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파괴록-91화 (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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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章 혈벽(血壁) (1)

‘응?’

화천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왜 헛 게 보여?’

그는 눈을 끔뻑였다.

헌데 맞다. 정말 맞다. 눈 앞에, 자신이 걷고 있는 길 위에 검왕이 앉아있다.

이런 뜻밖의 선물이!

검왕인가? 정말 검왕이 자신을 마중 나온 것인가?

“하! 하하하하하!”

화천은 처음에는 실소를, 그리고 곧이어서 대소를 터트렸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면 감지덕지할 일이지 죽으려고 환장했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뭘 믿고 나타난 거지? 어쩌다가 마주친 것 같지는 않고.

한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자신에게 한 번 죽은 자!

그러잖아도 그 죽음에서 어떻게 살아났는지 궁금하던 터이다. 있는 곳을 알면 당장 찾아가서 정확하게 또 한 번 죽여볼 심산이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헌데 그자가 제 발로 찾아왔다.

씨익!

화천의 입가에 잔소(殘笑)가 걸렸다.

물론 내막이 있다는 것을 안다. 검왕은 미친놈이 아니다. 한 번 겨뤄봤기 때문에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한다. 검왕으로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상대하지 못할 거목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놈은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백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놈은 찾아왔다.

놈에게 어떤 한 수가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자신이 손을 쓰지 못하게 만들 무엇을 가지고 있거나.

전자는 아닐 것이고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틀림없이 후자다. 놈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손을 쓰지 못하게 될 게다. 그러니 놈을 죽이려면 입을 열기 전에 죽여야 한다.

“후후후!”

화천이 거침없이 검왕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검왕을 꺼리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껄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런 감정은 검왕이 느껴야 한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한다. 자신을 피해야 한다.

파팟!

주위에서 미지의 기운이 감지된다.

‘이건…… 훗!’

화천은 긴장을 하려다 말고 피식 웃어버렸다.

적들이 숨어있다.

숨으려면 잘 숨을 것이지, 기척을 환히 드러내놓고 숨어 있다. 저런 식으로 숨으려면 차라리 숨지 않는 게 더 나을 게다. 한심해 보이지 않는가.

검왕이 저들을 믿고 자신 앞에 섰을 리는 없다.

아니, 검왕은 저들을 믿지 않는다. 저들은 숨어있는 게 아니다. 떼어져 있는 것이다. 검왕이 저들을 전정에서 떼어놓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 봤자 모두 죽는다.’

화천은 숨어 있는 자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검왕을 죽인다. 그리고 지켜보던 자들도 깔끔하게 모두 죽인다.

중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이런 복이 굴러떨어지다니. 역시 중원에 들어서기를 잘한 것 같다.

화천은 숨어있는 자들은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검왕만 쳐다보면서 걸어갔다.

검왕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쳐다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파팟!

화천은 안광에 살기를 실어서 쏘아냈다. 헌데…… 검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가 쏘아낸 살기를 허공을 흘러갔다.

‘뭐야!’

화천은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듯 분기가 치솟았다.

그는 검왕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느낌일 뿐일까? 아니다. 정말로 그런 느낌이 든다. 검왕은 천년 바위처럼 당당하게 앉아있다. 그를 보고도 전혀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놈이 뭘 믿고!’

“후후!”

화천은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웃었다.

“살아있다는 말은 들었다. 정말 살아있었군.”

“…….”

“난 분명히 죽였는데, 어떻게 살아났지?”

“…….”

“후후! 입이 무겁군. 이걸 기적이라고 해야 되나, 내가 꼼수에 놀아난 것이라고 해야 되나?”

검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동으로는 말을 했다. 손을 들어서 맞은편에 놓인 돌을 가리켰다.

맞은편에는 작은 돌이 의자처럼 놓여 있다.

그가 올 줄 알고 다른 곳에서 편편한 돌을 가져다 놓았다.

“풋!”

화천은 실소를 흘리며 그가 가리킨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말해봐, 어떻게 살아났어?”

화천이 기분 좋게 웃으며 물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께름칙한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또 속 시원하게 일이 풀린다.

이놈을 여기서 또 한 번 죽여보자.

놈이 또 살아나는지 완전히 죽는지 보자.

그는 검왕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검왕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도 화천의 눈을 쳐다봤는데…… 두 눈이 죽은 듯이 무심하다.

죽은 눈, 사목(死目)!

‘웃!’

화천의 양 볼이 미미하게 실룩거려졌다.

검왕의 눈은 사목이다. 인간의 감정이 한 올도 담겨 있지 않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어두컴컴한 어둠만, 음침함만이 담긴 축축한 눈이다.

화천은 등줄기에서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검왕은 마공관의 무공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나 그중에서도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무공이 마공 중에 마공이라는 혈영마공이다.

혈영마공에는 핏빛 그림자가 흐른다.

권각을 사용하든, 검을 사용하든, 신법을 쓰든…… 어떤 공부를 펼치든 간에 혈영마공을 근본으로 하면 불가불 빨간색이 툭툭 튀어나온다.

허나 그 깊이가 더욱 심화되면 빨간빛마저도 소멸된다.

무저갱을 들여다보라. 그 속에서 어떤 색을 읽을 수 있는가?

무저갱에 빨간 천을 떨어트려보라. 어느 순간까지는 빨간색이 보이다가 한계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검은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혈영마공이 극성으로 치달리면 빨간색 대신에 죽음의 축축함만이 묻어나온다.

