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92화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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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章 혈벽(血壁) (2)

슈웃!

검 한 자루가 비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화천의 검은 얼음 같은 고요함에서 일어난다. 아주 조용히, 아주 자연스럽게.

새가 숲을 날아다닌다. 비조(飛鳥)!

새는 나무가 울창한 숲을 빠른 속도로 날아다닌다.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고 바위에 부딪히지 않고, 속도도 늦추지 않고 매우 빠르게 날아다닌다.

고요함 속에서 검을 쳐내면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상대가 들고 있는 병기는 나무나 매한가지다. 일종의 장애물이다. 상대가 펼치는 초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와 같다. 언제 어디서 휘몰아칠지 모른다.

허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

숲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일절 장애물에 구애됨이 없이 빈 공간을 골라서 검을 쳐낸다.

이것이 혈루마옥의 검공이다.

새가 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조화가 필요하다.

인위적인 노력이 아니다. 눈으로 보고 피하거나, 감각으로 주시하고 피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눈으로 보고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거스른다거나 이겨내려고, 또는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몸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익숙한 상황이다. 항상 그래 왔다. 나뭇잎도 항상 흔들려 왔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새에게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일상생활이듯이, 혈루마옥 무인들은 상대방의 병기나 초식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혈루마옥의 검공은 그런 상태에서 펼쳐진다.

상대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병기? 아니다. 고작 나무일 뿐이다. 상대가 전개하는 초식은 무엇인가? 주의를 해야 하는가? 아니다. 고작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일 뿐이다.

병기나 초식을 보고 파해법을 찾지 마라.

자연스럽게, 아주 익숙하게 빈 공간이 드러나면 그곳으로 날아들면 그만이다.

이런 모든 일들이 새가 숲을 날아다니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화천은 숲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다.

검왕이 대응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 아니면 대항할 생각을 못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무방비 상태로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는 바람이 되어서 들판을 가로지른다.

자만심에 들뜨거나 검왕을 비웃지는 않는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시당해야 하는 존재는 없다.

어린애가 몽둥이를 들었어도 몽둥이는 몽둥이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어린애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는 수가 있다. 그런 몽둥이에 팔다리가 분질러진다.

검이 불꽃을 일으키는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 이것도 혈루마옥의 정신이다.

쉬이잇!

검이 바람을 가른다. 허공을 가른다. 매우 빠르게,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끝!’

화천은 마지막 거리를 넘어섰다.

검왕이 검을 맞지 않으려면 무슨 수단이든 써야 한다. 뒤로 물러서기라도 해야 한다. 그 최후의 거리…… 이제는 어떤 수단을 쓰든 검을 피할 수 없는 거리를 넘어섰다.

이제는 분명해졌다. 검왕은 몸뚱이로 검을 맞이한다.

슈우우웃!

화천은 거침없이 검을 내뻗었다. 순간,

휘루룽!

검왕 쪽에서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검왕이 일으킨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검왕이 서 있는 쪽에서 울려온 것 같다.

아니다. 검왕이 수단을 부렸다.

화라라락!

갑자기 검왕이 입고 있는 검은 무복이 부풀어 올랐다. 마치 옷 속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폭혈(爆血)?’

화천의 미간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혈영마공 중에 폭혈이라는 최후절초가 있다. 전신 경맥을 일시에 폭발시켜서 적과 함께 자진하는, 혹은 본인 스스로 분참(分慘)하는 죽음의 초식이다.

얼핏 보기에 검왕은 폭혈을 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가 미간을 찡그린 것은 폭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고작 이런 수단을 믿고 태연했냐는 일종의 비웃음이다. 아니, 검왕에 대한 실망이라고나 할까?

‘후후! 겨우 이것인가.’

그는 크게 실망했다.

검왕이 자신 있게 말할 때는 무엇인가 그만한 무공을 준비해왔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무공이 아니라도 좋다. 그를 긴장시킬 수 있는 수단만 가져왔다면 흥미를 가져줄 수 있다.

적어도 동귀어진 같은 얕은수는 아니다.

같이 죽자는 방식은…… 무인이라면, 아니 무인이 아닐지라도 약자라면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동귀어진을 시도한다고 해서 다 통하는 것도 아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혈루마옥 무인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최후의 수단이 바로 이 동귀어진이다.

중원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에 대해서도 순순히 승복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중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과 같이 죽으려고 한다. 무공이 약하면 인정하고 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깨끗한 승복이 그렇게 어려운가?

그래서 혈루마옥 무인들은 어린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들 최후의 순간에 펼쳐질 동귀어진 수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것이 아니지만.

화천은 동귀어진 수법에 대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할 필요가 있는가?

빽빽한 밀림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는 본인보다 더 빠르거나 불의의 흉기에 접하지 않는 한, 잡히지 않는다.

그는 빠르다. 날카롭다.

숲조차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해서 더듬거리는 위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랴.

슈웃!

그는 검왕의 부풀어 오른 무복을 무시하고 힘껏 검을 내질렀다.

‘겨우 폭혈을 믿은 것이라면 너는 또 한 번 죽을 것!’

슈우우웃!

그의 검이 검은 무복을 찌르고 들어섰다. 순간!

‘응?’

그는 검이 무복에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복이 떡처럼 물컹거린다.

검이 무복에 닿자마자 마치 아교에 달라붙은 것처럼, 아니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끌려 들어간다.

검이 무복을 찌르는 순간, 느낌이 온다.

‘이건!’

혈영마공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수법이 있다.

일명 인사(引死)라고 하는데, 끌어들여서 죽인다는 뜻이다.

