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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章 혈벽(血壁) (5)
휘이잉!
강바람이 불어온다. 차디찬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친다. 마구마구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
화천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 비어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이런 일, 이런 경우, 이런 지랄 같은 결과를 예상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돌아갈 수 없어.’
머릿속에서 생각이란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혈루마옥 사람들이 쳐다볼 눈길을 상기시킨다.
조롱, 멸시, 끝없이 추락하는 위신.
그는 더 이상 혈루마옥의 후기지수(後起之秀)가 아니다. 이 한 번의 잘못된 출행으로 인해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권좌 다툼에서 밀려나 버렸다.
중원 출행에 나서자마자 제대로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수하를 모두 잃었다.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것도 아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검왕이 앞을 가로막기까지 유지자문의 등장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이다.
유지자문의 출행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대응 또한 완전히 달랐을 텐데.
어쨌든 혈루마옥의 첫 출행에 재를 뿌렸다.
그리고 이 치욕은 그가 살아가는 평생동안 꼬리표처럼 뒤를 쫓아다닐 것이다.
‘돌아갈 수 없어.’
그는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봤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기만 한다. 그에게 생긴 일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강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검왕은 혈루마옥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그런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주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었는데도. 아니, 죽일 수 없었나? 자신을 죽이면 혈오가 발광을 할 테니까?
화천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검왕, 혈루마옥, 혈오, 그리고 누미…… 자신과 연관된 모든 사람을 기억에서 밀어냈다.
‘돌아갈 수 없어.’
그는 강둑을 따라서 걸었다.
“혈루마옥으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데요.”
누강이 검왕의 눈치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젊은 사숙이 누구인가. 천하에 적수가 없다면서 거침없이 질주하던 혈루마옥 화천을 단숨에 꺾어버린 무적의 고수이지 않은가.
검왕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공관의 마서를 수련한 후에는 더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화천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그는 검왕을 가장 잘 알면서 또 잘 알지 못한다.
당장 그가 왜, 어떤 방법으로 마공관의 마서를 수련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검왕은 정도를 벗어났다.
그는 사문의 무공이 아니라 마공을 수련했다. 그런데도 사문은 그를 축출하지 않는다. 왜?
어찌 보면 사문은 봉문을 이유로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셈이다.
검왕은 화천에서 죽었다. 분명히 죽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세상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도 있나?
검왕은 되살아난 이후, 터무니없이 강해졌다.
그와 함께 사문을 다녀올 때는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강해졌다. 자신을 죽였던 화천을 오히려 무너트릴 정도로. 어떻게 해서?
검왕에 대한 모든 것이 의문이다.
어찌 생각하면 겉모습만 그가 알고 있는 검왕이고, 속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그가 이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음사는 아예 검왕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렇게 보낼 참입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
“후후! 화천은 죽일 수가 없는 자입니다. 죽어서는 안 되는 자라는 말이 맞겠군요.”
“아까 말한 그 혈오라는 아이 때문입니까?”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누미…… 고것이 도대체 어떤 아이를 낳은 건지…….”
누강이 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에게 누미는 친딸이나 진배없다. 사제의 인연으로 만났으나, 친딸과 다름없이 애정을 쏟았다.
그녀가 잘되기를 바란다.
어쩔 수 없이 혈루마옥으로 끌려갔다고 해도,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설혹 그녀의 남편이 팔두육비(八頭六臂)의 괴물이라고 해도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누강의 마음이다.
누미는 어떤 아이를 낳은 것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피 냄새 물씬 풍기는 혈오라는 별칭을 붙인 걸 보면 썩 좋지 못한 일에 휘말린 듯한데.
검왕이 말했다.
“혈오가 있는 한, 화천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럼 아까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어찌할 뻔했습니까?”
“제가 죽어야지요.”
“뭐요?”
“화천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걸 알면서…… 싸웠다는 말입니까?”
“발길을 돌리도록 만들어야 하니까요.”
“허!”
누강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한 사람은 죽일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마음껏 죽일 수 있다.
이런 불공평한 상황에서 검을 맞댄다면 승산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명확하다.
화천이 이런 이점을 이용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그러면 화천은 왜 이런 이점을 이용하지 않았나?
검왕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니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화천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 공산이 높다. 또 알았다고 해도 화천 정도의 무인이라면 무공으로 떳떳하게 승부를 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화천의 생각이 어느 쪽에 있든 그는 이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쩝! 살려 보내더라도 구원(舊怨)이 있으니 사지 중에 하나는 떼어내셔도 될 듯한데.”
음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검왕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데, 면전에 대놓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것이다.
그들은 화천이 점으로 변해서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막연히 서 있었다.
‘요마랍기!’
검왕의 진신 무공이 무엇이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혈영마공과 요마랍기라면 상극의 무공을 동시에 수련해 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혈영마공은 중평의 무공에 해당한다.
요마랍기는 녹천의 무공과 같은 류이다.
한 마디로, 검왕은 녹천과 중평의 무공을 한 몸에 수련해 낸 것과 진배없다.
더군다나 그는 이 모든 무공을 검에 밀집시켰다.
검왕은 괴물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건 불가능해.’
고개가 절로 가로저어진다.
혈루마옥 사람들치고 무공에 대해서 천재 아닌 사람이 없다. 타고난 근골이 무재 아닌 사람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로 태어난 족속들이다.
