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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章 혈벽(血壁) (4)
츠읏! 츠으읏!
기세가 일어난다. 옅은 기운이 안개처럼 흐르면서 주위를 휘감는다. 구석구석을 살핀다.
팟!
한순간, 느낌이 일어난다.
‘노옴!’
적이 있다. 그의 느낌에, 직감에 적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피어난다.
적이 눈앞에 있다.
적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확신한다. 고요함 속에서 인기척이 일어났다. 그 느낌…… 절대로 잘못 알았을 리 없다. 예기(銳氣)를 잘못 읽었을 리 없다.
분명히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검을 쳐내지 못했다.
살기가 쫓아가는 곳에 개[犬]가 있다. 살검 끝에 걸리는 것은 늘 개다. 죽은 개다.
그는 산 사람을 베지 못하고 죽은 개만 베어낸다.
몇 번을 공격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개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자신했던 적은 없다.
‘노옴!’
그는 신음만 토해낼 뿐, 검을 쳐내지 못했다.
놈의 은신술은 단연 최고다.
놈은 자신의 존재를 개로 가리고 있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상대해 왔다면 벌써 발각되었겠지만, 개라는 존재가 그를 가려주고 있다.
이것은 전에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은신술이다.
은신술을 이 정도로 구사하는 자라면 분명히 무공도 강할 것이다.
아무리 개를 이용한다고 해도 눈앞에서 퍼뜩퍼뜩 사라지는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는 역습도 가능하다.
자신이 죽은 개를 베어내는 동안 틈이 생긴다. 상대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습을 할 만한 기회는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그런데도 공격해 오지 않는다.
이것은 무공이 약하다거나, 기습에 자신이 없어서 손을 쓰지 않는 것이라도 생각할 수 없다.
적은 관찰하는 중이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혈루마옥의 무공이다. 신법, 보법, 검법,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까지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다.
‘미치겠군.’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툴툴 웃었다.
처음 적을 맞이했을 때, 좋은 호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검을 두 번, 세 번 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자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미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이봐, 이제 볼 만큼 보지 않았어?”
그가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검을 밑으로 축 늘어트리면서 말했다.
적은 앞에 있다. 앞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살기도 읽었다. 앞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도 검을 쳐내지 못하고 말을 한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스읏! 스으읏!
전면에서 안개가 피어난다.
적은 형체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연막부터 피웠다. 그리고 옅은 운무 속에서 신형을 일으켰다.
적은 그가 예상했던 지점에 있었다. 그가 사람이 있다고 추측하면서도 공격하지 못했던 곳에서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바로 그곳, 그곳에 있었다.
연막은 곧 사라졌다.
그가 상체를 꼿꼿하게 곤두세울 무렵, 옅게 피어나던 안개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는 그의 은신술을 가려주는 도구다.
그가 어떻게 숨었는지, 숨은 곳에서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가려준다.
그는 눈빛을 반짝였다.
숲에서 몸을 일으킨 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발가벗은 것도 아니다. 모포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긴 장포로 몸을 가렸다.
꼭 널찍한 천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 같다.
장포는 전신을 모두 뒤덮었다.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을 들고 있는 손도 가렸다.
검이 들려 있기는 한데, 검을 들고 있는 손은 장포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오직 검날만 보인다.
머리는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길렀다. 허나 얼마니 씻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수세미처럼 마구 헝클어져 있다. 빗으로 빗어도 빗겨지지 않을 것 같다.
긴 머리가 얼굴을 가려버렸다.
기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만 맹수의 눈처럼 날카롭게 번뜩인다.
‘귀신이 따로 없군.’
그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겉모습에 이토록 철저하게 무관심한 자들이라면 오직 유지자문밖에 없다.
그들은 은둔자들이다.
무공을 성취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무공을 수련하는 욕망만 지닌다. 그들은 불도에 전념하는 스님처럼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무공만 수련한다.
혈루마옥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유지자문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 원해서 고립된 지역을 찾아서 숨었다.
한쪽은 원하지 않았고, 한쪽은 원했다.
헌데 고립을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원해서 고립된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다.
모순이지 않은가?
유지자문은 이런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
유지자문은 혈루마옥을 종종 찾아온다. 그리고 죽는다.
말했지 않은가. 혈루마옥은 들어오는 길은 있어도 나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단 절곡에 발을 디디면 혈루마옥의 일원이 되거나 죽는 방법밖에 없다고.
유지자문 사람들은 살 생각으로 혈루마옥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을 생각으로 찾아왔다. 오직 하나, 단 한 번 짜릿한 비부만 할 수 있다면 만족하다면서.
그들 중에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없다.
혈루마옥의 일원이 되어서 남은 사람도 없다.
유지자문과 혈루마옥은 초면이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죽음의 대결을 계속 벌여왔다.
중원에서 이런 식으로 맞닥트리는 것…… 이건 완전히 선전포고다. 혈루마옥에 찾아와 죽음의 비무를 청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지금까지는 혈루마옥이 유지자문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건드려야겠다. 그동안은 도전해 오는 자만 응징했는데, 이제부터는 이들 본거지를 찾아 나서야겠다.
유지자문, 너희들이 먼저 도발한 게다.
지금 자신이 싸우고 있는 자는 분명히 자신보다 강하다. 그의 은신술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곧 벌어질 결전의 결과도 빤히 예측된다.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결국 유지자문은 몰락한다.
이런 식으로 혈루마옥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 이들을 지켜보고만 있을 혈루마옥이 결코 아니다.
