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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파괴록-69화 (6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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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章 돈명(沌鳴) (4)

불길이 당겨지는 순간…… 유화아는 퍼뜩 깨달았다.

‘없다!’

검왕은 없다.

그가 반드시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검왕은 지켜보고 있지 않다.

제 날짜에 군산까지 가지 못한다면 독에 죽는다.

수선화의 독기가 여지없이 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해줄 사람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혈천성주가 되었든 마군이 되었든…… 이들은 자신들이 뚫고 나가야 한다.

“뒤로!”

그녀가 버럭 고함치자, 음악오귀가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물러설 곳은 없다.

거지는 자신의 대장간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대장간을 그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거지가 퇴로를 모두 끊고 불을 놓았다.

불길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단번에 타올랐다. 뒤로 물러선다고 해도 빠져나갈 공간은 없다.

쉬이이익!

유화아가 방향을 잡았다.

음악오귀는 신형을 떨치는 중에도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용케 알아냈다.

여섯 사람이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이 움직인다.

콰앙!

사귀와 오귀가 벽을 뚫었다.

화르르륵!

곧바로 불길이 들이쳤다. 한순간이라도 머뭇거렸다면 화마에 휩쓸리고 말았을 게다.

화르르륵!

불이 대장간을 집어삼킨다.

혈천성주가 기대했던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검왕이 나타나야 하는데.

“다른 통로가 있는 거 아냐?”

“그럴 리 없습니다.”

거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불길은 그들이 머물렀던 지하 공간에도 번졌다.

유화아가 지하공간으로 뛰어들어갔다면 펄펄 끓는 용암 속으로 투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불길은 강한 구심력으로 일으키면서 대장간 중앙을 향했다.

불길이 밖에서 안으로 훅! 빨려 들어온다.

바깥쪽보다는 안쪽으로 인화성 강한 기름이 잔뜩 부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맹세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외부의 도움 없이 불길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럼 이놈은 왜 안 나타나! 벌써 나타난 거 아냐!”

“진정하십시오.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회회문사가 혈천성주를 다독였다.

사실, 그는 혈천성주를 다독일 필요가 없다. 성주는 마군을 의식해서 흥분한 척한 것일 뿐, 흥분하지 않았다. 그도 성주의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혈천성주는 중원 무림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불길을 쓸어보던 혈천성주의 눈길이 고요해졌다.

사람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는다. 그뿐이다.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 욕을 퍼부을 이유가 있는가?

“쯧! 저놈들만 개죽음 당했군.”

혈천성주가 마지막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마군은 혈천성주와는 입장이 다르다.

‘놈이 있었어!’

그는 검왕의 생존을 확신한다.

유화아와 음악오귀를 척멸하기 직전, 검왕의 부름을 받았다.

그때도 검왕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검왕이 아니면 토해낼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검왕이 검음(劍音)을 울렸다.

검왕의 검음은…… 뭐라고 할까? 마치 가는 피리 소리 같다. 너무도 연약한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가 강풍, 돌풍을 뚫고 명확하게 들린다. 그런 종류의 소리다.

검왕의 검음은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 번 들은 사람이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때, 그런 소리를 들었다.

일수만 쳐내면 유화아와 음악오귀를 쓰러트릴 수 있는데도 기꺼이 포기하고 검왕을 쫓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확실하게 검음을 들었다.

검왕은 유화아와 음악오귀를 보호한다.

확실하다!

마군이 검지를 들어서 자신의 미간을 톡톡 쳤다.

주위에 늘어선 수하들이 그 모습을 봤다.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검왕의 실체를 확인해야 한다. 검왕이 살아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야만 한다.

스스스스슷!

수하들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혈천성주가 기미를 눈치챘는지 힐끔 뒤를 쳐다본다.

마군은 싸늘한 안광을 쏟아내면서 신형을 띄웠다.

“마군이 그냥 갈 놈이 아니지?”

“음형추잠(隱形追潛)입니다.”

“저놈들이 검왕의 눈을 속일 정도가 돼?”

“마군의 은형추잠은 알아줍니다.”

“검왕을 속일 정도가 된다, 이거지?”

“…….”

“나도 하면 안 될까?”

“…….”

“알았어. 그만두지.”

혈천성주가 히죽 웃었다.

은형추잠이란 십 리의 거리를 두고 추격하는 고급 추격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를 단지 직감만으로 쫓아야 한다. 도주자들이 흘린 단서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추리나 직감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추격술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혀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검왕이라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생각이 삐끗하면 여지없이 놓치게 된다.

혈천성주는 이런 추격술을 펼치지 못한다.

마군은 은형추잠에 대해서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실력이 아니다. 경험이다. 무공이 아니라 경륜이다. 지혜가 아니다. 반복된 습관이다.

화르르륵!

대장간이 한 줌 잿더미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속에 유화아와 음악오귀는 없었다.

‘후우우우우…….’

‘하아아…….’

그들은 가늘고 긴 숨을 내쉬어 답답함을 쏟아냈다.

불길이 코앞까지 들이쳤다.

불길이 쏟아내는 열기에 살이 익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일귀는 화상까지 입었다.

그래도 목숨은 구했다.

그들은 마군이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혈천성주는 대장간이 잿더미로 변한 후에도 떠나지 않았다.