그들도 증평과 녹천 무공을 합일시키고자 노력했다.
음양을 합일하면 일태(一太)가 된다. 천지만물을 아우르는, 아니 천지만물 그 자체인 공(空)이 된다.
이 세상과 한 몸이 되어버린 사람!
무공이 그런 경지에 오르면 거침이 없게 된다. 혈루마옥에 걸린 저주 따위는 한낱 장난감에 불과해진다. 혈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유롭게 인간 세상의 굴레를 벗어난다.
혈루마옥 사람들이 왜 이런 이치를 모르겠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는 금제에 갇혀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극심하다.
더 높은 무공에 대한 갈망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음양합일을 연구했다.
사실, 세상에는 음양합일에 대한 무리가 상당수 존재한다. 그리고 태극(太極)을 이룬 무공도 많다.
그러나 그런 무공들은 혈루마옥 사람들에게 맞지 않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특이한 체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남자는 양기가 너무 강해서 음의 무공을 배워야 하며, 여자는 음기가 너무 강해서 양의 무공으로 중화를 시켜야 한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미 자신들 내부에서 음양합일이 이루어져 있다.
이런 균형이 무너지면 그들은 죽는다.
음양합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련해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음양합일을 그토록 원하는 것인가. 이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녹천은 내양(內陽)과 외음(外陰)의 조합이다.
이런 균형으로는 삶을 유지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혈루마옥의 저주는 벗어나지 못한다.
중평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외양(外陽)과 외음(外陰)의 합일이다.
바깥에서 생성된 공(空)을 만든다. 허면 공이 내양(內陽)까지 일시에 소멸시켜버린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저주의 체질이 일시에 변형된다.
그들은 안과 밖 모두 공히 공(空)이다.
이는 중원 사람들이 양공과 음공을 다루어서 음양합일로 공을 이룬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밖에서 합일을 이루려면 지금 당장 자신들이 이루고 있는 균형부터 무너트려야 한다.
이미 이루고 있는 균형을 무너트리지 않고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가 없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무공과 극성이 되는 무공을 연마할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혈루마옥은 어떠한 예시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토록 그들이 원하는 것, 그것을 검왕이 이뤄냈다.
혈영마공은 음공의 정화로 여타의 무공을 수용하지 않는다. 어떠한 신공, 마공이든 수련의 기틀을 마련하는 즉시 혈영마공 화(化) 되어 버린다.
그런 점은 요마랍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검왕이 혈영마공을 수련했다는 말은 후천적으로 녹천인이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음양의 균형이 무너진 녹천인이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혈영마공을 수련한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끝없이 생명의 불꽃을 살라대다가 어느 한순간, 소리 없이 소멸해 버린다.
요마랍기는 반대의 경우다.
이 두 무공은 상극을 무공을 필요로 한다. 음양의 조화를 이뤄야 생명 유지가 가능한데…… 허나 다른 무공을 수련하면 즉시 혈영마공화, 또는 요마랍기화 되어 버린다. 어떤 상극의 무공을 수련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혈영마공을 마공 중에 마공이라고 하는 게다.
혈영마공을 수련한 사람은 내공의 강약에 상관없이 삼 년 이상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왕은 어떻게 혈영마공과 요마랍기를 동시에 수련해냈나.
‘혈영마공과 요마랍기라면 공자님이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인사에 철저히 당했어.’
엄밀히 말하면 검왕이 펼친 무공은 인사라고 할 수도 없다.
요마랍기로 펼쳐야 인사다. 허나 검왕은 혈영마공과 요마랍기, 두 무공을 중화시켜서 새로운 신공을 창안해냈다. 그리고 그 무공으로 펼쳤다.
인사의 형태를 지닌 전혀 새로운 무공이다.
그는 숨을 죽이면서 검왕 일행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즉시 움직이고 싶지만…… 화천을 무너트린 검왕이 있지 않은가. 그만한 무공이라면 그를 잡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게다.
모험을 할 수가 없다.
지금 그가 목격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촌장님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이런 일은 화천이 해야 하는데…… 화천은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요마랍기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화천은 누미를 데려와 혈오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매우 지대한 공헌이다. 혈루마옥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검왕은…… 검왕이 습득한 것을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다면…… 그러면 선천적인 저주를 근본에서부터 무너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숨죽이고 있는 사이, 검왕이 걷기 시작했다.
누강이 말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유지자문을 만나야지요.”
“아! 그 사람들…… 헌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나온 겁니까? 혹 숙부님께서…….”
“…….”
“아! 제가 실언을. 죄송합니다.”
검왕이 힐끔 돌아봤을 뿐인데, 누강은 즉시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챘다.
유지자문에 대한 일은 함구한다.
“저…… 검왕님…….”
음사가 검왕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도 검왕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검왕의 눈을 보자 단박에 의도하는 바가 읽힌다.
함구(緘口)!
검왕이 뜻이 정말 함구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사실이다.
“왜?”
누강이 음사에게 물었다.
그러나 음사는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누군가 있는데…… 똥물에서 노는 놈들은 냄새가 다르지. 어디선가 내 냄새가 나. 나와 같은 부류가 숨어있는 것 같은데…….’
느낌이 오는 곳이 있다. 그러나 음사는 그곳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았다. 모든 행동들이 검왕의 눈빛에 가로막혀 버렸다.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 아무 행동도 일으키지 않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