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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章 환사(幻邪) (5)
도와주세요!
벼랑 끝에 치몰렸을 때, 벼랑에서 떨어질 때……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 마세요!
배고픈 호랑이는 먹이를 살려주지 않는다. 머리를 조아리고 애원을 하면 더욱 쉽게 먹을 뿐이다. ‘하지 마세요’ 같은 간절한 소망은…… 미안한 말이지만 통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머릿속이 텅 빈다.
저항도 할 수 없고, 말릴 수도 없고…… 씨근덕거리는 사내의 숨소리만 듣는다.
적벽검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십마를 장난감처럼 두들겨대던 검왕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정의는 없다.
“역시 요미검체!”
미공자가 만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주 좋은 몸이야.”
미공자의 눈길이 전신을 누빈다. 몸 구석구석을 살핀다.
누미는 하늘만 쳐다봤다.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실타래 같은 것이 잔뜩 엉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속에서는 울분이 치솟는다.
그러나 울분을 표현할 길이 없다. 목구멍으로 치솟는 말은 많다. 하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혹여 미공자가 마음 편해 할까봐……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다.
미공자가 누미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 달, 딱 한 달이다. 한 달만 나와 함께 지내자. 그동안 네 마음을 돌려놓을 테니까. 조건은 단 하나, 밤마다 운우지락을 즐기는 것. 아무런 조건 없이, 최선을 다해서.”
개자식…… 뭐라고 하는 거야?
“한 달이 지나도 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후후! 약속하지. 내 목을 준다.”
누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미공자는 누미의 표정변화를 알아챘다.
누미의 마음속에 깃든 분노가 처음으로 표출되는 순간인데 어찌 알아보지 못할 리 있는가.
“한 달이 지난 후, 그때도 분기가 가시지 않으면 내 목을 가져가.”
미공자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줬다.
“물론 내 목을 가져가기가 쉽지 않을 거야. 나와 싸워서 날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내 목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걸 알려주지. 단, 보름이 지난 후에.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써먹을 테니까.”
“…….”
“후후! 그럼 약속한 의미로…….”
미공자가 입술을 포개왔다.
누미는 입을 다문 채 벌리지 않았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몸을 허락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한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인 저항이 이미 불이 붙어버린 욕정 덩어리를 막을 수는 없다.
“하악!”
사내가 거친 숨을 뿜어냈다.
누미는 또다시 하늘로 눈길을 주었다.
몸이 유린되고 있지만…… 하늘은 맑기만 하다.
‘으음!’
비형은잠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누미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능욕을 당하고 있다. 알몸으로 엉킨 두 남녀가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가가지 못한다.
팟! 파파팟!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면 어둠 한 켠이 살그머니 일렁거린다.
그 사내, 미공자의 몸종으로 보이는 사내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
웃기는 것은…… 상대가 있다는 것을 눈치만 챘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상대는 자신을 칠 수 있다.
상대가 공격을 해오면 도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십마 중에 한 사람이라는 비형은잠이 정체도 모를 자에게 손발이 묶이고 말았다.
숨어있는 자를 제치고 나아간다고 해도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다.
미공자를 무슨 수로 제지하나.
누미가 미공자 손에 잡혔다. 힘으로 제압당했다. 그리고 능욕을 당하고 있다.
저 일을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없다.
비형은잠은 그래도 ‘설마!’하는 생각을 했다.
미공자는 무공이 매우 높다. 신분도 매우 높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자가 백일하에 사방이 환히 트인 곳에서 외간 여자를 강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밤에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미공자는 세상눈이 두렵지 않다는 듯 하고 싶은 행동을 마음껏 한다.
뒤처리는 물론 몸종으로 여겨지는 자의 몫이다.
그가 뒤처리를 확실하게 맡는다.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엄포를 놓는다.
‘제길!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어!’
십마에게, 마인들에게 여인의 정조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다. 크게 신경 쓸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형은잠이 두려운 것은 저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 태연함에 있다.
미공자의 행동은…… 마인들의 눈으로 보면 매우 익숙해 보인다.
미공자는 이런 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살아왔을 게다. 남의 눈치 같은 것은 일절 보지 않고.
미공자에게 그만한 권력이 있다는 뜻이다.
‘음! 굉장히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 같네. 그러나저러나…… 독거미 손에 걸려든 것을 어찌 빼내나.’
그는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뽀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공자는커녕 몸종조차도 상대하지 못할 무공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거의 없었다.
미공자는 그녀의 육신을 세 번이나 탐했다.
숨이 거칠었다가 잦아들고, 한동안 고른 숨을 쉬었다가 다시 거칠어진다.
헌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사내의 헐떡거림에 반응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피가 뜨거워진다. 몸속에서 야릇한 흥분이 소록소록 피어나는 것을 감지한다.
‘이런!’
누미는 당황했다.
미공자가 한 달 동안 같이 지내자고 했을 때, 기꺼이 그래 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준다고 하지 않나.
한 달이 지난 후에 반드시 목숨을 취할 것이다. 그가 어떤 방법을 일러줄지 모르지만…… 설혹 일러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옆에 있으면서 살해 기회를 엿보겠다.