물론 정확한 초식명은 따로 있을 것이다. 허나 초식인지 신공인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막연히 인사라고만 부른다. 그리고 그 수법은 인사라는 말로 충분히 설명된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강하게 끌어당겨서 죽인다.

일단 인사에 걸려들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인사라는 수법을 알지 못하니 설명할 수 없다. 다만 혈영마공에 당한 자들 중에 상당수가 이 수법에 죽은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 검왕의 무복은 진기의 응집체다.

그는 화천의 검에 저항하지 않는다. 화천의 검을 받아들인다. 몸을 뚫고 들어오란다.

슈우우웃!

화천의 검은 여지없이 무복을 꿰뚫고 들어갔다.

순간, 화천은 미련없이 검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훌쩍 뒤로 이 장이나 물러섰다.

검을 잡고 있으면 잡힌다. 검은 놈의 살을 찌르지 못한다. 지금은 단지 추측이지만…… 무복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엄청날 것이다. 그의 진기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굳세고 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을 느꼈을 때는 인사라는 수법에 말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갈 것이다.

검을 잡아뽑으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방법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무인이든 반사적으로 이런 행동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검왕이 노리는 바다.

인사는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다.

이 말은 많은 선배고수들이 인정한 바이니,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고 해도 믿어야 한다.

검왕의 일신내공이 그토록 심오할 리는 없다.

인사라는 것, 전신 내공을 일점에 모아서 전개하는 흡인신공(吸引神功)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순간적인 힘으로는 자신을 능가한다.

물론 이 순간, 검왕의 다른 곳은 텅 비었다. 그러나 다른 곳을 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검이 끌려 들어가면, 오직 흡인력에만 대항해야 한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이 무엇일까?

어쨌든 인사라고 판단했으니 깨끗하게 저항을 포기한다. 그까짓 검 한 자루, 줘버린다.

뒤로 물러선 화천이 기묘한 눈길로 검왕을 쳐다봤다.

검왕은 언제 무복을 부풀렸나 싶게 평온하다. 안색도 평온하고, 몸가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디를 쳐다봐도 진기를 과도하게 사용했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

허나 인사는 분명히 일어났다.

화천의 검이 땅에 떨어져 있다. 검왕의 무복이 미친개에게 물린 것처럼 확 찢어져 있다.

스읏!

화천이 허리를 굽혀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들면서 말했다.

“혈영마공을 극성까지 수련한 건가?”

“많이 아는군.”

검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화천은 인사를 파악해 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눈치도 채지 못할 수법인데, 단번에 알아버렸다.

혈영마공을 꿰뚫어 보고 있다.

화천이 주워든 나뭇가지를 툭툭 분질러서 손질하며 말했다.

“변화를 일으켰다면 죽었을 것이야. 헌데 몸으로 일으키는 끈끈함이라……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수였어. 이걸로 예전보다 강해졌다는 것은 증명되는데. 뭐야? 보약이라고도 먹은 건가?”

화천이 깨끗하게 다듬어진 나뭇가지를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면서 물었다.

붕! 부우웅!

작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데 봉을 휘두를 때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에게는 검이나 나뭇가지나 똑같다. 나뭇가지가 없어도 무방하다. 적수공권을 사용해도 검을 든 것처럼 위험하다.

검왕도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화천의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검을 살펴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모험을 했다는 정도로 하지.”

“모험? 모험이라니. 무슨 소리야?”

“…….”

“모험이라면…… 예전에 죽지 않아도 되는 걸 죽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맞나?”

쉬잇! 쒜에엑!

검왕도 허공에 검을 휘둘러 봤다.

순간, 검왕의 모습이 태산으로 변했다.

검을 들기 전에는 한낱 무인에 불과했다. 화천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허나 지금은 기도가 완전히 변했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사람이 되었다.

‘너…… 뭐냐!’

화천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서 검왕을 쳐다봤다.

저자의 별호는 검왕이다.

검에 관한 한 가히 왕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일진대…… 지금까지 검왕은 검을 크게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하기는 했지만 화천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그가 이제 검왕이 진신 무공으로 화천을 대한다.

검을 든다.

조용히 기운을 뿜어낸다.

츠으으읏!

검왕의 검에서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그의 검은 저렇듯 불길하지 않았다. 깨끗하고 청명했다. 날카롭고, 신선했다.

검왕의 검은 음침하다.

검에서 진득한, 끈적끈적한 진액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나뭇가지든 무엇이든 맞대면 안 될 것 같은……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검왕이 검에 인사를 담았다.

원래 인사는 무복으로만 펼칠 수 있다. 아니면 겉에 입고 있는 장삼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사다.

검왕은 인사를 검에 담았다.

인사를, 흡인신공과 같은 종류인 인사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기에 하나, 속도까지 따라붙는다면…… 불길해진다.’

화천은 비로소 검왕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깨달았다.

검왕이 검을 전개하는 속도는 어떨까? 숲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자신을 능가할까? 만약 능가한다면…… 자신을 능가한다면…… 자신은 참새가 되는 것이고, 검왕은 매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검왕에게 그만한 속도가 있을까?

검왕을 한 번 죽여본 화천은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검왕의 현재 모습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일부로 죽는 인간은 없어. 그때 내 수법…… 확실하게 절명시킬 수 있는 거였어.’

화천은 침중한 모습으로 나뭇가지를 들어 올렸다.

그는 더 이상 검왕을 경시하지 않았다. 절대 얕보지 않는 마음으로, 혈루마옥 최강의 무학을 펼칠 생각이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최강의 것을.

츠르르르르륵!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에 하얀 서리가 맺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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