자신이 할 일은 오직 하나, 자신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어떤 수법에 죽었는지…… 가급적 유지자문 고수에 대한 일을 많이 알려주는 것만 남았다.
이자가 자신의 시신을 보존해 준다면 몸에 새겨진 검흔(劍痕)만으로도 충분하다.
선 몇 개에 불과한 칼자국이면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낸다.
이자가 자신의 시신조차 남겨놓지 않는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이미 자신은 혈루마옥 고수들을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으니까.
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죽었든 살았든 생사 여부에 상관없이, 혈루마옥은 유지자문의 등장을 알아챈다.
“후후후!”
그는 눈앞에 선 장포 사내를 보며 웃었다.
“유지자문인가? 도대체 개를 몇 마리나 가져온 거야?”
그가 비웃듯이 말했다.
“열두 마리.”
장포 사내가 진중하게 대답했다.
“열두 마리? 열두 검…… 와살검법을 모두 다 봤군. 그 이상은 필요치 않나?”
“적혈검법은 이전에 봤다.”
“이전? 이전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건가?”
“오늘 죽는 게 너뿐이 아니다.”
“그런……가?”
그가 허망한 마음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마도 오늘…… 죽음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을 이끌고 나선 화천 또한 곤궁에 처했을지 모른다. 아니, 곤궁에 처했다. 보나 마나 아주 어려운 지경일 게다. 유지자문이 혈루마옥을 적으로 돌렸다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으니까.
“오늘 죽음이 나뿐이 아니라면…… 괜히 시간을 끌었군. 빨리 죽어주는 게 그대에게 나을 것.”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와살검법과 적혈검법에 대해서 모두 안다면 그 검법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빤히 읽히는 수법을 사용해 봤자 소득이 없을 게다.
적을 치려면 다른 검법이 필요하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검을 정 중앙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잡아도 충분한 검을 두 손으로…… 검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는 오른손 밑을 받쳐 들었다.
특이한 파지법(把持法)이다.
유지자문의 고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너희 놈들, 우리 쪽에 와서 많이 죽었잖아. 너희만 본 게 아냐. 우리도 눈이 있으니 당연히 본 게 있겠지.”
“그런가? 그런데 그걸로 될까?”
유지자문 고수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도 그가 한 것처럼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 왼손으로는 오른손 밑을 받쳐 들었다.
이것이 유지자문의 검공, 벽수일탈검(璧水一脫劍)이다.
고오오오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유지자문 고수는 그가 두려워서 개를 이용한 게 아니다. 지금 맞상대를 하고 있는 점이, 그의 검 앞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그는 그의 무공을, 혈루마옥의 무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것뿐…….
파앗!
그가 먼저 신형을 쏘아냈다.
상대가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상대의 검법으로, 조용하게 신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대에게, 빈틈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먼저 도발을 걸어갔다.
누가 봐도 승산이 없다.
쒜에에에엑!
그도 검을 마주쳐왔다.
두 사람 모두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두 사람 모두 천천히, 빠르지 않게, 느릿느릿 검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화악!
한순간, 두 사람은 번갯불보다 빠른 흐름을 보였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다가 갑자기 폭포가 되어서 뚝 떨어져 내리듯이, 번갯불이 쏟아지듯이, 그렇게 검광이 치솟았다. 천지가 바뀌는 듯 굉렬하게.
“큭!”
그 속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후후후!”
그가 연이어 웃음을 흘린다. 신음 뒤에 미약한 웃음을 흘린다.
혈루마옥을 벗어나 중원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당연히 혈겁을 생각했다.
자신들이 혈겁을 일으킨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이 혈겁의 주역이 되어서 중원을 피로 물들인다. 손에 피를 묻힌다. 사람을 죽인다. 약한 자를 경멸하며 짓밟는다.
신이 되어서 무림을 활보한다.
그들은 이런 상상을 하면서 중원을 밟았다.
헌데 발을 내딛자마자, 손에 피를 묻혀보기도 전에 유지자문에게 막혔다.
유지자문, 이들은 자신들을 기다렸다.
올 것을 알고, 완벽한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툭 떨궜다.
“음!”
긴 장포를 입고 있던 자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혈루마옥 고수가 고래를 떨군 후에.
혈루마옥 고수는 틀림없는 벽수일탈검을 사용했다. 자신들이 너무 잘 아는, 꿈에서도 그려낼 수 있는 검법을 사용했다.
무공을 주워듣고 익힌 자가 창안자에게 대든 것과 똑같다.
헌데도 일검을 맞았다. 앞가슴이 길게 갈리고 말았다. 장포가 쩍 벌어졌고, 앞가슴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지혈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깊다.
다 잡은 적이라고 생각했거늘, 어떻게 이런 일이…….
“역시 혈루마옥.”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지혈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처를 돌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신 방금 전에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일검을 맞았는지, 그 과정을 돌이켜본다.
검이 같은 호선을 긋고…… 자신이 상대의 검을 피하면서 일검을 쏟아내고, 그 순간에 일어난 변식(變式)…… 검의 변화…… 예상하지 못했던 검로…….
‘그렇게도 흐를 수 있었군.’
그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초식을 찾아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초식은 혈루마옥 고수들이 찾아낸 검로다. 그러니 혈루마옥 무공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벽수일탈검을 사용하는 자가 이 초식을 맞이하게 되면…… 자신처럼 앞가슴이 베이게 된다.
‘아!’
그는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토해냈다.
지금 이 순간, 다른 곳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헌데 그들…… 자신처럼 요행을 바랄 수 있을까? 자칫 이 수에 당하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무엇도 보장할 수 없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