그녀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조를 이런 식으로 유린당할 줄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미공자에게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내가 너무 곱고 예뻤다. 아름다웠다.
만약 미공자가 감언이설로 속삭여 왔다면…… 어쩌면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눴을 수도 있다.
헌데 미공자는 기다리지 않았다.
힘으로 제압당한다. 힘에 눌려서 능욕당한다.
그녀에게는 이만한 수치가 없다. 너무 치욕스러워서 혀를 깨물고 싶다. 헌데…… 헌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한 달? 좋다. 한 달 동안 참아주마!
그랬는데…… 사내의 손이 몸을 스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일어난다. 피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술에 취했을 때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미공자도 누미의 변화를 눈치챘는가?
“귀엽군.”
미공자가 툭 한 마디 던져왔다.
누미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도록 아프게 깨물었다.
“후후후!”
미공자가 웃었다.
열기…… 뜨거운 열기…….
그것은 정염이 아니다. 욕정이 아니다. 흥분해서 일어나는 뜨거운 피가 아니다.
단전에서 열양진기(熱陽眞氣)가 피어난다.
누미는 체내의 변화를 단박에 감지했다.
사내가 배 위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허나 사내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누미는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방관한 채 오직 몸속의 변화만 주시했다.
단전에 정체 모를 열양진기가 쌓인다.
진기의 근원은 미공자다. 미공자의 진기가 교합을 통해서 그녀의 체내로 빨려들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그녀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듯 정신없이 정사에 열중한다.
확실히 미공자는 그의 진기가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누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허락 없이 몸을 유린한 데에 대한 징벌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녀는 열양진기가 어떻게 피어나는지 살폈다.
온몸을 뜨겁게 달궜던 열락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다. 분함도 없다. 이제는 복수만 남았다.
미공자가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누미는 멍하니 누워있다가 부스스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미공자가 누미를 흘깃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무 분하게 생각하지 마. 서서히 알아가겠지만 나…… 굉장히 괜찮은 남자거든.”
“…….”
“나라고 생각이 없을까. 서로 가까이 지내고, 마음을 통하고, 그런 다음에 서로를 나누고. 나도 알지, 그런 것.”
“…….”
“하지만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반대로 하기로 했어. 먼저 몸을 취하고, 서서히 마음을 나눠가고. 후후! 한 달이라고 했지? 난 한 달이면 충분히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
“가자. 우선 배부터 채워야지. 이제부터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한 달 동안 무조건 그래야 돼.”
미공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표정은 순진했다. 방금 전에 난폭하게 몸을 유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호감 가는 미공자로 돌아왔다.
“기분이 편치 않을 텐데, 술을 마실까?”
“…….”
“아! 이런! 우선 목욕부터 하자.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몸이 더러워졌다고 생각되지?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여자도 누릴 수 없는 사랑을 줄 테니까. 하하하!”
미공자는 굉장히…… 굉장히 철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머리가 모자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여자를 모르는 쑥맥 중에 상쑥맥이거나.
“들었지?”
어둠 속에서 조용한 울림이 전해져 왔다.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두 사람은 같이 있게 될 거야. 그러니 무슨 수작을 부리더라도 한 달 후에나 부려라. 그 전에 날 귀찮게 하면…… 죽는다.”
분명히 비형은잠에게 하는 말이다.
비형은잠은 소리가 흘러나온 곳을 주시했다. 음성의 강약, 고저로 거리도 판단했다. 허나 몸종인 듯한 자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널 죽일 수도 있으나…… 나중에 쓸모가 있을 듯해서 살려준다. 그러니 호의를 악의로 갚지 마라.”
‘분명히 저곳인데!’
비형은잠은 소리 나는 곳을…… 아!
비형은잠은 너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신형이 드러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숨었던 곳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두 남녀를 쳐다봤다.
미공자와 누미가 걸어간다. 미공자가 앞서서 걸어가고, 누미가 뒤따라간다.
누미는 한 달 동안 사내 곁에 있기로 작심한 듯하다.
‘쌍마환령…… 쌍마환령…….’
비형은잠은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쌍마환령이라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쌍마환령은 일종의 사술(邪術)이다.
음기가 충만한 여인의 몸에 양기를 불어넣어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만든다. 그런 후에, 충만해진 음양진기를 한 올 남김없이 일시에 뽑아버린다.
물론 이 조건에 해당하는 여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먼저 극음지체이어야 하고, 만무에 달통할 수 있는 요미검체여야 한다. 사내의 양기를 흡취함에 있어서 조금도 거부반응을 드러내지 않는 양신(養神)도 지녔어야 한다.
이런 여인이 가꾼 음양진기는 가히 천고의 보물이 된다.
음양진기가 제 몫을 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딱 한 달!
한 달이 넘으면 그, 누구도 음양진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또 한 달이 되지 않으면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저 강한 내공을 흡취한 정도다.
완벽한 음양진기가 어떠한 위력을 발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쌍마환령을 이룬 자는 불사신체(不死身體)가 된다는 전설만 전해진다.
미공자…… 저 사내…… 호색한이 아니다. 누미라는 여인을 취한 것이 아니다. 저 사내는 누미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일렁거렸다.
“한 달이다. 가급적이면 한 달 동안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