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第十八章 태동(胎動) (4)
태양이 중천에 뜨도록 늘어지게 잠을 잔다.
그들에게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늦게 일어나도 먹을 것은 충분하다. 쪽박 하나만 들고 몇 걸음만 걸으면 하루 먹을거리를 거둬들인다.
그들은 시장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요처 중의 요처다.
비록 다리 밑이기는 하지만, 시장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동전 한 닢씩만 던져주어도 등 따시게 지낼 수 있다.
방금 잠에서 깬 거지가 거적을 들추고 나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 피곤해. 이놈의 잠은 자도 자도 쏟아지니.”
거지는 손을 옷 속에 넣고 가슴이며, 옆구리를 북북 긁었다.
그가 만약 점심을 준비해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면 벌써 일어날 리 만무하다. 다른 자들처럼 아직도 깊은 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게다.
“아아함!”
그는 다시 한 번 길게 기지개를 켰다.
어찌 되었든 점심은 준비해야 하고…… 점심이라고 해봐야 어제 먹던 밥을 물에 말아서 팔팔 끓이면 되는 것이지만.
그는 어기적어기적 찬밥 덩이 모아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헌데,
‘웃!’
그는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진한 살기를 감지했다.
산길을 걷다가 뱀을 만났을 때처럼 갑자기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는 바짝 긴장하면서 주위를 쓸어봤다.
그는 겨우 백의개(白衣丐)에 불과하다. 이제 갓 무공을 접한 풋내기다. 그렇기에 더더욱 공포나 두려움 같은 좋지 않은 느낌에 민감한지도 모르겠다.
그의 눈길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개울이 있는 곳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낯선 자를 발견했다.
“누구냐!”
그는 제법 언성을 높여서 고함쳤다.
사내가 뒤돌아서며 그를 쳐다봤다.
그 순간, 백의개는 긴장이 확 풀렸다.
낯선 사내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활짝 웃는 얼굴, 악의없어 보이는 순진한 얼굴…… 속여 먹기 딱 좋은 골방 샌님 같은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
거지는 방금 전에 느꼈던 살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눈을 부라릴 여유도 생겼다.
“뉘신데 남의 세면대에 턱 걸터앉아 있는 게요?”
그가 사납게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낯선 사내가 앉아있는 큰 돌은 분타주가 세면을 하는 곳이다. 이곳 다리 밑에서 제일 성스러운 장소라고나 할까? 그런 곳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한다.
낯선 사내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모두 깨워주겠나?”
“지금 뭐라는 거야?”
“자는 놈들을 죽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야. 중원에 제법 알려진 개방 무공도 보고 싶고. 자는 놈을 죽이는 것보다 팔팔 날뛰는 놈을 죽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뭐, 뭐라고! 이, 이 자식…… 지금 뭐라고…….”
거지는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는 거의 이백여 명에 이르는 거지들이 있다. 한 마디로 거지촌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개방 분타다. 개방 분타에 시비를 건다는 것은 개방을 상대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성한 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곳에 와서 이런 망발을 할 놈이 어디 있는가.
낯선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얌전히 깨울 의사는 없는 듯하군. 허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스릉!
낯선 사내가 검을 뽑았다.
거지는 그제야 낯선 사내가 허언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자, 개방 분타에 도전하려고 온 자다.
감히 건방지게 단신으로 이백여 명에 이르는 걸개들을 상대하려고 왔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또 있나.
“하하하! 참 별 미친놈을…… 으아아악!”
거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천지가 떠나가라 거센 비명을 내질렀다.
낯선 사내가 어느새 코앞에 다가서 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이 배를 쭉 가르고 지나갔다. 갈려진 배에서 내장이 주르륵 쏟아져 나온다.
거지는 흩어져 내리는 내장을 두 손으로 붙잡고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으아아아아악!”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사방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울렸다.
또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다.
쉬익! 쉬익! 쉬이이익!
어느새 십여 명에 달하는 걸개들이 타구봉을 들고 뛰쳐나와 사내를 에워쌌다.
