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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章 별타차[막지마라] (5)
드르륵!
벽장이 기름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밀려났다.
‘아!’
유화아의 봉목에 기광이 어른거렸다.
아버지에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어떻게 이런 밀실이 드러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까.
“들어가거라.”
“같이 안 들어가세요?”
“…….”
아버지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봤다.
아버지의 눈길 속에는 지금에라도 생각을 돌리고 이 일에서 손을 뗐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 있다.
“그냥 들어가면 돼요?”
“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자식을 막수선자에게 보냈다. 헌데 십여 년 동안 꼭 붙들고 있던 사람이 하필이면 그 시점에 하산을 허락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꼭 그 시점에 음악오귀와 마주쳤다.
음악오귀는 간살(姦殺)로 유명하다.
여인을 겁탈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목숨을 끊어서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한다.
만일 그날 일이 잘못되었다면 유화아는 간살당했을 것이다.
헌데 그렇게 죽는 것이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이 밀실에 발을 딛는 것보다.
유화아는 아버지의 표정을 읽고 말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때, 아버지가 그녀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게…….”
“아버지는 이미 이 안을 경험하셨잖아요. 제가 빠진다고 해도 아버지는 계속하실 거잖아요.”
“화아야!”
“아버지, 같이 가요.”
유가장 삼문주는 옷소매를 놓았다.
“들여보내기는 한다만…… 널 받아들이고 내치고는 검왕 마음이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죽일 터…… 꼭 다시 봤으면 좋겠구나.”
아버지가 손을 들어서 그녀의 빰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진심이었다.
아버지의 손길은 살아생전에 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만져 본다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아버지가 이렇게 긴장하나.
그녀는 밀실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밀실에는 빛 한 점 들지 않는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휘감겨 있다.
이런 곳에서는 안공(眼功)도 소용없다.
그녀는 오직 발의 감각에 의지하며 한 계단씩 밟아 내려갔다.
계단은 완만하다. 하지만 개수가 일흔두 개나 된다. 상당히 깊이 내려간다는 뜻이다.
그녀는 앞으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일흔두 계단을 모두 내려섰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그 어느 곳에도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횃불을 주지 않았다.
밀실 안으로 들어서면 일흔두 계단이 있다고 말해준 것이 밀실에 대한 마지막 정보다.
‘여긴 어디지?’
앞으로 나아가야 될지, 옆으로 돌아가야 될지…….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반 걸음씩 더듬거리며 나아갔다. 그때,
턱!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앞으로 쭉 내민 두 손에, 손바닥에 무엇인가가 닿았다. 딱딱한 벽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벽을 더듬었다. 헌데,
쿡!
무엇인가가 그녀의 목 뒤를 꾹 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발을 내딛고 싶은데 움직여지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보려고 했다. 허나 고개도 돌아가지 않는다.
‘당했어!’
그녀는 마혈(麻穴)이 제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혈을 누르는 손길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산길을 가다가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 살짝 긁힌 듯한 느낌뿐이었다.
혈을 누른 게 아니다. 닿기만 했다.
헌데도 그녀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거, 검왕이세요?’
그녀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술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혀도 굳어 버렸다. 음성도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이러한 점혈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역시 검왕!’
그녀는 감탄을 거듭했다.
사람들이 검왕을 떠받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검왕이 음악오귀를 두들겨 팰 때, 검왕이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녀가 막상 당해보니 이건 뭐…… 손도 못 써보겠지 않은가.
그녀는 아버지의 말도 떠올렸다.
널 받아들이고 내치고는 검왕 마음이다.
‘받아줄 거야.’
그녀는 자신했다.
지금 검왕은 혈도를 제압한 후, 고심하고 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 받아줄까, 내칠까. 그래도 유가장 삼문주의 딸인데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유화아는 다른 점도 자신했다.
그녀는 강남제일미녀로 불린다. 만화일취, 만 개의 꽃이 하나의 아름다음으로 집약되었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지 않은 사내는 없었다.
검왕이 혈도를 제압했지만,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망설이고 있지만…… 끝내는 받아주게 될 게다.
그때, 혈을 제압한 사람이 말했다.
“말랑말랑한 살을 만지니 더 미치겠네. 이걸 그냥 확 덮쳐 버려?”
이 목소리!
그녀는 퍼뜩 음악일귀를 떠올렸다.
대부, 큰 도끼를 들고 있던 자! 그자다!
‘맙소사! 내가 누구에게 잡힌 거야!’
그녀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음악일귀는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는 마혈이 제압된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어둠은 시간이 흐르면 눈에 익혀지기 마련이다. 헌데 빛 한 점 없을 때는 전혀 다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보이는 게 없다. 흐릿하게나마 보인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음악오귀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여자 살 냄새가 이렇게 자극적인가?”
“큭큭큭! 말하지 마라. 더 생각난다.”
“한 번 하고 그냥 죽어?”
“그러던가.”
“같이 안 할 거요?”
“안 해.”
“어! 정말이우?”
“안 한다니까. 난 이 무공, 한 번 써보고 죽을란다.”
“하기는…… 어휴! 저 물건 어디 치워둘 데 없나? 자꾸 신경 쓰이네.”
“아예 신경을 꺼 버려.”
