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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章 투생(投生) (1)
혈루마옥, 혈루마옥, 혈루마옥…… 정말 혈루마옥인가.
혈천혈도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탁상 주위를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혈루마옥을 벗어날 수 있었지?
혈루마옥은 옥(獄)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옥이다.
누가 일부러 가둔 사람은 없다. 혈루마옥에 있는 사람들이 죄인도 아니다.
사마외도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다.
허나 그들은 혈루마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산과 산 사이의 작은 협곡에 불과하다. 산 정상에도 올라갈 수 없고, 중턱쯤에서 걸음을 멈춰야 한다.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한정되어 있으니 뇌옥에 갇힌 것이나 진배없다.
갑갑함을 이기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협곡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들은 계곡을 따라 산 밑으로 내려갔다. 혹은 산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결과, 그들은 모두 죽었다. 피눈물을 쏟으면서.
좁은 협곡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죄인 아닌 죄인, 뇌옥 아닌 뇌옥.
이 세상에는 그런 곳이 있다.
허면 협곡 둘레에 어떤 금제라도 가해져 있나?
그런 것은 없다. 중원에서 방문한 사람들은 산정상에도 마음대로 올라가고, 협곡에도 들락거린다.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협곡이나 다를 바 없다.
오직 혈루마옥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협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혈루마옥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저주를 안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혈루마옥 사람들은 중원에서 방문한 사람들을 잡아두기 시작했다.
협곡에서 사람이 필요하다.
일손도 필요하지만…… 짝을 맺을 배필이 필요하다. 사내도 필요하고, 여인도 필요하다. 혈루마옥의 저주를 잉태하지 않은 새로운 핏줄을 원한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중원 사람과 혈루마옥 사람이 만나서 자식을 낳으면…… 역시 저주를 이어받는다.
협곡에서 태어나면 협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원이 혈루마옥을 주목한 것은…… 그들의 무공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일매일 실전을 치른다.
좁은 협곡에서 살아남으려면 협곡 안으로 들어온 맹수를 절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호랑이가 되었든 곰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든 잡아야 한다.
생활이 그렇다 보니 조금씩 무공이라는 것에 눈 뜨기 시작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굉장한 무공이 탄생했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중원 사람을 가둔다. 허나 그들의 무공에 욕심을 부려서 일부러 잡혀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든 일초반식이라도 배워보고 싶어서. 물론 무공을 배운 다음에는 도주해 나올 심산이었겠지만.
혈루마옥 사람들은 저주를 안고 태어난 탓인지 성격이 편협하고 포악하다. 중원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패악스럽다.
혈루마옥에서는 대화보다는 힘이 우선이다.
동물들처럼…… 부모라고 해도 힘이 약해지면 서열에서 밀려나야 한다.
오직 강한 사람만이 우뚝 서는 강자존(强者存)의 세계다.
섬뜩하도록 잔인하다.
그들이…… 나왔는가.
“으음!”
혈천혈도는 침음을 흘렸다.
검왕이 어떻게 해서 혈루마옥을 아는지 모르지만…… 혈루마옥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협곡으로 들어간 중원 무인은 사로잡혀서 돌아 나오지 못한다.
누가 되었든 협곡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소식이 끊긴다.
그런 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 중원을 통틀어 봐도 혈루마옥에 대해서 귀동냥이라도 들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넘어서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혈루마옥은 알 필요가 없다.
허나 그는 안다. 혈천혈도…… 그는 혈루마옥을 안다.
‘검왕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검왕을 더 이상 다그치는 것은 좋지 않다. 원래 사자(死者)에게는 한 가지만 묻고 보내주는 것이 예의다. 그나마 검왕이 발작을 하지 않았으니 고마운 것이고.
허나 이대로 보낼 수 없다.
‘검왕이 어떻게 혈루마옥을 알았는지…… 혈루마옥…… 더 물어봐야겠어.’
결국 혈천혈도는 금단의 영역을 넘어서기로 작심했다.
검왕을 다시 일깨운다. 그에게 물어본다. 저승으로 가려는 영혼을 붙잡고 악착같이 캐묻는다.
이에 대한 부작용은 매우 심할 것이다. 어쩌면 마고가 겪었던 일보다 더 심한 일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혈루마옥이다. 물어봐야 한다.
회회문사가 있었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만류했을 게다.
먼저도 만류했는데,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위험하다. 어쩌면 앞을 가로막는 행위를 했을 지도.
‘그래도 물어봐야 해.’
혈천혈도는 밀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덜컹!
문이 열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검왕의 시신이 누워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유계로 빠지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놓은 탓인지…… 어둠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귀기스럽다.
혈천혈도는 유등에 불을 붙였다.
순간, 어둠이 밀려나면서 밀실 풍경이 환히 보였다.
“……!”
밀실을 본 혈천혈도는 잠시 무슨 일인지 몰라서 눈만 끔뻑거렸다.
검왕이 없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회회문사가 자신의 승낙을 받지 않고 검왕의 시신을 치웠다는 거다.
회회문사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가 경박하거나 무례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충성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회회문사가 검왕의 시신을 치워?
혈천혈도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회회문사는 밀실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 역시 혈루마옥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혈루마옥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도 머뭇거리지 못했다.
혈루마옥이라는 말을 듣고는 검왕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죽은 놈이 제 발로 걸어나갔을 리도 없고…….’
혈천혈도는 두 손에 진기를 운집하고 차분히 밀실 곳곳을 훑어나갔다.
혹여 마고가 당했던 것처럼 검왕의 영혼 없는 육신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이라면…….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급습을 가해온다면…….
아니지. 영혼 없는 육신이 기습 같은 것을 감행할 리 없지.