그들은 단지 비명만 듣고도 사달을 눈치챘다.
일이 벌어졌어!
경험에 따른 직감이다. 그리고 이런 싸움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오직 자신만만하면 단신으로 개방 분타에 뛰어들어 사람을 해치겠는가.
뛰쳐나온 자들, 그들 중에는 남중(南仲) 분타주(分舵主) 일죽광개(一竹光丐)도 있었다.
그는 겨우 삼결(三結)에 불과하지만 나이는 쉰을 바라본다.
무공에 소질이 없어서 평생 분타주만 하다가 죽을 요량이지만, 세상사는 모습을 환히 꿰뚫어보는 능구렁이기도 하다.
그는 배를 갈린 백의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연약해 보이는 낯선 사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놈, 어디서 온 누구냐!’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낯선 사내를 알아내고자 했지만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결국 분타주는 자신의 성명병기인 적죽(赤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 누구냐?”
“핏!”
낯선 사내가 비웃듯이 웃었다.
“웃어?”
“혈루마옥이라고 들어봤나?”
사내가 웃었다. 싸움 같은 것은 모르는 사람처럼 순진한 얼굴로 활짝, 밝게 웃었다.
“혈루마옥?”
“혈루마옥이 뭐야?”
대부분의 개방 걸개들은 혈루마옥을 알지 못했다. 혈루마옥은 몇몇 사람만이 아는 전설이다. 거의 대부분의 중원인들은 혈루마옥이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불행히도 남중분타주는 혈루마옥을 안다.
“다, 당신! 그, 그럼!”
“영광으로 생각하라. 혈루마옥의 첫 검이다.”
“이 빌어먹을 놈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쒜엑!
사내를 둘러싼 걸개 중에 한 명이 맹렬하게 타구봉을 휘두르며 짓쳐들어갔다.
“안 돼!”
그와 동시에 분타주가 고함을 내질렀다.
허나 그때는 너무 늦었다. 경고가 너무 늦어서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페엑! 팟!
언제 흘렀는지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공격해 들어가던 개방 걸개는 머리가 사라졌다. 머리 잃은 몸뚱이로 뒤뚱뒤뚱 걸어간다. 그러다가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꿍!
뒤늦게야 허공에 뜬 머리가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읍!”
걸개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내가 보여준 손속은 너무 엄청나서 뭐라고 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이 흐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초식이 터졌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상했는지 보지 못했다.
무척 빠른 쾌검이다.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너무 엄청나서 싸울 기분도 나지 않는 사람과 마주 선 것이다.
남중 분타주가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타구진을 펼쳐라!”
괭괭괭! 징징징! 둥둥둥!
“어이, 어이, 어어이!”
“킥킥! 킥킥킥킥킥!”
갑자기 다리 밑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이백여 명의 걸들이 일제히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웃는 자도 있고, 우는 자도 있다. 꽹과리를 두들겨 대는 자, 북을 치는 자…… 너무 어수선해서 정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진형이 만들어졌다.
타구진은 모두 오진(五陣)으로 형성된다. 일진부터 오진까지…… 겹겹이 포위망을 형성한다.
아니, 이것은 겉으로 봤을 때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또다른 속진(屬陳)이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펼쳐진 사진(四陳)이 별개로 운용된다.
오진과 사진이 서로 상생상응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공방을 전개한다.
상대는 한 명이다.
이백 명이 한 명을 상대로 해서 펼치는 타구진이니 그 촘촘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어깨가 부딪쳐서 여러 명이 공격해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타구진에는 예상되어 있다.
“발진(發陳)!”
분타주가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자 일진을 형성하고 있던 서른 명이 일제히 몸을 솟구쳤다.
쒜에엑! 쉐에에에액!
서른 개의 티구봉(打狗棒)에서 거센 경풍이 일어난다. 허나 그들이 일으킨 경풍은 온갖 소음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다.
낯선 사내가 보기에는 앞에서 달려드는 몇 명만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키키킥! 키키키킥!”
“어어이! 어어어어어!”
사방에서 곡소리와 웃음소리, 각종 악기를 두들겨 내는 소리가 높아진다.