“신경이 어떻게 꺼져요! 자꾸 냄새가 나는데.”
그녀는 졸지에 냄새나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부드러운 바람, 미풍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바람? 누가 움직였어!’
밀실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공기의 흐름이 죽어 버린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바람이 불 적에는…….
쒸익! 따악!
“아이쿠!”
무엇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비명도 함께 터졌다.
그것이 시작이다.
쒜엑! 따악! 따악! 쒜에에엑! 따아악!
미풍이 태풍으로 바뀌었다.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바람이 심하게 분다. 공기의 흐름이 매우 빠르다. 그리고 음악오귀가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툭!
그녀의 목에 나뭇가지가 걸렸다.
그 즉시, 그녀는 손발에 힘이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무너지듯 쓰러졌다.
몸이 마비된 채로 멀뚱히 서 있는 것은 대단한 고문이다.
우선 근육이 경직된다.
마혈이 제압된 상태라서 고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근육이 제 기능을 잃어간다.
헌데 그런 고통은 사실 몇 날 며칠이고 견딜 수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려온다. 저린 다리를 쭉 펴면 저림을 면할 수 있다. 허나 그럴 수 없다면 참아야 한다. 다리가 마비되는 것 같아도 참아야 한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계속 참을 수 있다.
계속 참다보면 근육이 경직되고, 뼈가 굳어 버린다. 앉은 다리를 펴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참고자 하면 참을 수 있다.
마혈을 짚인 상태가 이와 같다. 근육이 비비 꼬이고 뒤틀린다. 다만 아프지가 않다. 피가 흐름을 멈추고, 뼈가 굳어지는데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 고통은 마혈이 풀렸을 때, 한꺼번에 일어난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다. 막혔던 피가 한꺼번에 통하면서 머리까지 어질거린다.
헌데 그녀의 목에 부드러운 손길을 댔던 사람, 검왕이 말했다.
“따라와.”
검왕은 그녀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 속을 걸어갔다.
저벅! 저벅!
검왕의 발걸음 소리가 어둠을 울린다.
“남은 기간은 스무이레.”
남은 기간? 무슨 남은 기간?
툭!
그녀 앞에 비급 한 권이 던져졌다.
“이게 뭐죠?”
“불빛을 한 시진 준다. 한 시진 안에 비급을 외우고, 수련해라. 스무이레 안에.”
“가만! 지금 무공을 익히라고요? 이걸요?”
그녀는 검왕이 던져 준 비급을 집어 들면서 검왕을 쳐다봤다.
그녀는 검왕이 준 비급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았다. 그럴 틈이 어디 있는가. 검왕의 말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인지 눈빛으로 되물었다.
대체로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지도가 필요하다.
사부가 초식을 가르쳐 주고, 초식 사이사이에 포함된 요결도 알려줘야 한다.
무공을 비급으로 배울 수는 없다.
또 검왕이 말한 기간…… 스무이레도 말이 안 된다.
무슨 놈의 무공을 스무이레만에 터득하나. 그것도 검왕이 던져 준 비급을.
검왕은 봉황검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운 무공을 배우라고 하는 게다. 그러니 비급 속에 들어 있는 무공은 적어도 봉황검법보다는 강할 것이다.
봉황검법도 십 년을 수련했다.
그렇게 수련하고도 절정으로 수련해 내지 못했다. 이제 겨우 검을 들 정도가 되었다고 본다.
절정 무공을 스무이레만에 터득하라, 제정신인가?
사내…… 어둠에 몸을 가리고 있어서 용모를 볼 수 없는 사내…… 하지만 눈빛만은 매우 매섭다고 생각되는 사내가 싸늘한, 정말로 정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수련해 내지 못하면 죽는다.”
‘마, 맙소사!’
그녀는 입을 쩍 벌렸다.
사내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 그녀는 비로소 비급을 살펴봤다.
- 투살진기(透煞眞氣)
비급은 거무튀튀했다. 비급에 적힌 글도 칙칙했다.
‘투, 투살진기! 이게! 이게 어떻게!’
투살진기는 마공관에 소장되었다고 알려진 마경 중에 마경이다.
형체 없는 진기를 쏘아낸다. 허면 상대는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다. 몸을 비비 틀면서 죽는다.
물론 투살진기는 마공이다.
어떻게 수련하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왜 마공에 포함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공관에 소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마공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녀처럼 정종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할 비급이다.
“이걸 수련하라고요!”
그녀는 검왕이 사라진 어둠 속에 대고 말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다시 음충맞은 소리가 들려왔다.
“투살진기라…… 저것도 욕심나는데.”
“흐흐흐! 계집아, 이건 널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한 시진 후면 불이 꺼진다. 불 꺼지면 넌 죽어.”
“제길! 안타깝네.”
“뭐가?”
“보아하니 저 계집이 저걸 한 시진 안에 외울 것 같지는 않고…… 그럼 결국 죽을 거 아니우. 기왕 죽을 거 육덕 좀 베풀면 안 되나? 저거 손도 못 대보고 보내려니…….”
“크크큭!”
음악오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순간, 유화아의 눈길이 매우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다. 저들 말이 맞다. 검왕이 비급을 던져 주고 사라진 순간,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검왕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