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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85화 (8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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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七章 탄생(誕生) (5)

혈각오의 진액이 말끔히 사라졌다.

금구 안에는 붉은 색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향수를 엎질러 버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말끔하게 닦아낸 것처럼 깨끗하다.

미노송의 수액도 사라졌다.

매미 날개는 바람에 날려갔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혈오가 맞아!’

이제는 그 누구도 아이가 혈오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아니, 아이가 혈오라는 것은 나흘 전부터 알았다. 아이를 금구에 담아놓고 한 시진쯤 지나자 혈각오의 진액이 손톱 깊이만큼 사라졌다.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다. 그때부터 혈오는 촌장으로부터 직접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석화선생은 금구를 보면서 포권지례를 취했다.

“혈오를 봐야겠다.”

태도는 상전을 대하는 듯 공손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히 하대다.

이율배반적인 말과 행동이다.

허공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혈오와 일 보 거리를 유지하시오.”

“알았다.”

“혈오를 만지지 마시오.”

“알았다”

“지금부터 진기를 거두시오. 진기가 일어나는 느낌만 들어도 즉시 방어할 터.”

이들은 공손하게 방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실은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혈오를 보호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동족을 죽이겠다는 뜻이다.

이들의 엄포는 거짓이 아니다.

“알았다.”

석화선생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말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들은 촌장의 직계 무인들이다. 촌장이 은밀히 양성한 혈루마옥 최강의 무인들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몇몇 사람은 상대하지 못한다.

증평주나 녹천주, 그리고 정말 강한 몇몇 강호들!

허나 이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촌장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이들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촌장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다. 석화선생이 공손한 태도로 대하는 것도 촌장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존재는 비밀이 아니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촌장 곁에서 항시 호법을 서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인지하고 있다.

그들이 이곳에서 혈오를 지킨다.

석화선생은 혈오를 보기만 할 뿐 만질 수 없다. 석화선생뿐만이 아니다. 그 누구도 혈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젖을 먹이거나 대소변을 치우는 일도 이들이 직접 한다.

석화선생은 금구를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금구를 살폈다.

“흠! 혈오…… 맞군.”

석화선생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허공에서는 말이 없다. 그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를 돌발사태를 주시한다.

석화선생이 혈오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두 번째 조치를 취하겠네.”

“허락합니다.”

즉각적으로 대답이 떨어졌다.

석화선생은 그제야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갔다.

이제 혈오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아이가 자면서 흘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린다.

석화선생은 품속에서 작은 목갑을 꺼냈다.

“청미사(靑微蛇)네.”

그가 목갑을 허공에 들어보였다.

“허락합니다.”

허공에서 대답했다.

석화선생은 목갑을 혈오의 코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씩 뚜겅을 열었다.

아주 조금, 바늘 끝자락만큼만 살짝 열었다.

그러자 어느 한 순간, 목갑 안에서 어떤 푸른빛이 번뜩였다. 아니, 번뜩이는 듯이 보였다.

푸른빛은 금방 사라졌다.

석화선생은 혈오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아이는 여전히 평온하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석화선생이 말했다.

“됐네. 잘 끝났어.”

“안착했습니까?”

허공에서 조금은 들뜬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착했네. 단전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흩어질 리 없지. 혈오를 움직여도 좋네.”

석화선생이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 허공에서 차디찬 바람 한 줄기가 일어났다.

쉬익!

바람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리고 혈오가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허공에서 기쁨에 겨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촌장만을 지키는 사람들, 촌장에게 목숨을 맡긴 사람들도 혈루마옥은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석화선생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허허! 혈오가 탄생했군.”

그는 텅 빈 금구를 보면서 기분 좋은 듯, 또는 허망한 듯 실소를 흘렸다.

오랜 숙원이던 혈오가 탄생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 이곳을 벗어나는가? 혈루마옥의 저주가 정말로 풀린 것인가? 중원에 나가는 것인가? 이제?

* * *

서신을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얼굴을 가린 하얀 면사도 떨린다. 백설이 소복이 쌓인 듯 매끄럽고 하얀 이마에 골이 팬다.

그녀는 곤혹스러웠다.

“정말 탄생했네…….”

무심히 흘러나온 말이다.

“혈오가…… 탄생했습니까?”

마군이 믿기지 않는지 되물었다.

“탄생했다네요.”

그녀가 들고 있던 서신을 마군에게 건네주었다.

마군은 즉시 서신을 받아들고 단번에 읽어갔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정말! 정말 탄생했군요.”

마군이 활짝 웃었다.

“좋아요?”

그녀가 마군을 보면서 못마땅한 듯 말했다.

“이건 경하할 일 아닙니까. 이제 혈루마옥의 저주가 풀렸으니 곧 중원은…….”

“중원은요?”

마군은 되묻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중원 천하는 혈루마옥의 세상이 된다. 그 정도를 헤아리지 못할 사람은 아니고.

보통 사람들이 네다섯 수 앞을 본다면 그녀는 십여 수 앞을 본다. 항시 남보다 더 멀리 보고 생각한다.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데는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마군은 그 생각을 읽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혈오가 탄생한 것은 좋은 일인데.