검왕이 그런 상태다.

검왕은 혈영마공을 극성으로 수련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십 년, 백 년이 걸린다는 절정의 단계를 일 년 남짓한 세월 만에 얻어냈다.

화천은 그런 사실을 눈빛만 보고도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화천은, 그는 검왕의 눈에서 그의 경지를 정확하게 읽어낸다.

“장족의 발전이 있었군.”

“수고했다.”

검왕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뭐라고? 무슨 소리냐?”

“수고했다. 수고가 많았어.”

“너 제대로 미쳤구나? 뭐가 수고했다는 거야? 그리고 기분 나쁘게 그 말투는 뭐야?”

“그럼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

“아이 아빠 된 거, 축하한다.”

“…….”

화천은 눈을 부릅떴다.

혈오가 탄생한 것은 혈루마옥 사람들만 아는 극비 중에 극비사항이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혈루마옥은 중원과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검왕,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나!

검왕이 담담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걸음을 멈춰줘야겠다.”

“뭐라고? 하하하! 내가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날 희롱하는가?”

스릉!

화천이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심장을 갈라준다. 단지 찌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열 십 자로 쪼개주마. 아니, 머리도 몸과 분리시켜주마. 그래도 살아나나 보자.

검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워지는 화천을 쳐다보면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쯤 곳곳에서 죽음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뭐라고!”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개방 혈사는 막지 못했지만, 다른 곳은 잘 막고 있을 터. 네 죽음으로 혈루마옥 제일단은 봉쇄된다.”

‘뭐라고?’

화천은 눈을 부릅떴다.

경악성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목구멍으로 치솟는 놀람을 꿀꺽 삼켜버렸다.

검왕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거짓을 말할 위인이 못 된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여강 나루터에 도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혈루마옥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다.

화천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추며 말했다.

“누가 감히 그들을 죽일 수 있나?”

그렇다. 중원에는 그들을 죽일 만한 무인이 없다.

검왕이 말했다.

“유지자문.”

“뭐, 뭣! 유, 유지자문!”

화천은 정말 놀랐다.

오늘 미치도록 여러 번 놀란다. 놀라고 놀라고 또 놀라고…… 놀라운 일, 놀라운 말의 연속이다.

자신들이 뛰쳐나올 경우, 적벽검문이 유지자문과 연계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그 정도는 촌장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다.

유지자문은 반드시 나온다.

헌데 벌써? 그렇다면 너무 빠르다.

지금은 유지자문은 나올 형국이 이니다. 그들은 중원이 거의 무너진 후에 나와도 늦지 않다.

유지자문은 중원의 친구가 아니다. 혈무마옥처럼 중원의 숨결을 그리워하는 악마일 뿐이다. 중원을 살피는 존재가 아니라 갈가리 찢어발길 존재들이다.

세상에는 어부지리라는 것이 있다.

지금 어부지리라는 말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 유지자문이다.

그들은 나설 필요가 없다. 중원이 도륙되는 장면을 앉아서 불구경하듯이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중원이 정리되었다 싶으면 그때 나와도 늦지 않다.

이것이 혈루마옥의 판단이다.

헌데 벌써 그들이 튀어나왔다. 어찌 된 일인가!

유지자문은 혈루마옥을 안다. 혈루마옥 사람들을 알고, 무공을 안다. 혈루마옥을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는데, 연구를 하지 않을 리 없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위험하다!

혈루마옥 무인들이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화천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친절하군. 그런 말까지 해주고. 네 말대로라면 내가 이러고 있을 틈이 없는 것 같은데. 쉽게 끝내볼까?”

“죽이지 않는다.”

“……?”

“우린 싸워야겠지. 하지만 널 죽이지는 않겠다. 살려주겠어.”

검왕은 마치 정해진 사실을 말하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 뭐라고 대꾸를 해주는데…… 검왕, 도대체 왜 이래? 뭐가 널 이렇게 미치게 만든 거야?”

검왕은 화천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널 죽이지 않는 이유는 너도 알잖아. 넌 혈오의 아비다. 네가 죽으면 혈오가 미쳐서 날뛰지. 그 영향은 고스란히 누미에게 돌아갈 것이고.”

‘이놈!’

화천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검왕은 혈루마옥에서 벌어지는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혈루마옥의 현재 상태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정들까지 모두 안다.

검왕의 말이 맞다.

그와 누미, 혈오는 한날한시에 죽을 운명이다.

그는 촌장이 중원 땅을 밟으라고 할 때, 서슴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기꺼이 선봉의 명을 받들었다.

혈루마옥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혈오가 있는 한…… 혈루마옥은 자신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자신에게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마옥 사람들이 달려 나와 보호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죽으면 혈오가 미쳐서 날뛴다. 혈루마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꺾어버린다. 허나 검왕이 지금 말한 것들…… 이것은 혈루마옥 사람들 중에서도 단지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 중의 비밀이다.

혈루마옥에 간자가 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틀림없이 있다. 그것도 혈루마옥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세부적인 것까지 속속들이 말해주는 아주 휼륭한 간자가 있다.

“나도 널 죽이지 않으마. 네게 알아볼 게 많아. 네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일검에 죽이려고 했다만…… 후후! 너…… 너, 확실히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어. 죽이지 않으마. 하지만 이 검초가 끝난 후, 넌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할 거야.”

화천이 검을 들어서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차가운 한풍이 물씬 풍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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