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第十八章 태동(胎動) (2)
스읏! 슷!
음사는 가느다란 끈으로 소매와 발목을 묶었다.
월담을 하려고 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적벽검문의 담장을 넘어서려고 한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봉문이란 세상과 단절하겠다는 뜻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만든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자신들 의지로 할 수 있다.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된다. 문을 틀어막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침입할 수 있다. 문을 틀어막으면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고, 음사처럼 담장을 넘을 수도 있다. 봉문한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들이치는 자들이 생길 수 있다.
이럴 경우, 오로지 무력에 의존해서 뜻을 지켜야 한다.
적벽검문은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는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단언하건대 적벽검문에 힘이 없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힘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적벽검문에 침입하면 척살당한다.
- 봉문을 선포한 곳은 침입하지 않는다. 봉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다리다. 오직 생명을 달리하는 사람만이 넘을 수 있는 문이다. 이것이 봉문자의 의지이니, 본인들 스스로 봉문을 해제하기 전에는 결코 침입하지 마라.
이것은 중원 무림의 불문율이다.
봉문한 곳을 침입하면 척살당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봉문한 문파는 봉문선포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구는 받아들이고, 누구는 내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봉문은 완전한 단절이다.
음사도 월담을 생각했었다. 누강이 나무 대문만 쳐다보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말이나 전해볼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하지만 끝내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침입하면 죽는다. 확실하다.
그러나 검왕이 들어가라고 하는 데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설혹 목숨이 위태롭다고 해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설마 검왕이 들어가라고 했는데…… 위험하기야 하겠나.
‘그래도 떨리기는 하네.’
음사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은밀히 적벽검문을 살폈다.
쉬잇!
드디어 담장을 넘었다.
‘적벽검문, 말은 많이 들었는데……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은근히 호승심도 치밀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시간, 어둠 한가운데에서 가장 음침한 곳에 위치한 담장을 넘었다.
발자국 소리도 흘리지 않았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조차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는 완전히 침묵한 채 담을 넘었다.
그는 그가 펼칠 수 있는 신법 중에서 가장 은밀한 신법을 펼쳤다. 지옥 문턱을 넘는 심정으로, 결코 발각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담을 넘었다.
그는 월담을 하면서 적벽검문의 실체를 구경할 심산이었다. 헌데.
스읏!
담을 넘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엇인가가 다가온다는 느낌이 든다. 팽팽한 끈이 전신을 결박하는 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함정에 빠졌나?’
그는 재빨리 주위를 훑어봤다.
아무도 없다. 몇 번이고 살펴봤을 때처럼 짙은 고요만이 존재한다. 사람이 있다거나, 함정, 매복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무인의 감각으로 감지했을 때, 위험은 없다.
허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이 느낌은?
‘진법일 수도 있고, 기관일 수도 있고……’
그는 한 생각을 떠올렸다가 금방 고개를 내둘렀다.
‘아냐. 적벽검문은 검의 조종(祖宗)이야. 진법이나 기관을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더욱더 조심했다. 만약 그를 향해서 좁혀오는 것이 있다면 사람인지 진법인지, 기관인지부터 살펴내야만 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역시 기우인가?
괜히 적벽검문이라는 이름에 위압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가상을 적을 상상해 낸 것인지도.
‘휴우!’
그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스읏!
발걸음이 기름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미종환보(迷從幻步)다.
실제로 미종환보는 기름을 밟으면서 수련한다. 기름의 느낌을 두 발에 받아들여서 땅을 밟되,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으로 걷는다. 걷지 않고 미끄러진다. 그런데,
척!
그는 미종환보로 딱 한 걸음만 내디뎠을 뿐이다. 그 한 걸음 후, 그는 전신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어깨에 칼이 드리워졌다.
‘언제!’
언제인지 모른다.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그의 이목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칼이 나타났고, 어깨를 짓누른다. 목숨을 위협한다.
단언컨대 아무 느낌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칼이 요악한 악마의 웃음처럼 살기를 머금고 번뜩인다.
“거, 검왕…… 검왕이 소식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음사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급히 말했다.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칼이 움직일 것 같다.
칼은 대답이 없다.
조용히, 어둠 한가운데서 움직일 기회를 엿본다.
짜르르르……!
음사는 전신에서 강한 전율을 느꼈다.
단지 칼이 어깨에 올려져 있을 뿐인데…… 칼은 지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 또는 한 번의 여유를 줄 수도 있다. 그를 살려줄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이 칼 한 자루에 담겼다.
물론 모든 병기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것이 병기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토록 진하게 온몸으로 병기의 맛을 느껴본 적은 없다. 병기를 접하자마자 삶과 죽음이 떠오른 적은 없다. 몸이 딱딱한 돌처럼 굳어져 보기는 처음이다.
그는 칼만 의식했다.
칼을 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칼의 주인은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오직 어깨에 얹어진 칼 한 자루만 느껴진다. 칼이 허공에 둥실 떠다니면서 목숨을 위협하는 것 같다.
음사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죽음의 공포를 맛봤다.
‘엄청난 고수!’
칼을 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검왕조차도 상대가 될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고수다.