“하아!”

그녀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지……?”

“검왕이 마음에 걸려요.”

“…….”

“적벽검문이 걸려요.”

“…….”

“교묘하지 않아요? 마공관에 작업을 건 것은 우리인데,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에요.”

마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하게 그렇다. 마공관에 작업을 걸었다. 누강과 누미를 인질로 해서 검왕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이 사건은 단박에 혈루마옥의 주목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누미를 봤다. 그들이 원하는 여인…… 요미검체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누미를 데려간 것은 당연하다.

화천이 검왕을 죽인 것도 당연하다. 검왕은 쓸데없이 강해졌다. 마공관의 마서를 훔쳐서 수련한 모양인데…… 정도인이 왜 마공을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혈루마옥 사람들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누미만 건네주면 된다.

그런데…… 정작 일을 추진한 그들은 뒤로 쑥 빠지고, 검왕과 혈루마옥이 단독으로 맞붙는 형국이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변했지?

“검왕이……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오히려 적벽검문이 혈루마옥을 끌어내는 형국이에요.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적벽검문이 뭘 믿고…….”

“유지자문이 중원에 나왔다는 소문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유지자문…… 그래도 안 된다.

혈오는 탄생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다. 혈오가 탄생하면 혈루마옥 마인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는가.

화천은 혈루마옥 최고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검왕이 그를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검성 성주조차도 지금의 검왕은 상대하지 못할 것인데.

검성과 혈천성이 손을 맞잡을 것은 뻔하다.

검성 성주도, 혈천성주도 중원이 혈루마옥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정과 마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으면서도 연수할 게다.

그래도 저들은 막지 못한다.

수십만 명에 이르는 중원 무인들이 겨우 수백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을 이기지 못한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진실이 그렇다.

유지자문은 최대의 변수가 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유지자문과 혈루마옥을 종종 혼동한다. 양쪽 모두 중원에 나온 적이 없고, 무공이 신비로우며, 강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중원은 혈루마옥도 모르고 유지자문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파악한 바로는…… 유지자문은 강하지만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다. 혈루마옥은 강하면서도 사람이 많다. 모든 사람들이 강자다.

누미…… 그녀를 죽였어야 했는가.

미련둥이 화천이 그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어야 하는가.

혈오의 탄생이 찜찜하다.

검왕과 적벽검문이 유지자문을 믿고 혈루마옥을 끌어낸 것이라면 아주 큰 오판을 한 게다.

마군이 서신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제 빠르면 칠 주야, 늦어도 한 달이면 중원에 피바람이 불 겁니다. 막을 수 없어요.”

그녀가 서신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혈루마옥을 감시해줘요.”

“감시는 하는데…….”

마군이 피식 웃었다.

혈루마옥을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를 내세워도 혈루마옥의 이목을 속이지 못한다. 그들이 지켜보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으니 보는 것이다. 허니 그들이 눈을 가리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 한순간에 멸절된다.

그녀가 말했다.

“중원에 나오는 것만 알면 돼요.”

정작 속사정을 말해줄 사람은 따로 있다. 방금 이 서신을 보내준 사람이 자세한 설명을 해줄 게다.

마군이 말했다.

“화천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나를요?”

“예.”

“날짜와 장소를 받았나요?”

“그거야 늘 일방적이지 않았습니까?”

마군이 웃었다.

“오늘이나 늦어나 내일 아침에는 출발해야 약속장소에 닿을 수 있습니다.”

“항상 제멋대로…… 좋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귀찮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천이야 원래 그런 성품인데…… 무슨 뜻이신지?”

“약속을 미뤄줘요.”

“…….”

마군은 일시 대답하지 못했다.

화천은 폭군이다. 현재, 당금 무림에서 화천의 일격을 받아낼 사람은 많지 않다. 십마를 어린아이처럼 조롱하던 검왕조차도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토록 강한 사람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화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 그의 수발을 들어주고 있는 마군의 수하다.

화천의 횡포가 눈에 보인다.

“화천은 줄 끊어진 연. 곧 제거될 거예요. 혈오를 탄생시킨 사람이잖아요? 화천이 모르는 게 있는데, 혈루마옥은 혈오는 한 사람만 따라요. 아비나 어미 중에.”

“그럼!”

“누미가 혈오를 낳았다는 것은…… 혈오가 누미에게 마음을 줬다는 것이겠죠. 그러면 당연히 화천은 제거돼야죠. 혈오의 순탄한 진행을 위해서.”

“그런 일이!”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화천에게 전해요. 지금은 사정이 있으니 약속 날짜를 뒤로 늦추자고. 보름 정도만 늦추자고 해요. 허면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습니다.”

마군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푸드드득!

전서구가 허공을 날았다.

유지자문이 나왔다. 적벽검문을 돕고 있다.

혈오가 탄생했다. 혈루마옥이 나온다.

이제…… 시작된다.

그녀는 훨훨 날아가는 전서구를 보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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