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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 투생(投生) (4)
스무닷새, 약속한 한 달이 닷새 남았다.
누미의 몸은 쇠꼬챙이가 되었다. 뼈에 가죽만 붙어놓은 형상으로, 예전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얼굴 윤곽도, 피부의 탄력도…….
“보기 좋군.”
“…….”
“난 이런 모습이 좋아. 뭐라고 할까?”
쇠꼬챙이처럼 말라버린 누미를 좋아할 사내는 흔치 않다. 막말로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나돌아다닌다고 해도 겁간을 당할 염려가 없을 정도다.
누구든 그녀만 보면 슬금슬금 피한다.
말라도 어느 정도여야지…… 사람이 너무 말라버리면 오히려 징그러운 법이다.
헌데 화천은 매일 그녀를 탐했다.
그녀가 쇠꼬챙이가 되어갈수록 더욱 옆에 달라붙어서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보기 좋단다. 말라버린 모습이.
‘변태자식!’
누미는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알아챈다.
그녀는 무인이기 이전에 여인이다. 여인이 미모를 잃었다. 육신을 잃었다. 예전에는 뭇 사내들의 곁눈질을 받았는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곁눈질을 받는다.
그녀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매일 치르는 정사 때문이다.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미지의 열양진기가 내부로 침입하여 살과 뼈와 피를 훔쳐간다. 아니, 태워버린다.
정사를 치를 때마다 오장육부가 활활 불타오른다.
그 뜨거움이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날은 몸이 너무 뜨거워서 찬물에 몸을 담그고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그럼에도 화천의 탐욕은 중단되지 않는다.
싫다.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지만 번쩍 눈을 뜨고 ‘아! 꿈이었네’하고 말했으면 좋겠다.
스무엿새, 화천이 지나가는 나방을 낚아챘다.
“예쁘군.”
“…….”
그런 말에 대꾸할 정신이 없다.
이제 남은 기한은 나흘…… 앞으로 나흘만 지나면 화천의 무공이 완성된다.
그 안에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화천이 나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 나방, 애벌레였다는 거 알아?”
“알아.”
누미의 음성은 냉랭했다.
이제는 화천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그래도 화천은 웃기만 한다.
그래, 서로 목적이 다르니까.
“나방을 보면서 애벌레를 떠올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하하! 내기를 해도 좋아.”
누미는 주변을 돌아봤다.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다.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거목들이 빼곡하게 자라서 하늘을 가린다.
화천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이런 곳에서 사람을 죽여 묻어버리면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탈출도 못 해.’
누미는 참담한 심정으로 원시림을 쳐다봤다.
“애벌레, 나방, 애벌레, 나방…… 애벌레가 더 예쁠까, 나방이 더 예쁠까?”
‘뭐라는 거야.’
누미는 화천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었다.
시답지 않은 말에 일일이 동조를 해줄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
“난 이 나방보다는 애벌레가 좋아.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러는 것 같아. 애벌레를 무서워하거나 징그러워하는 사람이 있나? 다들 귀엽다며 가지고 놀잖아.”
‘앞으로 남은 날짜는 나흘…… 이 숲을 만난 게 그저께…… 돌아가는데 만도 사흘이야.’
절망적인 시간이 다가온다.
한가롭게 애벌레 타령이나 하는 화천의 말에 동조할 수 있는가?
“하지만 나방은 달라. 이 나방은 잡으면 분 같은 게 묻어나거든. 그래서 그런지…… 이놈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데, 막상 잡으려고 하면 징그러워. 애벌레를 만지는 사람은 있어도 나방을 만지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
“수다 다 떨었으면 그만 가. 바람이 없어서 그런지 답답해.”
“아직.”
“……?”
“아직 수다 다 안 떨었어.”
화천이 쥐고 있던 나방을 꾹 눌렀다.
나방이 으스러진다. 잠시 날개를 퍼덕이다가 잠잠해진다.
화천은 그녀를 탐하면서부터 폭력적인 면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가식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상냥한 사람, 다정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역시 마인은 마인…… 본색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지.
“나도 나방은 싫어. 애벌레가 좋아.”
“그만 가. 헛소리 듣는 것도 지겨워.”
“그래서 지금의 네가 좋은 거야.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괴기롭게 변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애벌레니까. 그래서 네가 사랑스러운 거야.”
‘뭐야? 지금…… 날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거야?’
누미는 화천의 눈빛에서 진실을 읽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해 보였다.
“넌 곧 나방이 될 거야. 껍질을 깨고 나오겠지. 아주 화려한 나방이 되겠지.”
“무슨 말이야?”
“애벌레 상태를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는 말.”
“무슨 말이냐고!”
“하하하! 자연히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차후로 탄생할 너보다 지금의 네가 백번 좋아.”
화천이 묘한 말을 했다.
슷! 스슷!
원시림에서 묘한 기척이 울린다.
누미는 주변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스무이레째에서야 눈치챘다.
“저기…….”
“알았군.”
“알고 있었어?”
“이 숲…… 우린 단림(斷林)이라고 불러. 우리와 세상을 단절시킨 숲이니까.”
“……!”
누미는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화천은 길을 오는 내내 목적지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는 촌장이라는 사람이 있고, 일월이 있고……
누미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면 진액이 다 빨려서 죽은 목내이가 되어 있을 게다. 육신은 길거리 어느 곳에 던져지겠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길을 받으면서 죽어가겠지.
그런데…… 정말 그의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슷! 스스스스스!
