면 한 달 정도면 풀립니다.”

“그럼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다시 도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석화선생은 말끝을 흐렸다.

혈오를 진찰한 결과, 진기의 응집(應集)을 찾아냈다.

촌장과 일월양장, 그리고 자신이 진기도인을 하는 동안에 혈오의 체내의 어떤 응집이 생긴 듯하다.

그것이 방어본능을, 방어본능은 벼락을 이끌어냈다.

그 응집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풀린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해도 완전히 풀린다.

응집이 풀리면 벼락은 사라진다.

응집이 사라지면 새까맣게 변한 피부색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다만, 그 후에도 진기도인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지 못한다.

어쨌든 지금 혈오의 경맥은 많이 꼬인 상태다.

경맥이라는 것, 한 번 꼬이면 영원히 정상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반드시 상처를 안고 간다.

혈오의 몸뚱이는 일종의 정화 도구다.

구정물이 미나리 밭을 통해서 맑은 물이 되듯이, 저주받은 진기가 혈오를 관통하면서 정화된다. 혈루마옥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물론 그 결과는 아직 모른다. 직접 몸으로 시험해 봐야 한다.

정말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저주를 풀어낼 수 있다면…… 이미 시험을 마친 촌장과 일월양장, 그리고 석화선생 자신이 저주를 풀어냈다면…… 혈오는 천신(天神)이 된다. 그 어떤 영약보다도 진귀한 존재가 된다.

이런 사실을 혈루마옥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혈루마옥의 모든 신경은 이곳을 향하고 있다.

희망인가, 절망인가.

혈루마옥을 벗어날 수 있나,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두들 강렬한 희망을 품고서 지켜본다.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헌데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된다면……

“혈오가 정상이 된 후에 도인을 할 수 없다면…… 휴우! 모르긴 해도 미치는 사람이 꽤 많이 나올 거예요.”

증평주가 힘겹게 말했다.

촌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일단, 오늘 도인은 하지 않은 것으로 한다.”

“…….”

모두 침묵한 채 촌장을 쳐다봤다.

“허허! 이거…… 맛있는 음식을 우리만 먹은 격이지 않나. 이래서야 불공평하지. 하하하! 도인…… 하지 않은 것으로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혈루마옥 밖으로 나가지 마.”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일월양장이 동시에 대답했다.

“자네는 방법을 찾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 후에는 다시 시도할 수 있어야 하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석화선생이 자신없게 말했다.

도인이 일어나기 전에 혈오가 방어기제를 꺼내놓았다.

이것이 공식적인 발표가 될 게다.

혈오는 미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다. 허니 혈오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이 처음이다. 새롭게 펼쳐지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혈오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도인을 하려는 순간, 혈오가 방어막을 펼쳤다. 진기를 응집시켜서 진기 투입을 가로막는다.

충분히 설득력 있다.

이 주장을 그대로 이어가도 된다.

한 달 후, 혈오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도인을 할 수 없다고 발표하면 된다.

물론 혈오에 대한 환상은 깨질 것이다. 허나 혈루마옥 사람들은 곧 다른 방책을 강구하기 시작할 게다.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연구를 거듭할 게다.

물론 촌장과 일월양장, 그리고 석화선생이 도인을 시도했고, 효과를 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진다.

철저한 비밀 보장이 우선시된다.

“너란 놈…… 후후! 하기는 너도 생명이니 이런 식으로 당하기는 싫겠지.”

석화선생은 혈오를 쳐다보며 웃었다.

진기도인을 하면서 그것이 혈오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 이런 진기도인은 받는 사람에게 더 큰 복을 주기도 한다.

진기도인은 경맥을 정화시킨다.

강한 진기가 밀려오면 경맥이 넓어진다. 순탄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진기가 한층 편안하게 움직인다.

진기도인은 내공 소모가 막심한 공부다.

그래서 주는 쪽은 진기도인을 무척 망설인다. 주로 극심한 내상을 입거나 진기도인이 아니면 치료하지 못할 독상을 치료할 때만 간간이 쓰곤 한다.

그래서 진기도인을 시전할 때부터 일정한 내공 소모는 각오했다.

진기의 일부분을 잃게 되지만, 그래도 혈루마옥의 저주를 벗어나게 되니 다행이다.

촌장, 일월양장,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 그런 생각을 했다.

혈오는 손해 보는 것이 없다. 오히려 갓난아기가 벌모세수하는 기연을 얻게 될 게다.

이 생각은 옳다.

무림인을 붙잡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같은 말을 할 게다.

헌데 혈오가 방어막을 쳤다.

혈오에게 무엇인가 손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석화선생은 자신이 받아들인 진기에 주목했다.

진기를 투입하기 전과 정화된 후의 진기…… 내공 소모가 일어났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정순하게 순화되었다. 내공이 더욱 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득실로 따지면 주는 쪽이 더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혈오가 손해를 본 게 맞다. 무엇인가 아주 큰 상처를 입은 듯하다.

석화선생은 계속 혈오를 관찰했다.

한 시진에 한 번씩 벼락을 맞는 것도 감수했다. 진맥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맥문에 손가락을 대야만 하고, 그때마다 찌릿 벼락이 일어났다.

혈오를 통한 진기 정화, 과연 효과가 있을까?

효과가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혈루마옥을 벗어나야 하는데, 석화선생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혈오가 무엇을 잃었느냐 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무엇을 잃었기에 이토록 처절하고 강력한 방어막을 친 것인가.

스읏! 찌릿!

한 시진이 지나간 듯해서 손가락을 댔고, 또 한 번 벼락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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