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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七章 탄생(誕生) (3)
산통이 시작되었다.
“아아악!”
누미의 비명 소리가 계곡 전체를 쩌렁쩌렁 울린다.
“아악! 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진다.
누미는 자신이 얼마나 크게 비명을 노해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대체로 산모의 비명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산통이 일어났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계속 내지르고 있다.
“아악! 악! 아악! 나 좀…… 나 좀 살려줘! 아악!”
체면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겉치레도 없다. 오직 살고자 하는 욕망만 남는다.
몸이 터져나간다.
배가 찢어진다.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던 배가 좁쌀만 한 조각들로 찢어져서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느낌이다.
“심공을 유지해라. 호흡을 유지해!”
석화선생이 다그쳤다.
그녀는 석화선생의 말도 듣지 못했다. 너무 아파서, 너무 산통이 심해서.
이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인가? 아이를 낳는 모든 여인이 이런 고통을 겪는가?
아니다. 이것은 비정상이다. 많은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만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산통이 극심하기는 해도 이토록 아프지는 않다.
이건…… 산통이 아니라 고문이다.
“심공을! 제발 심공을!”
석화선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가 봐도 누미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누미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흐려진다. 점점 아늑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혈오가 누미를 죽이고 있다.
“이봐! 이봐!”
석화선생이 거칠게 누미를 흔들었다.
그러고도 누미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손가락이 진기를 운집하여 혈을 눌렀다.
꾸욱!
다급하고 빠른 손놀림이 이어졌다.
그러자 누미가 상반신을 꿈틀거리더니 다시 눈을 떴다.
“정신 차리게! 정신 차려야 해!”
석화선생이 소리쳤다.
누미는 지금까지 잘해왔다.
혈오를 잉태한 여인은 산통을 겪기도 전에 죽는다. 거의 대부분 그런 전철을 밟아왔다.
누미는 그래도 산통이나마 겪는다.
그녀가 수련한 화혈역심공과 한음천강기의 조화가 좋은 효과를 불러왔다.
혈오가 음과 양의 완벽한 조화에 안정을 찾았다.
혈오를 부드럽게 달랜다.
혈오를 마음으로 감싸안는다.
태어나. 태어나기만 하면 잘해줄게.
헌데 마지막 순간, 산통이 일어난 직후부터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혈오가 세상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양수가 터지고, 자궁이 열리는 순간, 혈오는 바깥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즉시 지금까지 참아왔던 흉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누가 손 쓸 사이도 없이 어떤 일이 벌어졌다.
혈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몸을 뒤집는 것이다.
머리를 위로, 다리를 아래로…… 머리부터 나와야 하는데 다리부터 나가게 한다.
출생을 더 어렵게 한다.
두 번째로, 혈오는 누미가 정성 들여서 풀어놓았던 탯줄을 다시 목에 휘감았다.
촤라라라락!
탯줄 감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혈오는 태어날 생각이 없다.
“안 되겠어요!”
산파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혈오를 정상적으로 탄생시킬 방법이 없다. 누미가 그토록 공들여서 연마했던 심공도 무용지물이다.
혈오는 두 가지 무공을 넘어선다.
누미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화혈역심공과 한음천강기를 이용하여 부드럽게 혈오를 감싸려고 했다. 헌데 혈오가 두 기류를 단숨에 퉁겨냈다.
그때부터 누미의 고통을 극을 향해 치달렸다.
목이 터져나가는 줄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혈오는 누미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오히려 자신의 고집을 굳건하게 하는데 사용했다.
자진한다! 기필코!
“집도를 하시는 게…….”
산파가 다급한 표정으로 석화선생을 쳐다봤다.
석화선생이 혈을 눌러준 덕분에 누미가 잠시 정신을 되찾았지만, 곧 힘이 풀린다.
손발에 힘이 없다. 축 늘어져 있다.
눈동자는 점점 암흑 속으로 꺼져간다. 세상을 의미 없다는 듯 무감정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입은 바싹 마르고, 호흡은 점점 안으로 잦아든다.
아주 위급한 상태다.
“으음!”
석화선생은 신음했다.
혈루마옥은 아이들은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혈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난산을 유도한다. 그래서 압반신공을 창안해 냈고, 수련하지만…… 솔직히 압반신공이 무력해질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부술(剖術)이 발달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경우, 배를 가르고 직접 꺼낸다.
헌데 혈오에게는 이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산모의 몸에 칼을 대는 순간, 혈오는 즉사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른다. 무엇이 혈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혈오가 어떤 방법으로 자진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혈오가 배를 가를 때 필히 건드려야 하는 임맥(任脈) 중 어느 혈과 연결되어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어느 혈을 건드리면 혈오가 즉사한다.
그 혈은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임맥을 피해서 시도해 본 적도 있다.
하완혈(下脘穴)부터 회음혈(會陰穴)까지, 그 어떤 혈도 건드리지 않고 배를 갈라봤다.
그 경우에도 혈오는 사망했다.
다른 혈은 어떤가? 임맥과 연관된 혈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배꼽부터 회음까지 아랫배에 분포된 모든 혈을 피해서 배를 갈랐다.
이 경우, 여인은 무척 고통스럽다. 칼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면서 움직여야 한다. 그야말로 아랫배가 걸레 조각처럼 너덜거리게 된다. 그래도 혈오만 탄생시킬 수 있다면.
혈오는 탄생하지 않았다.
분명히 어떤 혈과 연관이 있기는 한데, 그 혈이 어떤 혈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누미에게 칼을 대는 순간, 혈오는 즉사한다. 하지만 누미는 살릴 수 있다.
