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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 투생(投生) (2)
누강은 계곡에 드러누워 물에 발을 담그고 한가롭게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음사가 같은 모습이다.
두 사람은 은거한 노인들처럼 마음껏 오후의 나른함을 만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한가로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뭔가…… 잡히냐?”
“아무것도 안 잡힙니다.”
“그렇겠지.”
“당주님도 전혀…….”
“이런 식으로 찾아낼 정도라면 진작 알았겠지.”
“있는 것은 확실합니까?”
“확실해.”
“그럴 리가…… 어떻게 꾸며낸 도주로인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그만 가시죠. 여기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저놈들이 눈치챕니다.”
“가만있어라. 생각 좀 해보자.”
누강이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봤다.
그들은 바람 소리를 듣지 않는다. 주변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인기척을 감지한다.
어떤 기척, 조그만 기척이라도 탐지하고 싶어서 일부러 한적한 곳으로 들어왔다.
이곳에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천 년 낙엽이 깔려 있는 깊은 계곡이라서 다람쥐만 부스럭거려도 단번에 눈치챈다.
누강과 음사…… 무공으로는 십마에 견줄 수 없지만 강호 경험은 풍부한 사람들이다. 특히, 음사 같은 경우에는 잠입, 은신에서는 알아주는 고수다.
그들이 마련한 환경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자 한다.
헌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며칠이나 됐지?”
누강이 문득 물었다.
“오늘 말입니까?”
“아니. 내가 음맥교활을 시전 받은 날부터 오늘까지. 며칠이나 지났냐고?”
“글쎄요? 대략 보름?”
“보름 정도는 됐지?”
“네.”
“그런데 뒤를 밟는 놈이 아무도 없어. 이건 분명히 비정상이야. 확실하게…… 비정상이야.”
누강이 이미 알고 있는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그들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깊은 계곡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봤다.
허나 아무런 인기척도 탐지하지 못했다.
이것은 둘 중에 하나…… 뒤를 밟는 자가 정말로 없거나, 아니면 그들의 능력으로는 탐지하지 못할 정도로 초고수가 뒤쫓고 있다는 뜻이다.
검왕은 그들이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누강은 죽는다. 음사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검왕 말대로라면 이미 죽어서 땅속에 들어갔어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활보하고 있는 게다.
이게 정상인가?
자신들이 죽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죽어야 할 상황조차 발생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비정상이다. 그리고 비정상은 반드시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를 죽이지 않고 미행만 한다…… 왜? 목적이 뭘까?”
“쉿!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듣겠어요.”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네?”
“지금까지 우릴 죽이지 않고 뒤만 졸졸 따라다닌 놈들이 이 정도 큰 소리 냈다고 죽이겠냐? 목 떨어지는 일, 없을 테니까 두 다리 쭉 뻗고 누워있어도 된다.”
“하! 당주님도 참…….”
음사는 누강이 그런 말을 하기 전부터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도 상황을 판단한다. 지금과 같은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도주? 불가능하다. 도주를 하기에는 상대방과 무공 격차가 너무 많이 벌어진다. 그러니 상대방이 공격이라도 해올라치면 방비할 방법이 없다.
“어디…… 놀아보고 싶다면 놀아볼까?”
누강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를 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않는 날이 많다.
비 오면 멈추고, 날씨가 추워지면 멈추고, 피곤하면 멈춘다. 날이 어둑해지려고 하면 즉시 멈추고, 아침에는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일어난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인다.
뒤쫓는 자들이 있다면 답답해서 복창 터질 게다.
“오늘은 술 한 잔 어때?”
“좋죠.”
“기왕이면 목간이라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그런 곳이야 많죠. 돈이 없어서 그렇지.”
“하하하! 그런가?”
두 사람은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굳이 고생을 하면서 산길을 더듬어갈 필요가 없다. 그래서 관도로 내려왔다. 풍찬노숙을 할 필요도 없다. 침상이 있는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청한다.
뒤따르는 자들, 너희도 우리처럼 할 수 있으면 해라. 너희도 우리처럼 느긋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라. 서로 같이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지내보자.
그들은 적벽검문으로 갈 생각이었다.
목적지도 잠시 내려놓는다. 그저 산천을 유람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뒤쫓는 자들에게 뒤를 밟아도 아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스스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본색을 드러내거나.
정말로 뒤쫓는 자가 없다면?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다.
“안주는 뭐로 할까요?”
“안주부터 정하는 법이 어디 있냐! 술부터 정해야지.”
“그런가요?”
“하하! 당연…….”
누강은 호탕하게 웃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이거…… 우리에게 던진 경고지?”
누강이 침중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음성은 목이 메서 탁탁 갈라져 나왔다.
쉬이잇!
음사가 재빨리 신형을 날려서 길가에 쓰러져 있는, 아니 죽어있는 여인에게 달려갔다.
음사가 여인의 맥을 짚어본다. 당연히 죽었다.
음사는 여인의 앞가슴을 조심스럽게 풀어헤쳤다.
여인의 앞가슴에 핏자국이 엉겨있다. 완전히 진한 갈색으로 엉겨 붙은 것은 아니고……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여실하게 감지될 정도로 온기가 남아있다.
방금 죽인 게다.
“음!”
가슴 상처를 살펴보면 음사가 신음을 흘렸다.