숲에서 기묘한 울림이 들려온다.
그녀의 청각은 예전에 비해 훨씬 예민해졌다. 정사를 벌이면서 열양진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매일 치른 정사가 화천의 무공을 완성시켜 주지만, 그녀도 많은 덕을 보고 있다. 적어도 내공 성취 부분에서는.
자로 재듯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화천을 만나기 이전에 비해서 훨씬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숲에서 일어나는 기류…… 예전의 그녀라면 감지하지 못했다.
화천의 말을 빌려보면, 저 기류는 숲을 들어설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미행이 나흘째라는 말이다.
헌데 지난 사흘 동안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지금에서야 눈치챈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룻밤 사이에 내공이 급격하게 높아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불현듯, 화천이 어제 말한 나방과 애벌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나방이 되는 거야?”
“…….”
“어떤 나방이 되는 건데?”
“사랑스러운…… 독나방.”
“독나방? 호호호! 내가 보복할까봐 두려워?”
“보복? 하하하! 보복이라……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싫은가?”
“죽인다고 했잖아. 내 손으로.”
“흠!”
화천이 침음했다. 처음으로. 누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웃음으로 흘려 넘긴 사내였는데.
그날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인 정사를 벌였다.
화천이 묵직한 몸으로 짓누른다. 그럴 때마다 단전에서 열기가 피어난다.
그리고 그 날…… 누미는 난생처음으로 지옥불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아악!”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데, 그래도 신음이 흘러나온다.
“이빨 상해. 이거 물어.”
화천은 이런 일을 예상했는지 물푸레나무에 헝겊을 둘둘 감아 내밀었다.
“이거…… 이거……언제까지 겪어야 해?”
누미가 배를 움켜잡고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온몸이 얼음굴 속에 들어간 것처럼 차갑다. 이가 시릴 정도로 덜덜 떨린다.
너무 춥다!
추위는 얼음칼로 변해서 그녀를 난자한다.
살을 찢고, 뼈를 조각낸다. 혈맥 속에 흐르는 피가 얼음으로 변해서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아! 세상에 이런 고통이 또 있나.
화천이 암울한 눈으로 야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고통이 멎을 거야. 그 해…… 하하!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기왕이면 밝은 해가 떴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더 인상적일 테니까.”
“이거, 이거 뭐야?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죽을힘을 다해서 견뎌.”
화천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헌데…… 그녀의 몸이 상상 이상으로 차가운데, 화천의 손은 따뜻할 텐데…… 그가 내민 손마저도 얼음처럼 차갑다. 얼음 칼을 댄 느낌이다.
그녀는 버럭 고함쳤다.
“손 치워!”
화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동녘이 밝아온다. 아침 해가 붉은빛을 토해내면서 떠오른다.
누미는 붉은 해를 차츰 잦아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맞이했다.
‘아름다워.’
저토록 아름다운 아침 해를 본 적이 있던가.
해가 떠오를수록 고통은 사라진다. 전신을 휘젓던 얼음칼이 활동을 멈춘다.
“하악! 하악!”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눈을 사르르 감았다.
고통이 없다. 편안하다. 잠이 온다.
화천은 이틀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낮 동안은 깊이 잠을 잤다. 마치 수혈을 짚인 사람처럼 죽은 듯이 잤다.
눈을 떠보면 초저녁이다.
세상이 어둠에 덮인다. 화천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맛있는 고기를 굽는다.
잠결에 건네주는 고기를 받아먹고…… 곧바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화천이 옷 벗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잠시 동안 이어진 열락…… 그리고 찾아오는 매서운 한기.
누미는 화천에게 몸을 섞인 이후, 처음으로 열락이 잠시라도 더 오래 이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열락이 끝나면 한기가 엄습한다.
고통이 시작된다. 지옥문이 열리고, 힘없이 딸려 들어간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밤새도록 얼음칼에 난도질당하면서 덜덜 떠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치민다. 그러니 화천과 나누는 열락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옥, 아침 해, 깊은 잠…… 모닥불, 열락, 또 지옥.
누미가 눈을 떴다.
모닥불이 보인다. 화천이 고기를 굽고 있다.
‘싫어.’
화천이 그녀를 보면서 웃는다. 굽고 있던 고기를 가져온다.
‘싫어!’
그녀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아직도 자고 있다는 듯이.
“일어나서 먹어.”
화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미는 잠자는 척, 화천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다 끝났어. 그러니까 일어나서 안심하고 먹어.”
‘끄, 끝났다고?’
누미는 화천의 말이 못내 믿기지 않았다.
“하기는 정신이 없을 테니까. 오늘이 약속한 삼십일 째야. 오늘 밤만 지나면 우리 관계는 일단 정리돼. 난 이 관계를 더 이어가고 싶지만…… 선택은 네 자유니까.”
화천의 말이 진실성 있게 다가왔다.
누미는 눈을 떴다. 그리고 화천을 쳐다봤다.
“정말이야?”
“정말이지.”
화천이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사랑스런 여인을 쳐다보듯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거야?”
“한 가지만 더.”
“풋! 그럴 줄 알았어.”
누미는 실소를 흘렸다. 마인의 말을 믿는 게 아닌데.
그때 화천이 다가와 입을 귓가에 대고 작은 말로 속삭였다.
“축하해. 임신. 그 아이, 낳아줄 거지? 아이만 낳아준다면 내 영혼이라도 내줄 수 있어.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