“검왕이, 검왕이 들어가서 전갈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아! 소인, 음사라고 합니다. 누강 마공관주님을 모시고 있었던 자로 결코 악의를 가지고 월담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잠깐 사이로 옷이 흥건해질 만큼 땀이 흘렀다. 그때,
사박! 사박!
앞쪽에서 풀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키 작은 소동이 보였다.
소동은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잠시 후, 소동은 그의 앞에 이르렀고,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
“목이나 축이세요.”
‘이게 뭐냐?’
음사는 소동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면 어깨에 얹혀진 칼이 좋지 않은 행동을 할 것 같았다.
음사는 소동이 내민 그릇을 받아들었다.
물그릇이다. 말간 물이 찰랑찰랑 담겨 있다.
그는 두 손으로 물그릇을 받쳐 들고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소동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적벽검문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지만, 대접할 게 이것밖에 없어요. 그 점, 양해해 주세요.”
“…….”
음사는 눈만 끔뻑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에 놓인 칼은 무엇이며, 소동의 정중한 말투는 무엇인가.
소동이 음사에게서 빈 그릇을 받아들고, 대신 누런 색의 밀지를 내밀었다.
“숙부님께 전해주세요.”
“수, 숙부시라면……?”
“검왕님께 전해주세요.”
“아!”
음사는 비로소 알았다는 듯 탄사를 흘렸다.
소동이 검왕의 조카 되는구나. 이들의 관계는 혈연으로 통칭되니, 사질(師姪) 정도 되는 모양이다.
소동이 맑은 웃음을 생긋 지으며 말했다.
“누강 형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누청(縷淸)이라고 하시면 아실 거예요.”
“누……강…… 형님?”
음사는 연신 눈만 끔벅였다.
도대체 누강과 이 꼬마 소동과의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 형님 운운하는지.
칼의 주인은 아직도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왼쪽에 서 있는지, 오른쪽에 서 있는지, 등 뒤에 서 있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음사는 귀신에 홀린 듯 뒤돌아서 가는 소동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음사는 담장을 넘자마자 딱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 다시 되돌아 나왔다.
“빨리 나왔네?”
누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 누굽니까?”
음사는 아직도 어깨를 짓눌렀던 칼을 잊지 못한다. 칼이 거둬진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그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위협, 죽음의 공포…….
“병기가 무엇이더냐?”
누강은 음사가 겪은 상황을 대충 짐작한다는 듯 웃으면서 물었다.
“칼이었습니다.”
“칼…….”
누강이 음사의 말을 받아서 중얼거렸다.
‘아!’
음사는 그제야 퍼뜩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적벽검문은 검의 조종이다. 검으로 일가를 이룬 문파다. 허니 문도들도 모두 검을 사용한다. 여타의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검만 사용한다.
헌데 칼이 그를 위협했다.
그리고 누강은 마치 그런 상황을 예측한 듯이 병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칼을 사용한 사람, 그는 적벽검문 문도가 아니다!
누강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적벽검문에서 이종병기를 쓰는 사람은 딱 네 명 있다. 그들을 사수병(四守兵)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도수병(刀守兵)을 만난 모양이구나.”
“도수병요?”
“후후!”
“적벽검문에서 검 외에 다른 병기를 쓰는 사람이 있다고요?”
“도수병은 도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지. 적벽검문에 도전장을 던진 사람이기도 하고. 싸움하러 왔다가 아예 눌러앉은 경우인데, 그런 사람에게까지 검을 권유할 수는 없지.”
“아!”
“후후! 도수병을 만났다면 오줌깨나 지렸겠는데? 사수병 가운데서도 가장 차가운 사람을 만났으니. 하하! 칼이 섬뜩하다는 느낌, 온몸으로 느껴지지 않던가?”
“…….”
음사는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벽검문이 강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적벽검문을 방문한 사람이 이 정도이면, 적벽검문의 진신 무공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내일은 떠나야겠어.”
누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사문인 적벽검문을 눈앞에 두고도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검문은 그를 들이지 않고, 그도 부득불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 쳐다보기만 한다.
검왕도 마찬가지다.
검왕 정도 무명을 쌓은 사람이라면 봉문을 무시하고 들어갈 수도 있으련만,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은 푹 자두게.”
누강이 모닥불 옆으로 몸을 뉘여 말했다.
검왕은 그가 왔는데도 밀지를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답을 얻어오라고 시켰으면서.
음사도 눈치는 빠르다.
‘누군가 있다!’
음사는 이번에도 그 누군가를 파악해내지 못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봐도 자신들 이외에는 없다.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파악하는데도 인기척을 잡을 수 없다.
스읏!
음사 곁으로 손이 내밀어졌다.
검왕이다. 그가 누워있는 모습 그대로 손을 내밀고 있다.
음사는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면서 밀지를 꺼냈다. 그리고 검왕의 손에 슬그머니 올려주었다.
검왕이 몸을 뒤척인 듯이 돌아눕는다.
어느새 밀지는 품 안으로 갈무리 된 후였다.
‘도대체 누가 지켜보기에.’
음사는 검왕이 이토록 조심스러워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하늘처럼 보이는 적벽검문이 봉문을 하고, 검성 성주와 비교되는 검왕이 이 정도로 몸을 사리고…… 상대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