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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二章 혈오(血蜈) (3)
협곡에는 많은 약재가 있다. 협곡에 없는 약재는 중원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약재가 무용지물이다.
대체로 이런 경우, 협곡 사람들은 방치를 선택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하늘이 주관하는 것이다. 살 사람은 살 것이고, 죽을 사람은 죽을 게다.
산모나 태아나 열 달 시한부 인생이 된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런 경우, 산모나 태아 어느 한쪽이라도 무사했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십중십, 백중백…… 어느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모두 죽었다.
저벅! 저벅! 저벅!
석화선생은 지하 암동을 걸어갔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머리와 이마를 적신다.
암동에는 십 장 간격으로 횃불이 밝혀져 있어서 어둡지도, 환하지도 않다. 어두워진다 싶으면 밝아지고, 밝아진다 싶으면 다시 어두워진다.
저벅! 저벅! 저벅!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공기가 몹시 습해졌다. 호흡도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든다.
계단이 끝났다.
“오셨습니까?”
계단 끝자락에서 건장한 청년이 포권지례를 취하며 맞이했다.
“천(天)이는?”
“잘 계십니다.”
“허허! 밖에는 난리가 아닌데 제 놈만 편하면 다야? 잘 지내면 안 되지.”
석화선생이 투덜거리며 암동 깊숙이 걸어갔다.
그에게 포권을 취했던 청년은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얼굴색이 좋구나.”
석화선생은 철창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철창 안에는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미공자가 앉아있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안 좋은 모양입니다.”
미공자가 웃으면서 맞이했다.
“네놈이 벌인 도박판…… 끝난 것 같다.”
미청년은 그 말에도 입가에 띤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많이 안 좋습니까?”
“역살이다.”
“흠!”
미청년도 역살이라는 말을 듣고는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관계를 맺을 때 화혈역심공(火血逆心功)을 시전했다고 들었는데, 맞는 게야?”
“맞습니다.”
“초성(初成)도 맞고?”
“맞습니다.”
“화혈역심공을 수련하기 전에 다른 공부를 수련한 것은 아니고?”
“적벽검문의 검초밖에 수련하지 않은 여자입니다. 화혈역심공도 제가 전수한 후에야 수련했으니 초성이 맞습니다. 화혈역심공을 수련한 후에 열양진기가 생겼습니다. 그전에는 결코 여타의 열양진기를 수련한 적이 없습니다.”
“하기는…… 어련히 잘 봤을까.”
석화선생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떻게 됐든…… 아이는 꺼내주십시오.”
미공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꺼내도 죽네.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테고…….”
“화혈역심공은 구수 오십사 초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제가 전수한 화혈역심공도 구수 오십사 초입니다.”
“무슨 말이냐?”
석화선생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미공자는 석화선생을 쳐다보면서 웃기만 했다.
“어허! 답답하게!”
“제 별호가 월중수 아닙니까. 하하하!”
월중수 화천이 크게 웃었다. 지하 암동이 쩌렁 울릴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석화선생은 눈빛만 번뜩였다.
월중수는 ‘달 속에 숨은 숲’이란 뜻이다. 생각이 깊고 계략이 음험해서 붙은 별호다.
월중수는 월장(月將) 휘하, 월장이 다스리는 녹천(綠天)의 최고 두뇌로 꼽힌다.
머리 좋고, 무공 뛰어나고, 거기에 흠 잡을 데 없는 미공자다.
그런 그가 중원에 나가서 씨받이를 골라왔다.
녹천의 사내는 중평(仲平)에서 여인을 취해야 한다. 그것이 관례이며, 관례에는 반드시 지켜야만 되는 이유가 있다.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런데 화천이 그런 관례를 깼다.
그는 중원에서 씨받이를 골라왔을 뿐만 아니라 중평의 절기인 화혈역심공까지 전수했다.
그는 녹천 사람으로서 중평의 절기를 도둑질했다.