그때쯤, 천천히 걸어온 누강이 시신 곁에 섰다.
“어떠냐?”
“굉장합니다. 장검으로 찔렀는데…… 살이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으음!”
음사의 말에 누강도 신음을 흘렸다.
흉기로 살을 찌르면 살결이 밀려 들어간다. 또 뺄 때는 밀려 나온다.
병기로 위해를 가하면 어느 상처나 이렇게 밀려 들어가고, 밀려 나오는 상흔이 생긴다.
여인의 가슴에는 그런 자국이 없다.
상처가 저절로 벌어졌다. 여인이 앞가슴이 누가 어떤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양쪽으로 쭉 찢겨나갔다. 그것도 찢은 흔적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게.
음사가 옷소매로 여인의 앞가슴에 묻은 피를 싹싹 닦았다.
낯선 여인의 앞가슴을 보는 것이 비례인 줄은 알지만…… 상처를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음!”
피를 닦아낸 음사가 다시 신음했다.
여인은 자신이 검에 찔려서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원…….”
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우리에게 보낸 경고,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자식들!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당주님, 우리 무슨 일에 말려든 겁니까?”
“…….”
누강은 음사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상대가 아주 강하다는 사실 외에 아는 게 전혀 없다. 검왕은 어떤 단서를 찾은 듯한데, 말해주지 않는다. 알아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판단일까?
“이자들이 손을 쓰면 우리는…….”
음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공격을 받으면 즉시 당한다. 반항이고 뭐고 말할 계제가 아니다.
그 순간, 누강은 퍼뜩 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들…… 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누강은 마공관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귀선부의 이령!
귀선부의 이령은 혼자만 온 것이 아니다. 마인들을 대거 데리고 들이닥쳤다.
마군 쌍첨수괴 도군악!
검성이 마군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이해할까.
그들…… 그들을 잊고 있었다.
“후후후!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보낸다 이거지.”
누강의 눈빛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은 웃고 떠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진중하지 않으면 상대는 또다시 경고를 보내올 것이다. 애꿎은 누군가가 또 죽게 된다.
최대한 진중하게 행동한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해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
‘어디로 갑니까?’
‘검성으로 가자.’
‘검성이요? 제 발로 호굴을 찾아가시겠다는…… 검성에서는 우리에게 현상금까지 걸었어요!’
‘그러니까 검성으로 가자는 거지.’
‘점점 이해하지 못할 말씀.’
‘지금 이 사달…… 귀선부의 이령이 마공관을 들쑤셔서 생긴 거야. 아마 그 전에 무슨 일인가 있었겠지만, 마공관이 터지면서 모든 게 표면으로 드러났어.’
‘그래서요?’
‘검성에 가면 뭔가 답을 찾겠지. 죽거나.’
두 사람은 개미 기어가는 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로 속삭이면서 길을 걸었다.
검성으로 간다.
자신들을 뒤쫓는 자들이 검성과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상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검성에 도착하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명확해진다.
두 사람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누강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길을 걷다가 목매달고 죽은 농부 시신을 봤다.
목매달고 죽은 시신…… 그런데 희한하게도 두 발에서 핏방울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진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는 것인가? 아니다. 핏방울은 발바닥…… 용천혈(湧泉穴)에서 흘러나온다. 발바닥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상처가 있다.
음사가 농부의 신발을 벗겨봤다.
더럽고 투박한 발…… 그리고 발바닥 한가운데 자그맣게 갈라져 있는 상처.
음사는 상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번에는 농부의 신발을 주워서 살펴봤다. 한참 동안…… 그러다가 툭 중얼거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깨끗한데요.”
“직접 사인은?”
“용천혈입니다. 용천혈을 사혈(死穴)로 둔갑시켜 버렸어요. 죽음은 굉장히 빨랐을 겁니다.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멀쩡했던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다행이야!”
누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농부를 음사가 죽인 것도 아니고…… 그에게 고함을 칠 이유가 없는데, 괜히 화풀이가 쏟아졌다.
“휴우! 이건 무슨 경고일까요?”
“…….”
누강이 복잡한 시선으로 농부를 쳐다봤다.
농부는 목매달아서 죽은 게 아니다. 죽은 후에 매달아졌다. 죽은 시신을…….
‘검성으로 가지 말라는 소리다!’
누강은 갈래 길에서 본 허수아비를 떠올렸다.
논을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는 만들어진 지가 꽤 오래된 듯,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꼭 목매달고 죽은 농부처럼.
그곳에서 방향 선택을 잘못한 게다.
검성으로 가는 길과 적벽검문으로 가는 갈래 길…… 검성으로 가지 말고 적벽검문으로 가라는 말이다.
‘이놈들이 대체 누구기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인이라면 이런 상황에 태연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과 자신이 무슨 상관인가. 몇 사람, 몇백 사람이 죽어 나가도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인의(仁義)를 손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견딜 수 없어진다.
‘이놈들이 본문에 볼일이 있다는 건데…….’
누강은 덜컥 겁이 났다.
혹여 자신이 호랑이를 이끌고 본문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놈들 때문에 본문이 피바다로 변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굶주린 늑대들을 이끌고 있는 지도.
누강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되지?
그에게는 불어오는 바람을 즐길 여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