거지가 뜨거운 잿더미를 일일이 뒤지고 다녔다. 기다란 창으로 쿡쿡 쑤시면서.

허나 그들이 숨어있는 곳은 쑤시지 않았다.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장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거야?”

혈천성주마저 떠난 후, 일귀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몰라.”

유화아가 말했다.

그녀도 대장간 한구석에 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장간의 주인조차 모르는 곳인데, 이곳이 초행인 그녀가 알 리 있는가.

다만…… 투살진기가 한기(寒氣)를 감지했다.

사방이 온통 뜨거운 화기로 뒤덮여 있는데, 오직 한 곳에서만 음습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곳을 향해 달려왔다.

대장간 벽을 뚫자, 곧 한기로 뒤덮인 굴이 나왔다.

그들이 들어선 굴은 지하수가 흐르는 듯 습기로 가득했다. 들어서자마자 축축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화기를 막는 데 도움이 될 줄이야.

대장간을 불태운 화기는 그들이 도피해있던 토굴조차도 바싹 말려버렸다.

만약 불길이 한 치만 더 깊이 들어섰어도…… 대장간에 뿌려진 기름이 조금만 더 많았어도…… 불길이 대략 일다경 정도만 더 지속했어도…….

그들은 생사의 순간을 넘겼다.

“검왕이 온다며?”

“안 와.”

“그 새끼…… 안 올 줄 알았다니까!”

이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날짜를 많이 지체했어. 약속된 날짜에 군산까지 가야 돼. 그러자면…… 말을 빌려야겠어.”

그녀는 자신들이 노출되는 것을 각오하고 일로 직진, 군산까지 치달릴 셈이다.

검왕이 곁에 없다.

저들에게 발각되어서 죽으나 수선화에 죽으나 마찬가지다.

검왕이 무슨 일을 획책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군산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들의 무공을 칠 성 이상으로 높일 필요가 있지만…… 그것도 달리면서 생각한다.

우선 당장은 손해 본 시간을 보충해야 한다. 검왕을 기다리느라 흘려보낸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아주 냉정한 사람이야!’

그녀는 검왕이 미워졌다.

이거야 뭐……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식이지 않은가. 미끼로 던져놓기만 하고.

“흐흐! 빌리는 건 우리에게 맡기라고. 아주 잘 빌려.”

일귀가 음충맞게 웃었다.

일귀와 이귀는 반시진도 되지 않아서 말 여섯 필을 가져왔다.

말 안장에 병기 꽂는 곳까지 준비된 군마(軍馬)다. 군대가 아니더라도 나라에서 관리하는 말이 틀림없다.

‘군마까지!’

유화아는 새삼 이들을 다시 쳐다봤다.

음악오귀는 정말 세상을 막사는 사람들 같다. 이들은 군대고 뭐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딱 하루. 하루만 타야 돼. 더 오래 타면 걸려.”

일귀가 말고삐를 건네주며 말했다.

두두두두두!

유화아와 음악오귀가 말을 타고 질주한다.

그 뒤를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뒤쫓는다. 그들은 원래 십 리 거리를 격하고 쫓을 셈이었지만, 유화아가 말을 타고 치달리니 있는 힘껏 신법을 전개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길은 정해져 있다.

은형추잠을 펼치기가 더 쉬워졌다.

또 그 뒤를 일단의 무리가 조용히 뒤쫓는다.

혈천성주에게도 은밀히 추격하는 방법이 있다. 마군의 은형추잠처럼 직접적인 방법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빌리는 간접 추격이지만, 효과는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다.

혈천성의 수많은 마인들이 추격에 동참한다.

그들은 길에서 장사를 한다. 풀을 베기도 하고, 나뭇짐을 메기도 한다.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혈천성 사람일 수 있다.

혈천성주가 마음먹고 사람을 뿌리면 드넓은 중원 십팔만 리가 환히 드러난다.

혈천성도 움직인다.

그는 이 모든 모습을 굽어봤다.

‘잘 버텨주었다.’

유화아는 생각 이상으로 잘 버텨주었다.

혈천성주나 마군 같은 거마들을 만나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잘 해주었다.

그는 또 한 여인을 생각했다.

누미!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 여인으로서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운명 속에 던져졌는지 알지 못한다.

‘중원 무림…… 너희는 이 여자들에게…… 머리칼을 잘라서 짚신을 해주어도 모자라.’

그는 우울한 눈으로 야공을 쳐다봤다.

지금까지는 알게 모르게 도와줄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도 힘들 것이다.

유화아와 음악오귀, 너희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누강과 음사가 적벽검문에 도착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문을 열지 못한다.

적벽검문은 오래전에 봉문했다.

대체로 봉문한 문파라고 해도 한 식구가 찾아오면 쪽문을 열어주는 것이 관례다. 봉문이라는 상황이 사형제 간의 왕래까지 통제하지는 않는다.

적벽검문은 철저히 통제한다.

적벽검문은 일용품까지 통제한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그 어떤 것도 반입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급자족을 하면서 안에만 틀어박힌다.

누강과 음사가 적벽검문 안으로 들어서는 방법은 월담밖에 없다.

허나 그들 무공으로는 월담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적벽검문을 바라보면서 망연히 기다릴 뿐이다. 적벽검문의 문이 열릴 때까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적벽검문이 있는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제 몫을 해주고 있는데…… 사내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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