음공(陰功)을 수련해야만 하는 녹천 사람이 양장(楊將)의 중평 무공을 훔쳤다.
그래서 누미는 열양진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차디찬 한음진기가 파고든다. 뜨겁게 달아오른 용암바다에 얼음덩이 태아가 뚝 떨어진다.
누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이 새로운 잉태 방법 때문이다.
화천이 즉결처분을 당하지 않고 뇌옥에 갇혀 있는 것도 이 결과를 본 후에 처벌하기 위해서다.
화천이 말한 것은 맞다.
협곡 사람이 중원에 나가서 여인을 겁간하면 즉결처분을 당한다.
이는 한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다. 협곡 사람들 전체의 안위를 무시한 행동이다.
더군다나 화천은 양장의 무공까지 훔쳤으니.
화천의 목숨은 누미에게 달렸다. 그녀가 건장한 아이를 탄생시켜야 한다. 협곡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 임시방편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해소해야 한다.
헌데 역살이다. 그리고 화천은 웃는다.
‘월중수! 달 속에 숨은 숲. 화혈역천공 속에 다른 것을 감춰놨다! 누미는 죽지 않아!’
개인적으로 의원의 입장에서 누미를 살펴보면 그녀는 필히 죽는다.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다. 화천이 무엇을 숨겨놨든 간에 지금 태아의 상태를 살펴보면 살 길이 없다.
“아이를 꺼내주시겠습니까?”
화천이 같은 말을 했다.
“그럼세. 할 수 있다면. 내게 더 해줄 말이 없나?”
“없습니다.”
화천은 눈을 찡긋거리면서 말했다.
이곳…… 지하 암동은 중평이 관할하는 뇌옥이다. 뇌옥 입구를 지키는 무인은 증평주가 신임하는 수하다. 그는 뇌옥 입구에 앉아있지만, 뇌옥에서 나누는 말을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와 화천이 나눈 이야기들…… 모두 증평주의 귀에 들어간다.
증평주도 화천이 누미에게 모종의 암계를 걸었다고 생각할 게다.
그는 미공자를 쳐다봤다.
미공자는 눈을 감고 있다.
화혈역심공은 구수 오십사초다.
화천이 전수한 화혈역심공도 구수 오십사초다.
화천은 왜 이런 하나마나 한 말을 했을까?
구 수 오십사 초…… 초식을 전수하면서 무엇인가 암계를 걸어놓은 듯한데…….
“화천이 가르쳐 준 무공을 보자.”
“왜요?”
“아이에게 무리가 되지 않도록, 천천히. 천천히 해보거라.”
누미는 콧등을 찡긋거렸다.
화천에게 배운 무공이 있기는 하다.
그녀를 임신시키기 위해서 가르쳐준 공부이니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걸 수련하면 몸이 얼음덩이처럼 차가워져요.”
누미가 하기 싫다는 뜻을 비쳤다.
“정사를 나누지 않을 때는 그렇지.”
“그래요.”
“초성이라서 그렇다. 그래도 단전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을 텐데?”
“그래요.”
“그 열기가 밑바탕이다. 아주 미미한 열기였지. 그 열기가 조금만 거셌어도 한기를 느끼지 못했을 게다. 반면에 네 몸은 불붙은 듯 뜨거워졌겠지.”
“…….”
누미는 노인의 말을 잠시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화천이 가르쳐 준 공부가 매우 차가운 음한진기였다고 생각했다.
정사를 벌여야만 몸이 녹는.
헌데 노인은 정반대의 말을 한다. 노인이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추측해서 생각하면…….
초성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했다.
이 말은…… 원래 그녀가 배운 무공은 매우 뜨거운 열양진기다. 다만 매우 차가운 기운이 몸을 엄습해서 뜨거운 기운을 느낄 틈이 없었다. 열양진기의 공부가 낮아서 한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기는 화천이 주입했다.