그 소리들은 타구봉이 흐르는 소리를 묻어준다.
상대는 어디서 공격해 오는지, 어떤 봉을 우선적으로 막아야 하는지 한순간 헷갈리게 된다. 특히 뒤에서 공격해 오는 자들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만 노리는 것이 아니다.
이백 명이 내지르는 곡소(哭笑)에는 일신의 진기가 내포되어 있다.
진기로 일으킨 소리가 상대방을 건드린다.
상대방의 진기를 흐트러트리고, 심기를 짓누르고, 혈기를 들끓게 만든다.
소리가 만들어낸 공격이다.
개방 본단 최정예 걸개들이 펼치는 타구진에 걸려들면 일시 내공을 상실하는 효과까지 일어난다고 한다.
파파파팟!
걸개들이 가을철 메뚜기처럼 날아올랐다.
그들 서른 명은 한결같이 목숨을 돌보지 않는다. 몸뚱이로 몸뚱이를 부딪치겠다, 몸으로 몸을 때리겠다는 생각으로 덤벼든다.
상대방은 쾌검의 달인이다.
그가 팔방풍우(八方風雨) 같은 초식으로 검을 쓸어내면 최전면에 선 열다섯 명은 한순간에 도륙된다.
그것을 각오한다.
그래, 내 몸뚱이를 갈라라. 내 피로 네 눈을 가려주마. 네가 더 이상 보지 못하도록 해주마. 적어도 같이 공격하는 다른 걸개들은 보지 못하게 해주마.
그 사이, 뒤따르던 열다섯 명이 타구봉을 쳐낸다.
물론 그들도 목숨을 던질 각오로 공격해 들어간다.
낯선 사내의 쾌검은 가히 경이적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빠름을 지녔다. 그렇기에 어떤 수단이 터질지 모른다.
전면을 휩쓸고, 또 한 차례 검초를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뒤이어 공격하는 사람들도 당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좋다. 그것까지도 각오한다. 검을 쳐오면 맞아준다. 피하지 않고 맞는다. 타구봉으로, 몸으로 검을 묶어둘 것이다. 나는 죽지만 다른 자가 널 때릴 게다. 허면 넌 끝이다.
그들은 비장의 각오로 공격해 들어갔다.
타구진에도 여러 가지 공격법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내가 휘두르는 검초를 보았기 때문에, 절대 쾌검을 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력을 다해서 공격했다.
“훗!”
낯선 사내는 웃기부터 했다.
“이것이 개방이 자랑하는 타구진인가? 어리숙하군. 고작 이것이 개방의 진초(眞招)라면 고생깨나 할 거야. 이런 것으로 어떻게 혈루마옥을 막겠단 말인가. 그동안 놀고먹었군. 후후후!”
사내가 입가를 살짝 비틀었다.
웃는가? 웃는 모습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팟! 파파파팟!
사내가 검초를 펼쳐냈다.
한순간, 눈앞에서 화려한 꽃송이가 펼쳐졌다. 사내가 일으킨 검초가 꽃송이 모양으로 타구진을 가격해 들어간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검초를 펼쳐내지?
쒜에에에엑! 파파파파파파팟!
꽃송이 모양의 검초 앞에…… 개방 걸개들의 육신이 넝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나갔다.
‘아!’
그는 탄식을 내질렀다.
개방 남중분타를 휩쓴 혈겁은 단지 하나, 적혈검법(赤血劍法)이다.
사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적혈검법만 사용했다. 처음 백의개의 배를 가른 검초도 적혈검법이요, 남중분타주를 일직선으로 갈라낸 검초도 적혈검법이다.
그는 다른 검초를 쓰지 않았다.
적혈검법…… 혈루마옥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적인 검초.
“아아! 아…….”
비형은잠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낯선 사내의 적혈검법은 그조차도 감당하기 버거운…… 아주 뛰어난 검초였다.
피 냄새가 맡아진다.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곳곳에서 죽어 나가는 중원 무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환히 보인다.
할 말이 없다. 입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