혈천혈도는 기습에 대한 대비를 갖추고 천천히 밀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뚜벅! 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밀실을 울린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적어도 밀실을 두 번 이상은 훑었다.
그래도 검왕은 없다.
검왕이 사라진 단서라도 찾으면 좋겠는데…… 단서도 없다.
그는 검왕이 누워있던 석판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봤다. 석편 너머에 침이 무수히 떨어져 있는 것을.
‘침을 뽑았다!’
영혼 없는 육신은 침을 뽑지 못한다.
마고가 당했던 것처럼 설혹 시신이 살아 움직이더라도 몸에 꽂힌 침은 뽑아내지 못한다.
침을 뽑았다는 것은…….
‘어떤 놈이!’
그는 눈에 살광을 담았다.
어떤 놈이 밀실로 잠입했고, 검왕의 몸에 박힌 침을 빼냈다. 그리고 검왕의 시신마저 훔쳐갔다.
이 세상에서 딱 두 명, 그와 회회문사만 아는 밀실에 잠입할 수 있는 놈이 누군가!
정말 회회문사가 작업을 한 것인가?
혈천혈도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회회문사의 작품은 아니다. 그가 작업을 한 흔적도 없고…… 회회문사가 침을 뽑았다면 저런 식으로 석판 밑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지는 않는다.
마고의 침은 세공술의 달인도 만들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다.
굵기는 세침이면서, 안에 독액을 품을 수 있도록 텅 비어 있어야 한다.
석판 밑에 떨어져 있는 침은 마고가 직접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중원의 어떤 장인도 저런 침을 만들지 못했다.
그토록 귀중한 침을 아무렇게나 던져놔?
회회문사가 한 일은 분명코 아니다.
혈천혈도는 밀실을 꼼꼼히 살폈다.
검왕은 사라지고 없다.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혈천혈도는 눈에 진기를 싣고 침입자의 흔적을 찾았다.
허나 없다. 아무런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검왕의 시신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혈천혈도는 망연자실 멍하니 서 있었다.
검왕이 혈루마옥이라는 단서만 주고 사라진 것이다. 아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만 아는 밀실에 감쪽같이 침입해서 자신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리고 검왕을 빼내 간 자, 그자가 누군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혹시 그자…… 혈루마옥 사람은 아닐까?
당금 무림에서 자신의 이목을 이토록 완벽하게 따돌릴 수 있는 자라면 혈루마옥 사람밖에는 없는데.
혈천혈도는 손에 힘이 빠져서 들고 있던 유등을 툭 떨어트렸다.
어둠이 밀려든다. 하지만 혈천혈도는 움직이지 못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는데……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든다. 중원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 *
환시동혼(幻視動魂)…… 백 번 시전하면 한 번밖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죽음의 공부다.
성공할 가능성이 단 일 푼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일 푼에 목숨을 걸었다.
미공자의 검을 맞았고, 능히 천 명을 죽일 수 있는 극독을 전신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을 믿었다.
실제로 그의 몸은 시신처럼 경직되었다. 부패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 상태를 사흘만 유지한다면 생명이 끊긴다. 그때는 천신이 와도 살릴 수 없다.
다행히 혈천혈도가 간발의 차이로 독액을 주입시켰다.
독액이 생명을 되돌려 준다.
앞으로는 손에 닿는 사람마다 중독시키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독인(毒人)이 되겠지만…… 어쨌든 죽음에서 깨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환시동혼으로 미공자를 속일 수 있을까?
다행히 미공자가 속아 넘어갔다.
혈천혈도가 직접 그의 몸을 만질 것이다. 각종 마공에 능통한 자가 육신을 살핀다.
그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환시동혼은 그의 눈도 속였다.
그는 살아있으나 완벽하게 죽은 몸이다. 단 한 줄기 생명줄만을 쥐고 있을 뿐인데…… 그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숨겨야 한다.
다행히 모두 성공했다.
혈천혈도의 음혼차류환시사는 환시동혼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다만…… 환시동혼에서 깨어나 다신 움직이기까지는 최소한 보름 이상이 걸린다.
그동안은 고양이조차도 상대할 수 없는 미약한 처지가 된다.
환시동안은 생명의 기운을 극도로 죽인다. 지옥 끝까지 몰아넣는다. 그 누구도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니 돌아 나오는 길도 평탄치만은 않다.
환시동혼에서 깨어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 후, 혈천혈도의 손아귀를 벗어나야 한다. 중원 제일의 강자인 혈천혈도의 이목을 속여야 한다. 고양이조차도 상대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몸으로.
방법은 오직 하나…… 환시동혼을 다시 펼치는 것이다.
먼저 펼친 것이 대환시동혼이라면, 혈천혈도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주 잠깐 동안 시전하는 소환시동혼을 펼친다.
많은 시간 동안 죽어있을 필요는 없다. 아주 짧은 순간…… 대략 한 시진 정도만 죽어있으면 된다.
석판 밑!
그가 죽어있는 곳이다.
뚜벅! 뚜벅! 뚜벅!
혈천혈도가 어둠 속을 걸어나간다.
그가 떨어트린 유등에서 진한 기름 냄새가 피어난다. 불길이 기름을 타고 번져나가다가 스르륵 꺼진다.
혈천혈도는 힘없이 밀실을 걸어나갔다.
그 순간, 검왕은 소환시동혼에서 깨어났다.
그가 눈을 들어 어둠을 본다. 마공관 석실처럼 캄캄한 어둠을 노려본다.
어둠에는 익숙하다.
‘독인이 되었는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중원을 무너트릴 수 없다.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
검왕은 어둠을 보면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