허면 정사를 벌일 때는 왜 한기가 눈 녹듯 사라졌을까?
정사를 나눌 때 열양진기가 깨어난 것이다. 딱 정사를 나눌 동안에만 깨어난다.
열양진기의 공부가 조금만 높았어도 그토록 지독한 한기는 느끼지 않았을 게다.
그녀는 노인이 말하지 않은 내막까지 단숨에 깨달았다.
누미가 말했다.
“제게 구수 오십사 초를 가르쳐줬어요. 그걸 말하는 거죠?”
“그렇다. 한번 보자꾸나.”
누미는 천천히…… 태아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구 수 오십사 초를 펼쳐냈다.
‘아무것도 없다!’
석화선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화천이 가르쳐 준 화혈역심공 속에 무엇인가 다른 게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아니다. 증평주가 펼친 것과 누미가 펼친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몸은 어떠냐?”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맥을 보자.”
석화선생은 누미의 맥문을 잡았다.
누미는 얼음덩이를 품고 있다. 반면에 그녀의 몸을 용암처럼 뜨겁다. 음과 양도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무공을 수련한 상태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진배없다.
“으음!”
맥을 짚어보던 석화선생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나쁜가요?”
“매우 안 좋구나.”
“그래요? 저는 괜찮은 데요?”
“저녁 때쯤 부조화가 일어날 게다. 차가웠다 뜨거웠다…… 내가 괜히 공부를 보자고 했구나.”
“부탁이 있어요.”
“말해봐라.”
“제가 방금 펼친 공부, 이름이 뭐죠? 전 아직 이름도 몰라요.”
“화혈역심공이라고 한다.”
노인은 숨기지 않았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협곡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름이니까.
“화혈역심공? 그렇군요. 비급을 보여주세요.”
“뭐라고?”
“또 하나, 제 아이. 굉장히 차가워요.”
“…….”
석화선생이 잠시 말을 잊고 누미를 쳐다봤다. 눈빛을 반짝이면서.
“그걸 느낀다는 거냐?”
“네.”
“허허! 그걸 느낀다고?”
노인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거듭 물었다.
중평여인들은 몸이 뜨겁다. 매우 뜨겁다. 하지만 녹천 사내들의 씨앗을 품어도 차갑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느낌을 말한 여인이 전혀 없었다.
어떤 기운을 받고 잉태되든 태아는 태아다. 사람 온도를 지니기 때문에 차갑다거나 뜨겁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더군다나 자신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이지 않은가. 차갑다거나 뜨겁다는 감각은 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니면 음식물을 삼켰을 때나.
“열양진기와 얼음처럼 차가운 아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야겠어요. 제가 참조할 수 있는 비급을 전부 주세요.”
“허허! 안 될 말.”
“제가 살길 바라시죠?”
“…….”
“그럼 주세요.”
“안 된다. 화천이 그 공부 때문에 뇌옥에 갇힌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저, 죽어가고 있다는 거 알아요. 이 아이, 무사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표정을 숨기는 법도 배우셨어야죠.”
누미가 석화선생을 보면서 찡긋 웃었다.
“구해줄 수 있는 것들을 구해주세요. 혹시 아세요? 제가 방법을 찾아낼지. 이래 봬도 제가 요미검체예요. 화천이 그것 때문에 절 임신시킨 거잖아요.”
“으음! 알아보마.”
석화선생이 자신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말하면서 울타리 너머를 쳐다봤다.
이곳은 녹천 사람들이 감시한다. 중평 사람들도 감시한다. 양쪽 모두 누미를 지켜본다. 그들은 그와 누미가 나눈 이야기를 들었고, 각기 자신들의 천주에게 보고할 게다.
스스슷! 스스스슷!
울타리 밖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석화선생이 일어설 때, 그들도 신형을 날려 떠나갔다.
석화선생이 말했다.
“요미검체라. 허허허! 적벽검문이 사고를 치는구나.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