누미는 요미검체!
누미는 화혈역심공과 한음천강기를 조화시킨 몸!
그녀의 무공 경지는 혈루마옥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처럼 능숙하다. 중평과 녹천을 오가면서 무공을 수련한 사람처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녀는 다시 임신할 수 있다.
혈오는 또 가지면 된다.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훨씬 더 안전하고 쉬운 방법으로 혈오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누미만은 살려야 한다.
그 최후의 방법이 부술이다. 혈오를 포기하고 누미만이라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봐, 정신 차려!”
쫘악!
석화선생이 누미의 뺨을 후려쳤다.
누미의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돌아왔다.
“자네가 이러면, 견디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혈오를 포기해야 하네! 알아들었는가!”
“사……살려……줘.”
누미의 무의식 속에서 본능적인 갈구가 흘러나왔다.
석화선생이 개의치 않고 다그쳤다.
“어쩔 수 없이 혈오를 포기해야 한단 말이네!”
“사……살려…….”
“자네를 살리려면 칼을 써서 배를 갈라야 하는데, 허면 혈오는 반드시 죽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듣게. 자넨 혈오를 다시 가져야 하네. 회임을 다시 해야 해. 어떻게든 혈오를 낳아야 해. 그전에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는가!”
누미가 흐릿한 눈동자로 석화선생을 쳐다봤다.
누미의 눈에는 생기가 담겨 있지 않다. 석화선생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다. 이미 혼이 육신을 떠나서 암흑 속으로 숨어버린 듯한 형상이다.
“한 번으로 끝내세. 이번에 낳아야 해. 그게 훨씬 낫지 않겠나. 자, 힘을 써봐!”
석화선생이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누미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왜 그래, 이러지 마.’
누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본심을 혈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혈오가 태어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허나 그런 마음은 어느새 태중의 아이, 혈오에게 전달되었다.
태아는 바로 그녀 자신이다.
마음에서 번뜩이는 모든 생각이 혈오에게 전달된다.
이러지 말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은 소용없다. 그녀는 자신의 본심을 숨겨왔지만, 어느새 본심은 혈오에게 전달되었다.
태아를 속일 수는 없다.
사람들은 태아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태아는 자기 자신을 느끼지도 못한다. 다만 어미의 일부로 자라고 있을 뿐이다.
태아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이다.
헌데 혈오는 무엇인가 다르다.
혈오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나’라는 것을 감지한 듯하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라거나 ‘죽자’라는 생각은 자신이 어미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다.
태아는 어미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데, 정말 그런 생각이 가능할까? 어미의 느낌이나 감정이 전달되는 것은 이해하지만 어미와 별개로, 따로 생각이라는 것을 일으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회임기간 중에 가졌던 생각들이 혈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혈오는 자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다.
- 이번으로 끝내세.
석화선생의 안타까운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이번으로 끝내야 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혈오는 낳지 못했을 때, 그녀는 강제 구금된다.
그녀는 화령역심공과 한음천강기를 수련했다. 이제는 제법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무공으로는 혈루마옥 무신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그녀가 수련한 무공은 혈루마옥 비장의 신공들이다.
그녀는 증평과 녹천, 양쪽 무공을 모두 지녔다. 즉, 양쪽 모두에게 경계 대상이다.
이들이 그녀를 놓아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짐작한다.
혈오는 낳아야 하고, 돌봐야 한다. 그때에만 저들과 동등한 입장이 된다. 저들의 일원으로 녹아들 수 있다. 그때에만 자신의 목숨과 자유가 보장된다.
저들이 혈오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모르겠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일어나지 않을까? 혈오를 낳은 후에 쓸모없어진 어미는 죽여버리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회임기간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안전책을 찾고자 했다. 순진하게 저들이 하는 말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저들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봤다.
증평과 녹천의 알력을 살폈고, 촌장의 의중을 살폈다.
그리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저들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고.
혈오를 낳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의 몸이 된다. 중평과 녹천의 무공을 함께 수련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저들에게 이용가치가 높다는 판단을 했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두 가지 무공을 한 몸에 수련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금제를 당해서 어느 한쪽 무공밖에 수련하지 못한다.
음생(陰生)은 양공(陽功)을, 양생(陽生)은 음공(陰功)을 수련하게 된 것도 금제를 풀려는 안간힘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번으로…… 끝……내야 해’
그녀는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촤라라라락!
단전에서 두 가닥 기류가 일어나 전신을 휘돈다. 그리고 일점집중(一點集中), 두 기류가 태아에게 집중된다.
혈오를 어루만진다.
물론 혈오는 기류를 퉁겨낸다. 어미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친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두 무공을 일으켰다. 두 가닥의 진기를 최대한 부드럽게 풀어서 혈오에게 집중했다.
가슴으로 심어(心語)도 토해냈다.
‘미안, 미안, 정말 미안…… 이 어미가 못된 생각을 했네. 미안. 정말 미안…… 아이야, 우리 같이 살자. 정말. 이 어미, 한 번만 봐줘. 정말 살고 싶어. 아이야, 제발 이 어미 좀 살려줘.’
사라라라라락!
두 가닥 기류가 혈오를 쓰다듬는다.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었다. 까마득한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치 몸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정신을 잃어가는 게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허나 그 속에서도 심어는 잃지 않았다.
‘미안, 미안, 정말 미안. 미안해. 정말 못된 생각을 했나봐. 죽여도, 어미와 같이 죽어도 원망하지 않아. 같이 살자고 한 말도 욕심이었나? 네 생각을 하지 않고 내 욕심만 부렸나? 미안…… 모든 게 미안하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